예수(11): 자존심을 버리게 하십니다 

4:46-53

 


팬데믹으로 인해서 전 세계의 물적, 인적 이동이 줄어든 것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앞으로 환경이 좀 나아지면 여행 계획들을 세우실 텐데요. 빨리 그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사역을 가만히 보면 여행을 참 많이 하신 분처럼 보입니다. 당시에 교통형편도 불편한데 많은 곳을 다니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느 곳에든지 가서 하신 일은 마 4:23절 말씀처럼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제자 요한은 예수님이 가시는 장소를 상세히 기록하며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정을 보면 먼저 요2:23절에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지내셨습니다.

 

그곳에서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를 만나는 일이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3절에 의하면, 이제 유대를 떠나 거처하던 곳인 갈릴리로 돌아 오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해서 우회해서 갈릴리로 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4:4절을 보면 주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한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으로 한 동네에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틀 정도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4:40절입니다. 4:43절은 이틀을 머물고 거기를 떠나 갈리리로 가십니다. 4:46절은 갈릴리 가나에 이르게 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한이 다른 복음서와 달리 ‘표적’이란 말을 사용하듯이 주님의 여행지를 소상하게 기억하며 알려 주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여행들이 매우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앞선 사마리아 여행도 유대인들의 관습을 깨드리며 한 여인을 만나려는 계획을 가지고 그곳을 지나게 되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놀랍습니다. 우물가의 한 여인의 구원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4:42절에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는 많은 동네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를 떠나 주님은 첫 표적을 일으키신 갈릴리 가나에 다시 오신 것입니다.

 

이곳은 결혼식장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그런데 한 번 더 이곳에 오신 것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주게 됩니다. 3:1절에 의하면 당시 갈릴리 지방은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가 통치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곳에 도착하자 왕의 신하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가 어떤 직책을 맡고 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가버나움은 로마군대가 주둔한 지역임을 감안하면, 아마도 군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52절을 보면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열이 나는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47절에 의하면 그 아들의 처지가 매우 심각하여 거의 죽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왕의 신하는 이미 예수님이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45절에 의하면 갈릴리 사람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한 모든 것을 보았기에 이미 소문도 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찾아가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가지고 달려 왔습니다.

 

가나와 가버나움은 30km가 조금 넘는 거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52절에서 나중 자기의 종과 나누는 이야기를 참고해 보면 이틀이 걸리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험한 길임을 짐작합니다. 47절을 보면 죽어가는 아들을 둔 아버지는 그런 것 고려하지 않고 주님께 와서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라고 청합니다. 

 

자신이 직접 온 것은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라는 주님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담겨 있습니다. 왕의 신하정도면 종들이 있을 것입니다. 종을 보내어 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찾아와 요청하는 겸손함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들의 상태가 매우 위급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도 왕의 신하로서 정말 급하고 중요한 사항은 직접 보고를 했을 것입니다. 부모가 직접 온 것은 주님으로 하여금 얼마나 자신의 아들이 지금 심각한 상태에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 ‘청하다’는 미완료시제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미 한 두 번 부탁을 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몇 번이나 부탁하는 사람에게 반응하는 주님을 보기 바랍니다. 급한 위기 상황에서 간절함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요? 48절을 보면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의외로 꾸짖듯이 매우 무뚝뚝합니다. 안 들어 줄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이 사람은 표젹과 기사만을 바라는 그런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아들이 죽게 되어 낫기를 바라고 도와 달라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왜 주님은 이런 절박한 사람의 간청을 한번에 들어주지 않고 애가 타게 만들고 있는가? 이 문제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의 이런 모습은 여기서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지난 번 결혼식장에서 포도주가 떨어짐을 보고 아들에게 말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대답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막 7:27절의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고쳐 달라 요청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방 여인의 간절한 요청을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라고 시큰둥하게 대합니다. 이방 여인이나 왕의 신하 역시 둘 다 아픈 자녀를 가진 부모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자존심 상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정말 주님은 그들의 요청에 응하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슨 의도가 있을까요? 무슨 의도로 주님은 그렇게 말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부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냉소적인 태도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기도 안 들어 주실 것 같아’ 라고 미리 판단하고 더 이상 나아가는 것 멈추어 버립니다.

 

아니면 힘들고 어려워 주님의 손길이 꼭 필요할 때에도 주님께 관심조차 두지 않는지요? 나아가는 것 조차 잊고 살지는 않는지요? 내 일에 바빠 한 두 번 기도하고, 시간 나면 기도하고, 생각나면 기도하는 그런 모습은 아닌지요?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은 일단 포기하지 않고 도전적입니다.

 

7:28절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녀의 대답은 언뜻 듣기에는 매우 도전적으로 들리지만 정말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청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정말 절실함이 느껴지는지요?

 

4:47절의 ‘내려 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그의 청함에는 분명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은 ‘청하다’ 보다 강한 의미인 “애원했다”(영어:beg, implore)로 번역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즉각 응답하지 않고 48절에서 한번 더 신하의 마음을 애타게 만드는 말만 하십니다. 

 

게다가 주님이 책망하는 대상이 왕의 신하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하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직접 당사자에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라고 애매하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왕의 신하는 즉각 요4:49절에서 다시 한번 더 간청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어쩌면 더 강하게 간청하는 모습입니다. 체면이고 뭐고 뒤로하고 주님께 더욱 메달리며 부르짖는 절규가 한번 더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첫 번째 청할 때는 바로 응답하지 않고 이 사람을 힘들게 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47절과49절의 신하의 말을 둘 다 보아도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아버지만 보입니다.

 

결국 기적을 보고 믿는 믿음이 있고 없고가 이 사람에게 문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주님 앞에 서 있는 왕의 신하의 자존심이 깨어지지를 바라고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앞에서 언급한 ‘청하다’는 동사는 미완료시제입니다. 그가 계속해서 몇 번 주께 요청하였음을 나타내 줍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응답할 때까지 간청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몇 번 간청했다고 멈추어 서려는 그를 향해 그가 살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의 기적만 보고 믿으려는 믿음 없는 모습을 넌지시 빗대어 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으로서는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그가 예수님 앞에서 자존심을 내려 놓게 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살펴볼 것들이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왕에게 속한 사람’

이란 원어적 의미로 보아 상당한 고관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아들이 ‘병들었다’는 동사는 미완료시제가 사용되어 오래 동안 병을 앓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아들이 곧 죽게 된 상황에서 병 고침을 간청하긴 했지만 이제 더 이상 간청하는 것을 멈출 수 있는 위기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 8:5-13절의 가버나움의 백부장과는 대조가 됩니다.

 

자신의 집에 주님이 직접 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단지 말씀만으로도 하인이 나을 것으로 고백한 믿음은 그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백부장의 믿음에는 분명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고려해 본다면 주님의 책망은 왕의 신하가 다시 주님에게 한번 더 강력하게 요청하는 불씨가 된 것이지요.

 

자신은 왕의 신하입니다(왕의 고위 신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굽실거리며 오히려 그보다 앞서 가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계속 그의 간청을 들어주기를 늦추고 있습니다. 그것도 몇 번씩 말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미 자존심이 상했겠지요. 한 번 더 간청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자존심은 역사를 일으키는 방해거리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 놓을 때 치유함을 받은 구약의 인물을 기억합니다.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는 아람이라는 나라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병이 들어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고 그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만 합니다. 나아만은 자신이 어떤 위치의 사람인데 알아주지도 않자 자존심이 상합니다. 능력 많은 선지자로 알고 왔는데 한 번도 아니고 일곱 번 왜 들어가야 합니까? 게다가 아람에도 맑은 강도 많은데 깨끗해 보이지도 않는 요단강에 들어가라고 합니다.

 

왕하 5:5절에 나아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기나 하듯 많은 선물을 갖고 옵니다. 사람의 경험, 재산과 지위는 인간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도구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에게는 문전박대부터 당합니다. 선지자는 그의 자존심을 엄청 건드립니다. 두 사람 사이의 대치는 서로의 ‘기’ 싸움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보시는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불순종과 나아만 장군의 자존심을 꺾으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수 많은 전쟁을 승리하며 왕의 신임과 백성들의 사랑을 받던 장군이었습니다. 엄청 자존심 강한 그는 왕하 5:11에서 선지자가 병 고치는 방법을 제시하자 화가 나서 돌아 가려 합니다.

 

왕하 5:9절처럼 군사를 이끌고 오면 그의 위엄 앞에 선지자가 뛰어나와 나와 굽신 거리며 자신의 병을 고쳐줄 것을 예상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선지자 말도 안 듣는데 과연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말씀은 나중에라도 듣겠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은 아람이 가진 국력과 비교하면 정말 약소한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자신보다 더 약한 나라의 여호와라는 ‘신’이 눈에나 들어오겠습니까? 자신의 지략과 용맹이 없었다면 아람이라는 나라는 제국을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자부심 또한 강하겠습니까? 그래서인지 그는 능력 있어 보이고 용한 선지자에게 그냥 선물 정도 주고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위용을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오직 목적은 병만 낫고 가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위한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선지자를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부터 듣게 만듭니다. 상세한 것을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나중 나만 장군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에게 배려하신 은혜였습니다.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나병이라는 병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방인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 말씀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 본문의 왕의 신하 역시 죽어가는 아들의 병 고침을 목적으로 왔을 뿐입니다. 주님과 이어지는 대화로 오히려 자존심만 상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의 자존심마저 내려 놓는 주님의 도전 앞에 그는 순종합니다. 그리고 정말 죽기보다 하기 싫은 간절한 요청을 한번 더 주님께 49절에서 하게 됩니다.

 

주님은 그의 모습을 보시고 50절 상반절에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죽기보다 싫은 내 자존심을 주님 발 앞에 내어 드릴 때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50절 하반절에서 그는 분명 예수님 말만 듣고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 온 집안이 다 믿는 놀라운 축복을 53절에서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키려는 자존심이 있는지요? 세상에서 잘 되고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야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경기에서 금메달 따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는데 이제 나를 하나님이 무시하니 자존심에 금이 가는지요?

 

주님 위해 이렇게 섬기고 헌신한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외면하니 자존심 팍 상하는지요? 어떤 이유에서든지 내 마음 상하게 만든 주님 앞에 붙잡고 있는 나의 자존심을 한번만 더 포기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왕의 신하가 주님 앞에서 한 것처럼 몇 번 요청하는 차원의 기도를 넘어가야 합니다.

 

‘간구’가 있어야 합니다. 간구는 주님이 응답할 때까지, 내 자존심이 상해가면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보지는 못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앞에 서서 나의 기도제목을 다시 한번 더 아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할 때 인간적인 자랑은 모두 다 사라집니다. 오직 나의 상한 마음만 주님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만신창이가 된 나를 바라보아야 이것이 자존심을 내버린 증거입니다. 그때 주님께로부터 응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은 가장 버리기 힘든 내가 자랑하는 자기 ‘의’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는 장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심을 갖고는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자존심을 내 버려야 내 속은 믿음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믿음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응답 받지 못한 내 삶에 하나님의 개입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이 내 속에서 느껴지게 됩니다. 내 배속의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오는 평강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감동이 느껴집니다. 나 스스로 만들어낸 감정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에게 다가오시며 지금까지 거부했던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만듭니다. 나를 안아 주시며 너도 세상을 품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 놀라운 선물을 위해 이제 내 자존심을 내려 놓는 성도님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