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주일: 오셔서 내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20:1-10

 


역사는 사건을 기초한 기록들입니다. 세상에는 전쟁이다 사고다 과학적 발견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최대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입니다. 물론 앞으로 다가올 주님의 재림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고 가장 놀라울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어떤 사람이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자신의 가르침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 번 보시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호언장담 합니다. 신성모독에 해당되는 발언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말씀은, ‘자신이 죽고 사흘 뒤에 살아 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을 놀라고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죽고 살아나지 못한다면 예수님이 한 말은 모두 거짓이 될 것입니다.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너무 황당하고 허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종교 지도자들을 보기 바랍니다. 삼일 뒤에 확실히 증명될 일을 말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기독교는 사실에 기초한 신앙임을 증명해 줍니다.

 

부활 신앙이 없다면 기독교는 이천 년 전에 이미 거짓 종교가 되었고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약속하신 대로 분명히 죽었고,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 사건은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었고,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믿게 만들어 줍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한 대로 다시 살아난 부활 사건의 현장으로 가 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라면 현장 중계가 되었겠지요. 2천 년 전이라, 그 현장을 실제로 처음 본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우리들에게 지금 성경 말씀으로 기록하여 남기고 있습니다.

 

20:1절은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난 시간을 정확히 ‘안식 후 첫날’이라 말합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므로 이 날은 당연히 일요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날을 기념하여 ‘주의 날’로 지키게 됩니다. 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여 떡을 떼며 말씀을 듣는 모습을 행 20:7절에서 보게 됩니다. 

 

여기서 ‘첫날’이라는 의미는 주님이 부활한 날입니다. 인류가 사망 권세를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영원히 해결 할 수 없었던 죽음이라는 인류의 난제가 극복된 승리의 날입니다. 교회는 이 감격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계속해서 이어가려 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의 부활 현장에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20:1절에서 기록합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는 다른 여인들도 함께 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고 여기서부터 부활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조작된 사건이고, 거짓이며,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로 발전하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20:2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의 현장을 보고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달려갑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우리가알지 못하겠다” 라고 두 제자에게 말합니다. 여기서 막달라 마리아가 혼자였다면 ‘내가’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우리’라는 말을 대신 사용합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와 동일하게 예수님의 빈 무덤에 간 것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여인들과 함께 갔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의 증인이 확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들은 증인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3절을 보면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현장에 직접 가보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주님은 또 다른 제자들과(20:19-23), 도마에게(20:26) 나타나는 장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첫 증언이 여성들의 증언에 기인한 것이라는 지적은 별 문제가 안됩니다. 게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중 직접 본 사람들이 500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고전 15:6은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공관복음은 물론 요한도 부활의 현장에 다른 여인들도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 사건의 첫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녀가 예수님과 뭔가 관계가 있는 여인이다’ 라는 등 엉뚱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확실한 한 가지는 다른 여인들처럼 주님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8:2-3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나간 후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자기의 소유로(돈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현장에도 예수님이 못 박히시는 것을 곁에서 보았고(19:25), 어디에 장사되는지 무덤까지 확인합니다( 27:61).

 

예수님이 죽은 후 같은 날 금요일 저녁에, 일몰과 함께 시작되는 안식일이 가까이 오자 여인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막 16:1-2절을 보면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일몰 후에 예수님 시신에 바르기 위한 향품을 구입합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일요일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여인들은 무덤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예수님께 대해 감사의 삶을 살아가던 여인입니다. 십자가 수난의 시간에도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뒤를 따라갔고, 십자가 밑에까지, 나중에는 묻힌 무덤까지 찾아온 여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주님을 어디까지 따르고 있는지요?

 

이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큰 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 시체를 달라고 하지도 못했습니다. 자신의 새 무덤을 내어 놓을 수 있는 그런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공회나 로마의 권력자들 앞에 나가 증언하도록 허락 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할 수 있는 일도 ‘피해가는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는지요? 내게 주신 건강 지혜 명성 물질 시간 달란트가 있는데도, ‘못해요’라고 말하는 성도는 아닌가요? 내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십자가에서 멀어졌던 제자들처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내 모습’ 은 나타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우리는 신약에서 흔하디 흔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인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막달라’는 갈리리 주변의 작은 마을입니다. 일곱 귀신에 들렸다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나 이웃과 정상적인 관계를 가지며 삶을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흔한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아 그녀는 부자나 유명한 가문의 딸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예수 부활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으로 언급합니다. 이제 그 사실을 확인해 보려 합니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여인들과 함께 분명히 무덤에 갔다는 것을 이미 확인했습니다.

 

그렇지만 막 16:5절을 보면, 함께 온 여인들은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을 만나는 것까지만 함께 합니다. 그리고 막16:8절을 보면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렇지만 요20:2절에 마리아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가서 알리게 됩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두 제자가 달려갑니다. 이때 그녀도 다시 무덤으로 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20:10절에서 두 제자는 빈 무덤을 확인만 하고 그냥 돌아가 버립니다. 두 제자가 그때까지 아는 것은 빈 무덤이라는 사실뿐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아직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부활 역시 믿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20:9절에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나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뒤 부활을 믿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은 반드시 죽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일대일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자를 고치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떡을 주고, 약한 자들을 찾아가 만나주는 예수만 보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이웃을 돕기는 하지만,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모르기에 복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 없는 구제는 생명 없는 구원입니다. 그렇다고 구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반드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헐벗은 분들을 입혀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인들도 제자들도 다들 정말 돌아갔습니다. 주님이 있던 무덤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의 무덤 곁에 남아 있는 한 사람, 막달라 마리아를 한번 더 보기 바랍니다. 이제 그녀가 어떻게 점점 더가까이 가는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덤을 찾아오는 막달라 마리아는 20:1절을 보면 새벽에 아직 빛이 없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여기서 ‘어둠’은 단지 배경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 이상을 말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죽음을 본 그녀의 심정인 것 같습니다. 한 줄기 희망도 소망도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던 주님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어린 소녀와 백부장의 종과 나사로까지 살린 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정작 예수님 자신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지도 못했습니다. 이 안타까움과 상한 마음이 그대로 ‘어둠’이라는 단어 속에 녹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둠에서부터 반전은 일어납니다. 우리가 당하는 비극과 고난과 아픔과 슬픔 가운데서 소망이 생긴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린다고 희망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가져갔기에 희망과 소망과 평강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하고 주께 점점 더 가까이 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20:11-12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 혼자 남아 무덤밖에 서 있다 무덤 안을 들여다 봅니다. 놀랍게도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누군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도 무덤에 들어갔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천사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 여인이 들어 갈 때에는 누군가(천사가) 나타났을까요?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 가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두 제자의 심령과 이 여인을 비교해 볼 때 제자들이 갖고 있지 않는 것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통해 하는 상한 심령입니다. 제자들 대부분은 십자가 곁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따르며 울었다고 기록합니까? 23: 27절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들’이라고 기록합니다. 따라온 여인들은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며 또 울었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한계까지 가려고 했습니다. 십자가 곁에까지 간 4명의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요19:25절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도 있습니다. 요한은 유독 막달라 마리아를 따라가며 조명을 비춥니다. 이른 새벽부터 무덤에 온 막달라 마리라는 두 제자가 빈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그녀만 남아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인들과 함께 가장 먼저 무덤을 찾아 왔고, 가장 늦게까지 떠나지 않고 무덤을 지킨 여인입니다. 20:11절을 다시 보면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고 ‘울면서 구부려서 안을 들여다 보았다’ 까지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무덤에 가장 먼저 왔지만 아직 들어가 보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20:1절을 보면 새벽에 다른 여인들과 왔을 때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진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 간 것뿐입니다. 그러니 자신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겠지요. 그런데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흰 옷 입은 두 천사를 보았고 대화까지 나누게 됩니다. 20:13절 상반절을 보면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묻습니다.

 

아마도 그 시간 정도면 어느 정도 날도 환히 밝고 시간도 상당히 지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마음은 아직 어둠이 깊이 깔려있는 새벽처럼 느껴집니다. 20:13절 하반절에서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는 대답을 합니다.

 

마리아는 그 말을 하고 뭔가 있음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이것 때문인지 막 16:9절은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부활한 예수님을 본 사람이라고 말해 줍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특별히 아끼던 제자 세 명도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며 섬기며 무덤까지 온 여인들도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무덤에 남아 있는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구부려 주님 계신 곳으로 더 가까이 가려고 안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요20: 15절에 의하면 주님의 시체를 자신이 가져가려고까지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두 제제에게도 나타나지 않았던 모습을 처음 보여주었을까요?

 

남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 그녀의 몇 가지 태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마리아를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15절을 다시 보면 그녀는 주님을 보는 그 순간까지 ‘울고 있는’ 여인입니다(흐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큰 소리 내어 우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마리아에게 주님이 나타난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하염없이 흘리는 슬픔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함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울고 있는 그녀에게 주님이 나타나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인지 ‘알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을 전합니다. 눈물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무덤 안이 어두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주님의 시체가 없다는 충격 때문일까요?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조차 없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목소리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을 향해 ‘여자여’라고 15절에서 불렀기에 동산지기로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마리아야’라고 불러 주십니다. 그 때 그녀는 그때에야 ‘나의 선생님’하며 예수님임을 알아차립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진짜 주님을 알게 되고, 눈물이 마르고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동산지기는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녀의 이름을 아시고 불러 주십니다. 마리아의 심령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그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나의 고통 가운데, 눈물 가운데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내가 고통 가운데 있다고 주님이 나를 잊은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내가 잊혀진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내게 올 수 있는 기회입니다. 주님은 내가 눈물 흘리고 있을 때, 내 이름을 불러 주시기 위해 직접 찾아 오십니다. 내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내 이름을 기억하시며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확실히,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위로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둠을 이기시고 사망에서 살아나신 부활주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 어느 누구보다 감사와 사랑으로 더 주님께 가까이 가기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셔서, 상처 가진 나에게 기름 부어주시고, 아픈 나를 치유하시며, 힘들어 하는 내 영혼을 회복하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허락해 주심을 믿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