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8): 말씀으로 도전하십니다 

2:1-10

 


이번 주 한 주간은 성도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날입니다. 그때 백성들이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었다고 해서( 21:1-9)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를 고난주간이라 부릅니다.

 

성경의 기록들을 따라가보면 성전을 청결케 하십니다(). 종말설교를 들려주시고(), 한 여인이 옥합을 깨드리는 사건(),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나눕니다(). 특히 금요일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하는 날이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생명의 날이며 구원의 날이기에 성 금요일이라(Good Friday) 불렀습니다. 이 고난 주간을 성도들은 경건하게 지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며 지내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락을 삼가 하시고 죄를 철저히 고백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금요일 목장모임 대신 자녀들에서부터 온 성도가 함께 줌으로 모여 올해는 성금요일 예배로 드립니다. 설교는 영어로 번역하여 미리 이메일로 보내 드리고 자막이 가능하면 올려 드릴 것입니다. 다들 함께하셔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찬양을 올려 드리는 귀한 시간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보아오던 본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높이 하늘을 날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땅의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그런 의미라고 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복음 기자가 사용하지 않는 ‘로고스’ 즉 ‘말씀’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들을 전부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기적’이라는 단어보다는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전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적과 기적일지라도 주님의 의도와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1)주님을 세상에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2) 세상이 예수를 바르게 알고 그리스도로 믿게 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계획을 가지고 요한은 먼저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고백부터 들려주고, 그 다음 표적들을 소개하는 순서를 취합니다. 

 

1장에서 1-18절은 요한 본인의 고백을, 19-34은 예수님보다 먼저 사역을 시작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35-42절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의 고백을, 43-49절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주님께 드린 고백을 우리에게 순서대로 들려 줍니다. 그리고 난 뒤 2장에서는 주님이 보여주신 첫 표적 하나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첫 표적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첫 표적은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첫 신호탄이 됩니다. 이어지는 3장에서 니고데모의 ‘거듭남’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처럼, 성령으로 완전히 새로워지는 우리의 영적 변화를 알려 줍니다.   

 

4장은 사마리아 우물에서 만난 여인이 완전히 변하는 삶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뭔가 숨기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며, 정오에 물 길러 온 여인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를 만나고 동네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여인으로 변신합니다. 5장은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치유된 모습을 소개합니다.

 

병 고침을 받은 이 사람은 요 5:15절을 보면 예수를 알리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표적을 보여주신 목적은 요 2:11절에 의하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표적들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표적 외에 6개나 더 있습니다.  

 

4장에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는(#1), 5장의 베데스다 38년 병자를 고치는(#2), 6장의 오병이어(#3), 6장에서 다시 바다 위를 걷는(#4), 9장의 날 때부터 소경을 고치는(#5), 그리고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는(#6) 표적 등 전부 7개나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많은 표적들이 있을 수 있는데, 하필이면 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표적을 첫 번째로 주님은 선택했을까요? 표적은 의도를 가지고 일으킨 기적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첫 표적은 정말 중요한 뭔가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찾아가는 여정을 떠나 볼까 합니다. 우선 요2: 1절을 보면 가나에 혼인잔치가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혼인잔치가 진행되는 중 손님 접대용 포도주가 떨어지는 불상사가 3절에서 일어납니다. 수치가 될 정도로 대단한 일이 발생한 것이지요. 아마도 원인은 7일이나 진행되는 긴 잔치 때문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것을 본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자4절에서 주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대답합니다. 여기서 어머니를  ‘여자여’(구나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어머니(메테르)이긴 하지만 자신이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일에는 어머니라는 자격으로서 관여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어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때’라는 말은 주님이 세상에 왜 왔는지/메시야임을 보여주는 첫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런 중요한 사건에 마리아의 요구를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에 온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다소 냉정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을 그르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사실을 확실히 마리아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그르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차단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요한은 여기서 주님이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분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절을 보면, 마리아 역시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는듯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행하라 하니”라는 표현입니다. 아니 지금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기 싸움’ 합니까? 동네 사람들 앞에서 체면 죽이는 아들이 미웠을까요?

 

아들 제자들 앞에서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여자여’ 라고 불러서 화가 나서 고집을 피우는 것일까요? 궁금하긴 하지만 마리아는 그런 의도로 한 것은 분명 아닌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리아는 그 날 예수를 아들이 아닌 메시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마리아는 잉태할 때부터 예수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방문과 마리아가 낳게 될 아들의 이름을 준 것, 목동들의 방문 그리고 성전에서 사람들의 축복 등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어린 시절 기록들을 많이 남긴 사람이 누가입니다. 2:43절을 보면, 12살에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를 잃어버립니다. 그때 예수님은 성전에 앉아 랍비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묻고 있었습니다. 

 

마침 부모가 예수를 찾아, ‘근심하여 찾았다’고 말합니다. 2:49절에 의하면 주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눅2:50절을 보면, ‘부모들은 그가 한 말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인 눅2:51절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는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마리아였기에 다른 어떤 사람보다 혼인잔치에서 아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하는 말에 유독 관심이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즉각 그의 말에서 예수님이 반드시 오늘 뭔가를 나타낼 것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1)마리아가 느낀 첫째 단서는 바로 ‘여자여’라고 자신을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르게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로 하여금 어쩌면 그 집 하인들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하게 시켰던 근거가 되었을 것입니다. 2)두 번째는 이어지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아들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마리아에게는 오늘은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날임을 확신하게 되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아들이 12살 때 했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날은 예수님이 더 이상 자신의 배에서 나온 아들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야 되는 날인지도 모릅니다. 

 

마리아의 재치 때문에 이루어진 판단도 아닙니다. 막연한 추측도 아닙니다. 마음에 담아 두었던 모든 말씀이 믿음으로 싹이 난 것입니다. 그녀가 처녀일 때 방문한 천사가 눅 1: 31-32절에서,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또 눅 1:35절을 보면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그 이후 예수님이 태어나자 주위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들에게도 말씀을 전합니다.

 

2: 11절에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 말은 들은 목자들은 눅 2:17절을 보면 급히 달려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천사가 일러준 말을 전해줍니다. 듣는 자들이 다 놀랍게 여깁니다. 하지만 눅 2:19절에서도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지금까지 두 번이나 보여주는 태도는 모든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고, 마음에 두어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한 말은 마리아의 믿음에 찬 선포인 것입니다. 마리아의 믿음은 분명 들음에서 나왔으며, 그녀가 전부터 천사로부터 듣거나, 사람들이 일러준 것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마리아에게서 발견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는 우선 내 속에 불쏘시개가 될 하나님의 말씀이 쌓여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을 멈추지 말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을 빠지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다 어느 날 불씨가 되는 말씀이 내게 떨어지면 믿음의 선포가 내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불씨는 나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입니다. 마리아처럼 자신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그때 힘들어도 수용하고 활용하기 바랍니다. 마리아가 만약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주님의 냉소적인 대답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거나, 아들에게 시비나 걸었다면, 물이 포도주로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둘째, 마리아는 우리에게 좋은 훈련을 배우게 합니다. 그녀가 자신에게 들려지는 모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마음에 두어 생각하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성경암송입니다. 우리 교회 표어는 ‘말씀이 흥왕하는 해’로 정하고 달려 가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교회는 성경일독 읽기가 두 팀이 진행 중입니다.

 

10장씩 읽는 팀은 5월에 일독을 마칩니다. 잠시 쉬었다 8월에 시작할 때 더 많은 분들이 조인해서 일년에 꼭 일독하기를 바랍니다. 그 전에 6, 7월 두 달 동안 성경암송 팀을 만들려고 합니다. 읽는 것만으로는 말씀을 마음에 보관하기에 불충분합니다. 암송이 있어야 합니다. 다들 바쁘겠지만 도전하실 줄 믿습니다.   

 

그녀 속에 새겨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에 불씨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때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반드시 나타낼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 믿음은 선포가 되어 입술에서 나옵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우리도 마찬가지로, 내 속에 새겨진 약속의 말씀들이 나의 입술을 통해 선포 될 줄로 믿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치유자이십니다.’ 이 믿음이 내 속에 자리잡고 있는지요? 자녀를 향해 가족에게 치유를 선포하십시오. 나의 정신적 연약함에 회복을 달라고 외치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풍성하십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기어 있습니까? 가난함을 느낄 때 풍성함을 달라고 요구하십시오. 넉넉히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셋째, 암송하는 훈련에 이어 말씀을 생각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고 난 뒤부터 사람으로부터 천사로부터 들어왔던 말은 ‘당신의 아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늘 내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임을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 훈련을 통해 어느 날 아들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을 드러낼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마리아에게 ‘어머니’라는 말 대신 ‘여자여’라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그녀는 직감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들이 드디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싸인이구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런 밀을 하는 것은 분명 나와 육신의 아들 사이에 뭔가의 선을 긋는구나. 귀여운 아들이 아니라 이제는 장성하여 세상에 구원자로 서게 되는구나. 12살 때 성전에서 아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늘 마음에 새기고 의미를 생각하는 훈련을 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의 눈이 열려 주를 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눈이 열리면 다음으로는 우리는 담대해집니다.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담대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됩니다. 마리아를 보기 바랍니다. 마리아 역시 이 잔칫집에 가 있지만 주인과 어떤 관계인지 잘 모릅니다. 많은 분들이 친척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남의 집 하인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하인들도 지금 엄청나게 지쳐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잔치를 하면 여분의 음식들을 준비합니다. 그런데도 이 집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예상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자연스럽게 하인들도 손님들 대접한다고 다들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필요도 없는 물을 왜 채웁니까? 그것도 6개의 엄청난 양의 항아리를 채우는 것은 아무리 하인들이지만 힘들고 하기 싫은 일입니다. 하인들도 마리아의 말에 자연스럽게 거절을 할 수 있는 다른 이유도 충분합니다.

 

정결예식은 이미 손님들이 집에 들어올 때 손을 씻는 것입니다. 이미 잔치 집에 온 사람들은 다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물이 아니라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이런 모든 사정들을 뒤로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담대하게 말합니다. 종들도 순종합니다. 결국 믿음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이루어 나가게 만드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결국 나 자신에게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생각에 머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동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게 불씨를 던집니다. 내 속에 말씀을 쌓아두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 주의 말씀이 도전으로 다가올 때, 믿음의 선포와 함께, 용기를 내어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