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7): 나를 인격적으로 만나 주십니다
요 1:43-51
사순절에 우리 교회는 요한복음에 푹 빠져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우리 개인의 고백을 주님께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성경 인물들이 만난 주님을 만났고, 그들이 들려주는
고백들과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를 인격적으로 삶의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풍성한 고백들이 우리의
삶의 순간마다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고백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술을 통해
나온 믿음의 고백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주님은 다섯 명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안드레, 요한, 베드로 그리고 빌립과 나다나엘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빌립과 나다나엘은 다소 우리에게 생소한 제자들입니다. 43절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로 나가려 하다가
빌립을 만나 그를 제자로 부릅니다.
빌립은 45 상반절을 보면 즉시 나다나엘(‘하나님의
선물’)을 찾아갑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44절에 의하면,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 벳새다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사복음서에서 딱 한번 더 언급되는 요 21:2에 의하면 가나 출신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가나, 빌립은 벳새다로 같은 동네 사람도 아닙니다. 서로 연결고리를 찾기 어려운데도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 외에 뭔가 다른 것이 그들을 묶어주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 답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45 중반절을
보면,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라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가지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두 사람은 나이, 친구, 인척 관계를 떠나 메시야를 기다리던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열정적인 메시야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는 간단합니다. 모세가 신 18:15절에 기록한 말씀과 여러 다른 선지자들이 메시야에
대해 예언한 말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신앙관으로
보아도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이유 또한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어지는 대화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빌립은 자신이 본 메시야를 좀더 구체적으로 45절 하반절에서,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요셉의 아들’과 ‘예수’라는 세상 사람들의
흔한 이름은 별로 나다나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그의 귀에 들어왔고 거슬렸습니다. 46절을 보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매우 냉소적이고 조롱하는 듯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미가 5:2절에서는 메시야가
나실 곳이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을 잘 알고 있던 나다나엘로서는 메시야가 나사렛 출신으로 소개하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2) 이유는, 나사렛이란 동네가 주는 나쁜 인식 때문입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근처의
조그마한 촌에 불과합니다. 같은 유대인들이라도 갈릴리 사람에 대한 인식은 교양이 부족하고, 사투리가 심하고, 이방인들과 교역하는 것으로 인해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은 더 작은 시골 촌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나사렛은 갈릴리 북방을 담당하던 로마부대가 주둔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사렛 사람들을 보고 원수인 ‘로마인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고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배경으로 메사야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빌립의 말에 어이없다는
말투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복음서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나사렛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이런 전체적인 상황을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 의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각자 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이런 오해들을 막아
주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한 사실(fact)조차 알지 못함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지금도 비슷한 이유 때문에 예수를 못 믿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라면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예수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아야 하겠지요. 자신이 목 믿는 이유들에
대해 반대되는 진실을 찾는데 투자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잘 알고 예수가 거짓이라면, ‘믿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태도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진리에 대항해서 싸우면서 책 몇 권
읽고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자신의 생각만으로 ‘성경은
틀렸다’거나 ‘예수는 거짓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 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적어도 지성인이라면, 성경은 한번 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양심적이라면 예수에 대해 배우는 시간은 투자하고 결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평생
예수를 따르고 연구한 분들은 모자라는 분들이 아닙니다. 평생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던 지성인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일은 전부 거짓이고 가식일까요?
<나니아 연대기>저자로 알려진 C. S. Leuis 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의 책을 좋아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지만 무신론자가 됩니다. 나중
하나님을 믿고 교회도 나가는 단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수를 영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믿는다’는 것은 단계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무신론자,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믿고
교회도 심지어 다니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진정으로 나의 구주로, 내 인생의 온전한 주님으로 영접하는, 성령의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교회에 다닌다는 것과 구원은 별개의 것입니다.
루이스는 눈 사람이 점점 녹듯이 오랜 시간을 두고 회심이 일어납니다. 혹시 주변에도 하나님은
좋아하지만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의 책 중에 꼭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란 책을
한 번 권유해 드립니다. ‘기독교의 핵심을 명료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책’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루이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예수를 자신의 말로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꼭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읽기를 원하시면 2주 뒤에 도착하면 5명에게 그냥 드리겠습니다. 단 한가지 조건은 본인도 읽어도 되지만, 가족이나 친구에게 선물로
하실 분을 우선으로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책도 읽어도 막무가내로 안 믿는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그분들은 나름대로
이유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해박한 메시야에 관한 지식 때문에 예수를 거부해도, 빌립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를 지식으로 상대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권유합니다.
친구가 친구에게 강권하는 느낌입니다. 논리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그 자리까지 한번 ‘가 보자’라는 강한 제안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분들 중에는 모태신앙에서 교회를 다니다 신앙생활을 멈춘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좀처럼 다시 믿음생활 하기가 힘이 듭니다.
이미 교회와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실망할 것 다했습니다. 게다가 교회에더 이상 관심도 재미도 없어 떠난 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분들은 예배의 자리보다는 좀더 편한 모임에 오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오면 자신이
믿지 않는 이유들과 자신만의 논리를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게 어느 정도 허락해 주어야 합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그냥 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그분들 속에서 뭔가 비워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성령이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빈
자리를 물밀듯 밀고 들어가며 조금씩 그 빈자리를 말씀으로 채우게 되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성령이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
47절을 보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다나엘을 직접 다루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그를 가리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그의 속 사람을 볼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 46절에서 나다나엘이 자신에 대해 거의 조롱에
가까운 말도 한 것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너 조금 전에 나보고 나사렛 출신이라고 조롱했지’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혀 다르게 접근합니다. 오히려 칭찬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그가 전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주님은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를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2)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외적인 행위들을 가지고
자신들을 치장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본래 자기 모습을 속이는 간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너무 자신을 잘 아는 예수님께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누가
자기를 그렇게 소개했는지 알고 싶어했겠지요.
48절을 보면, 주님은 이미 그를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해줍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 아래서 율법 책을 보고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경건한 삶과 그 속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칭찬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이런 엄청난 분을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마음을 scan하고 있는 예수님에게 완전히 압도를 당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은
왕 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는 압도적인 힘에 내 영혼이 탈탈 털려
버리는 것입니다. 변명도 자랑도 아무것도 그분 앞에서 생각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더 가까이 오면 올수록 내 죄가 드러나 보이고, 죄인이라는 사실이 확연해
질 뿐입니다. 과거의 거짓되고 속이고 미워하던 나의 모든 잘못들이 생각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의 악한 행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입술에서
‘주님 내가 죄인입니다’를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칭찬을 들은 나다나엘은 순간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나의 좋은 면을 다 보신다면, 나의 허물과 죄 된 모습도 보셨을 것’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경건한 자신을 칭찬까지 하며 품어주는 주님 앞에 눈 녹듯 녹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향하신 주님의 한 없는 사랑에 완전히 압도 당합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괜찮게 세상에서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양심적으로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며, 남들 도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서 보니 정말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아가 붕괴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을 떠나 산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시인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인간적인’ 나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자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 주홍빛 같은 내
죄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죄를 감출 수가 없어 ‘아 재앙입니다. 나는 이제 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말하는 입술마저 부정합니다. 나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의(사 6:5) 모습입니다.
나를 바라보며 주님은 나무라지도 않고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만남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심지어 포근히 안아주십니다. ‘산다고 힘들었지. 너 세상에서 경쟁하느라 거짓말 많이 했지. 남들 속인 것 다 알고
있어. 네 입으로 회개하는 모든 것 다 용서할께. 이제부터는
내 안에 거하며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되.’
죽어야 할 나를 용서하시며 살리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이런 것들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신약에서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입니다. 만약 구약의 율법시대라면 그녀는 죽었겠지요. 그리고 주님이 없었다면
간음하다 잡힌 현장범은 돌에 맞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떠나 후에 그녀는 홀로 일대일로 만납니다. 요8:11절을 보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용서와 당부의 말을 듣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 경험해 보셨는지요? 그녀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삶의 자리까지도 이해해 주셨습니다.
이런 완전한 용서가 인격적인 만남에서 일어나기에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이런 주님을 만난 기억이 없고 아름다운 고백을 드리지 못했다면 아직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49절에서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나다나엘의 고백은 당시 이스라엘을 회복할 왕적 권위를 지닌 메시야를 기대하던 사람들 속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관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만의 왕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들의 힘든 정치적 상황을 해방시켜 주는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메시야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50절 하반절에서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말씀합니다. 나다나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51절에 ‘진실로 진실로’ 라는 반복적인 표현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입니다(25번, 일회적 표현은 공관복음에서 50번).
주님이 말하는 것이 진실임을 강조해 줍니다. 그들의 이해를 넘어 진정 메시야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로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 관계가 완전히 회복됨을 뜻합니다.
야곱을 연상시킵니다. 야곱의 사다리는 이제 예수그리스도가 됩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고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 되는 예수님의 보혈로 이제부터는 죄인이 의인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빌립처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길을 찾지 못한 분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은혜가 넘쳐나는 사순절에,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 나의 구원주 되는 예수, 나의 주인 되는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자리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와 보라’는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분명 있을 줄 믿습니다. ‘저 사람은 평소에 늘 교회에 냉소적이었기에 안될 거야’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기회를 놓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을 청하여 데려 오기만 하면, 주님이 친히 위로할 것입니다. 화난 것을 달래 주실 것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인격적인 주님과의 만남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복된 사순절에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모르고 있는 분들과, 체험해 보지 못한 분들에게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