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6): 사람들을 부르시고 따르게 만듭니다 

1:35-42

 


사순절에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세례 요한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났고 사역도 먼저 시작합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마4:18-22; 1:16-20; 5:1-11을 보면 제자들을 불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에는, 예수님은 제자들을 갈리리 호수에서 어부였던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4명의 첫 제자를 부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앞의 공관복음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잘못된 기록이 아닙니다. 시간차이를 두고 일어나는 일을 더 상세하게 말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먼저 35-42절에서 안드레와 요한과 시몬이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43-52절에서 빌립과 나다나넬이 제자가 되는 모습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줍니다. 1)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세례 요한의 사역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2)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세례 요한은 오실 메시야를 준비하는 자로 자기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 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만나 부르는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 실제로 주님을 따르는일이 일어난 것으로 이해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35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어느 날 자신의 두 제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40절에는 그 중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아마도 이름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요한으로 보여집니다. 이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거니는 모습을 관심을 갖고 보고 있음을 36절은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담당할 구원자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그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의 두 제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을 37절에서 보여줍니다. 이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을 요한복음은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따른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어도 끝까지 누군가를 추종한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에는 정말 야속하게도 스승인 세례 요한을 버리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물론 세례 요한의 설득과 허락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을 따르도록 도와 주는 역할도 충실한 사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곧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기 바랍니다. 비록 주님이 거처하는 곳에서(39) 짧은 만남이었지만, 주님을 따르는 결단을 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그물과( 4:20) 배도 버리고 심지어 가족도 떠나게 됩니다( 4:22). 자신들의 전부를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흔히 말하는 청춘도 꿈도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시간, 물질, 재능, 때로는 생명까지 요구하십니다. 16: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나는 정말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주를 따른다는 분들은 두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질문) 내가 견디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가? 있다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고난이 숙명이 아닌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고, 하나님은 늘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2질문)나의 봉사와 헌신, 물질과 섬김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없으신지요? 안 들면 주님이 요구하는 대로 나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의 십자가를 진 사람들은 비용을 계산부터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끝까지 지고 갈 수 있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십자가를 아직 지지 않은 사람은 이 무게가 얼마나 되나요? 얼마나 길게 메고 가야 하나요?

 

어떻게 메면 아프지 않나요? 중간에 물 마시면서 잠깐 쉴 곳은 있는지요? 이런 질문들로 바쁠 것입니다. 그리고 다들 처음에는 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막 시작하면 재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삶은 그전 삶과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지요. 나 중심에서 남을 위한 삶을 사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 예수 믿고 정말 변했다고 날마다 칭찬하지요. ‘잘 한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격려하지요. 찾아와서 도울 것 없냐고 관심 가져 주지요. 신이 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것 계속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주님은 부담으로 확 다가 옵니다. 그리고 점점 내 삶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초창기 많은 제자들의 모습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주님 곁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요6:66절을 보면, 어느 날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주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나의 요구에 응답해 주지 않는 주님 때문입니다. 한 번 두 번 거절을 당하다 보면 마음이 상합니다. 

 

6:26절에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위해 너희들의 요구만 들어주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지 않기로 했어. 내가 주도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시각을 바꾸어서 주님을 따르게 만들 것이라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를 따르는 이유가 분명한지요? 주님이 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 해도 여러분은 견뎌 낼 수 있으신지요? 고난의 자리에 함께 계속 가자고 하시면 갈 수 있는지요? 계속해서 주님은 양보 없이 줄기차게 요구만 하십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당시 제자들 역시 그런 요구를 주님께로 받았습니다.

 

너 나에게 더 시간 내어줄 수 있니? 이방인의 땅으로 가는데 같이 갈래?’ 심지어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사마리아 땅에 그들과 함께 가시려 합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는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주를 따라야 합니까? 본문을 보면 세례 요한은 자신의 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까지 삶의 방향을 수정하여 예수를 통해 무엇인가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갖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따르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의미로 대체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43절을 보면 주님이 빌립을 제자로 부르실 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따르게 된 사람들입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목적이 주님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긴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주님이 원하는 것으로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따르던 반드시 따르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38절을 보면, “무엇을 구하느냐?” 이 말씀 속에는 1)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소원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2) 그들이 찾는 것을 주님은 무엇이든지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만족함을 얻게 됩니다. 주님은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눈 먼 자들에게 보게 하셨습니다. 아픈 자들을 낫게 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바램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고 응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따르는 자들에게 응답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 기도의 응답을 바랄 때 그럴 수 있습니다. 또 따르는 자들이 세상사람들과 동일하게 육신과 안목의 정욕을 구하거나, 이생의 자랑을 위해 구한다면 주님은, ‘진정 너희들이 구할 것이 아니다라고 단호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뜻 가운데서 안 들어 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분명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 없으신지요?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리 따져보아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주시면 주님께 영광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가 넘쳐 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야속하게 안 주십니다. 이럴 때 주를 따르는 사람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물론 호흡이 다하는 순간까지 구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실 때까지는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나에게 그런 것이 없을지라도, 또 주님이 주지 않을지라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라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10:10 하반절의 생명과 풍성한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진정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진정 따르는 우리를 위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것 주시든 안 주시든 상관없이 생명과 풍성한 삶이 주를 따르는 목적이 되야 합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배고파도 좋고 집이 없어 추위에 떨어도 좋습니까? 이것은 좋고 안 좋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형편이 오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마6:25절에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공중의 새들처럼 들의 백합화처럼 만족해 하는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주 안에서 누리는 풍성함입니다.

 

없어도 이미 공급해 주신 것이 있기에 살 수 있습니다. 안 주셔도 지금 가진 것으로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풍성한 삶인 것입니다. 풍성한 삶이란 많이 가지느냐 적게 가지느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 만으로 기뻐하는 삶입니다. 주님만 내 속에 있으면 그분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시고 다스리고 가지는 분이기에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성도는 내가 지금 무엇을 구하며 예수를 따르고 있는가를 늘 분명히 해야 합니다. 떡을 구하고 배부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영생 이야기를 할 때 많은 따르는 사람들이 떠났다고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더 질문을 던집니다. 6:67절에 너희도 가려느냐?”

 

이때 베드로가 요6: 68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동일한 이 고백이 우리 성도님들에게도 있을 줄 믿습니다. 이 믿음의 기반이 없이는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영생이 없이는 아무리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마지막 날에 다 타버릴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러 갈 때 하나도 가지고 갈 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주님을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3) 방법은 내가 이 땅에서 지금 누리는 풍성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풍성함은 물질이 명예가 인기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그런 것을 엄청나게 가졌다 해도 부럽지 않고, 기죽지 않고, 비굴하게 고개 숙이지 않고, 그들보다 더 많이 누리는 주 안에서의 생명과 풍성함을 자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나에게 채우시는 주님의 평강을 노래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수고해서 번 돈으로 좋은 것 먹고, 사고, 입고, 가보고 싶은 곳 방문 하십시오. 그래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세상이 누리는 복도 받는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것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만으로 내 생각의 허무와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 맨해튼 사이즈의 땅을 가지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빌딩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사는 당신이 부럽지 않네요. 내게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당신 보다 가진 것은 적고, 돈도 명예와 인기도 없을 지라도 나는 주님 주시는 은혜로만 만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고백을 듣기 원하시기에 우리를 따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부터 남은 시간은 주님도 우리에게 질문 하시지만 우리도 반드시질문 해야 할 것을 마지막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38절 하반절을 보면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질문을 주님께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당시 제자가 되기 원하는 사람들이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요청하기 위하여 흔히 사용하던 관용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두 제자는 주님과 더 시간을 보내기 원해 주님이 사는 거처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긴 교제를 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랍비(선생님) 수준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런 태도는 나중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고백을 하는 사람들로 변화 시켰습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님과 만나는 충분한 교제가 필요합니다.  

 

요즘처럼 바쁘고, 시간이 돈인 세상에 주님과 더 가까이 하려는 이런 신앙생활이 나에게 있는지요? 가볍게 신앙생활하고 부담 없이 교회 다니기 원합니다. 상처받기 싫어 깊숙이 교회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이 시대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입니다. 주님과 정말 친밀한 만남을 가지려는 마음이 있는지를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제자들에게 들린 소리는 39절의 와서 보라는 주님으로부터의 초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지금 따라오면 장차 너희들이 찾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들리는 풍문으로만 예수를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직접 와서 묻고 보고 눈으로 확인하고 같이 생활하면서 알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도마처럼 주님을 보고도 의심이 생기면 만져서라도 진리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어떤 것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 높은 곳에 앉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이나 교회는 지속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 행사에 부르고 초청하는 일을 지속하는 이유입니다. 성도 늘려 자랑하기 위한 목적 아닙니다.

 

성도는 안 믿는 분들을 목장이나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NYBC 음악회 행사에 외부인들을 초대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추진하고 행하는 무슨 일이든지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믿지 않는 분들이 와서 우리 속에 거하는, 믿음의 공동체 속에 함께하는 주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자랑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보였다면 그렇게 보이게 한 교회는 회개하고 앞으로 좀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겠지요. 그래서 더 이상 주님의 몸된 교회를 그런 눈으로 보는 시각들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나는 교회의 이런 노력들을 주님은 분명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풍성한 역사가 일어나도록 성령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일년이 넘게 팬데믹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이 사람을 만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앞으로 백신이 보급되고 팬데믹이 물러가면 분명 만나는 기회들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때 주를 따르기로 준비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내 집을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고, 복음이 들려지게 할 것이라는 결단을 미리 지금 해두는 성도님들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 기억할 수 없을 지라도 주를 따르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왜 내가 따라야 하고, 나는 지금 바르게 따르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가족이 둘러 앉아 한번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묵상하기를 바라고, 앞으로 다가오는 부활절을 준비하며 나아가기 바랍니다.

 

주를 따르는 삶은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희생의 삶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이유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이 주기를 원하는 생명과 풍성한 삶을 위해 따라갈 줄 믿습니다. 나에게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주님이 항상 옳은 분이라는 믿음으로 주님과 교제를 나누며, 내게 주시는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