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5): 그리스도이십니다 

1:19-20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을 시리즈로 나누고 있습니다. 요한은 1:1-18절까지 예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인간의 몸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참 빛이라는 요한 자신의 고백을 들려 주었습니다. 이어서 요한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의 고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1:19-34절은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고백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1:35-42절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두 제자가 본 예수님에 대해 서, 이어서1:43-51절까지는 갈리리에서 만나 빌립과 나다나엘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 부분 중에서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고백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나고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됩니다. 1:6절에서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전합니다. 그의 특이한 외모와 광야에서의 삶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가 나타난 시기도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였습니다. ‘암흑기’로 알려진 이 시기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고 선지자들도 오지 않았던 시간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로마가 정치적으로 지배하며, 백성들에게 과하게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삶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례 요한의 출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습니다. 1:19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그에게 보냅니다. 1:24절은 바리새인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에 대한 재판권을 가진 공회가 사람들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혜성처럼 나타난 세례 요한의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겠지요.

 

이들은 세례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라고 묻습니다. 1:20절을 보면 요한은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은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실히 전합니다. 그의 답변 속에는 자기 자신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야’ 즉 ‘구원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요1:25절을 보면 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례를 메시야와 연관 지어 오랫동안 믿어오고 있었습니다. 

 

36:25의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라는 말씀과 슥 13:1에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는 구약의 두 말씀이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다윗 계열에서 나타날 메시야와 세례를 연결시켜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하면서 메시야가 해야 할 일인 세례를 베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세례를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세례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가 아님을 두 가지 증거를 제시합니다. 1) 1:23절에서, 이사야 말처럼 뒤에 오실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온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2) 1:26절을 보면 자신이 베푸는 물 세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요1:33 하반절은, 뒤에 그리스도로 오실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임을 말합니다.

 

자신은 뒤에 오시는 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요1:27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1:26 하반절에서는 ‘그분은 이 땅에 와서 이미 그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또한, 1:32-33절에서는 세례 요한 자신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신하게 된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가 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줄 때,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성령의 강림과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야에 대한 확인을 통해서 얻게 된 확신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요1:26절 하반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 날 우리가 영적 무지 가운데 있을 때 예수를 무시하며 살았던 모습입니다. 우리교회에 이런 분이 한 분도 없는 것이 저의 평생 목회 목표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늘 기도 가운데 빠뜨리지 말아야 할 기도 제목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이곳에 와서 만나는 분들은 그냥 살면서 만나는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분들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이 있다면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며 불쌍히 여기며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사순절에 꼭 기도하기 바랍니다.

 

예수가 왜 필요합니까? 솔직히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아이들 건강하게 자라고, 공부 잘하고, 아빠 엄마는 자녀들이 좋은 학교 가는 것 후원해 줄 것입니다. 졸업하면 서로 잘 어울리는 사람 만나 아이 놓고 잘 살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필요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나 합니까?

 

아직도 여전히 세상에는 주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엉뚱한 종교적 열심에 빠져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라는 어둠에 가리워져 있습니다. 미혹되어 맹목적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을 ‘메시야’로 믿고 추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세상에만 이런 분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여전히 주님과 무관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좀더 바르게 사는 사람들 같아 보이고, 마음의 평안을 줄 것 같아 교회에 다니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와 무관하게 사는 분들을 향해, 1:33절에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라고 두 번째의 고백을 합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하면 거듭나지 않은 신앙입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찬양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친교도 모든 활동은 하지만 예수와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 ‘어, 나는 목사님으로부터 물세례 밖에 받지 못했는데?’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 세례는 우리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깨달음과 동시에 회개를 촉구합니다. 성령 세례는 죄인된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생명으로 거듭나는 중생을 말합니다.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물세례는 성령세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눈에 보이는 예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또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분들에게는 각종 방언이나 삶의 급작스런 변화가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성령세례는 물세례를 받고 성도로 살아가면서 삶에서 나타납니다. 나의 과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주 안에서 변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방언 같은 눈에 보이는 것은 없어도, 언어의 변화가 있습니다. 비교와 비판, 남의 말과 행동을 평가하던 사람이 격려와 사랑의 언어를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늘 불안과 초조함으로 살던 분들이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와 같은 기쁨과 소망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눈물이 없던 사람이 십자가, 예수라는 말만 들어도 구원의 감격에 젖어 예배 내내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물질이 생기면 놀고 먹고 즐기는데 사용했지만 구제와 봉사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는 성령세례를 다 받았습니다. 그 증거가 또 신앙생활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나의 과거의 모습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사람과 별 차이가 안 보입니다. 이때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구원 받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물론 구원은 주님의 주권적인 영역임을 전제하고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저 사람은 구원 ‘받았다’ 또는 ‘안 받았다’를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판단하기보다 본인 자신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도가 믿음생활에서 간혹 조금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도 다시 말씀이 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에서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입술에서 내 죄의 고백이 흘러 나옵니다. 회개가 내 심령 가운데 일어납니다. 이런 분들을 어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1)그러므로 회개가 있는 삶은 하나님이 ‘너는 내 것이라’이라는 표시입니다. 구원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다시 회개하며 수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이 다시 사탄에게 돌려 보내지 않습니다. 만약 구원 받은 성도가 타락한다면 구원을 누가 믿겠습니까?

 

누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찌 하나님을 사탄보다 강하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늘 내가 구원 받았는지 몰라 두려워할 것입니다. ‘혹시 말세에는 이단들이 미혹해서 끌고 가면 어떡하지?’ 라는 마음의 경각심을 갖는 것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좋은 자세이긴 합니다.

 

늘 성도는 내 신앙을 확인하고 굳게 서기 위한 태도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거듭난 사람은 믿음을 부인할 수 없고, 믿음의 삶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내 의지 때문이 아닙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 받았는지 확인하는 2)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감동과 소망이 채워지고, 힘든 일도 이겨 나가고 피하게 해 주는 것 은혜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은혜는 내가 하나님께 받는 징계입니다. 이것은 내가 구원 받은 자녀임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 문으로 가게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흥청거리며 세상과 짝하며 허송세월 보내게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가만히 두는 부모가 있나요?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히12:6 8절을 보기 바랍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 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끝까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잠시 힘든 상황 가운데 두어서라도 죄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징계가 있다는 것만큼 확실히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구원받은 백성임을 알게 해 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교회도 잘 다니고, 직분도 받고, 신앙 생활 하던 분이 이단에 빠지고, 믿음을 부인하고 예수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사실 혼돈스럽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구원의 확신에 대해 말씀 드렸지만, 그분들은 애당초 처음부터 거듭나지 않은 분들이 어느 순간에 사실로 드러난 것 뿐입니다.

 

이런 일을 피하는 길은 요1:29절처럼 세례 요한의 세 번째 고백이 믿는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믿음입니다. 나의 구원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담당한 죄는 유대인들만이 지은 죄가 아닌 ‘세상 죄’라고 합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포함됩니다.   

 

예수 보혈의 피로 죄 용서함 받는다는 확실한 고백이 없이는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부활절을 맞아 몇 명 자녀들이 입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왜 나에게 필요하며,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복음을 부모님들이 직접 들려주기 바랍니다. 듣고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갖는 자녀들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이사야 53:7절에서 말하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해 고난 받는 어린 양’을 의미합니다. 또한 출애굽 당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난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죄악에 헤매는 죄인들을 사망에서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가 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인간이 죄를 지으면 제단에 드리던 많은 양의 피도 인간의 죄를 완전히 씻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요1:34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마지막 고백을 필요로 합니다. 동일한 고백은 마 16: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에게서 듣게 됩니다.

 

심지어 귀신들도 동의하는 모습을 막3:11에서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기록합니다. 의심 많던 도마도( 20:28), 십자가 형을 집행했던 백부장도( 27:54) 동일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우리의 구원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자는 하나님 아들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 아들만이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까? 구약에서 인간의 죄를 위해 드려진 양들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을 위해서 죄가 없는 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죄 없는 희생제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그 요건을 충족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이시기에 유일하게 죄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번제단에 올려지는 흠 없는 어린양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분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아들만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흘리신 보혈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태초부터 함께 있던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죄로 죽은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올라 희생 양이 되셨습니다. 

 

우리들을 사망 가운데서 구하기 위해 행하신 일들입니다.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 구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해 주십니다. 성령을 통해 거듭나는 역사는 조금 고장 난 것을 다시 고치는 수리가 아닙니다. 완전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은 이 네 가지 고백을하게 됩니다.  나에게 예수는 진정 그리스도, 구원자가 되십니다. 주 안에서 나를 거듭날 수 있게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는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까지 흘려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오직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에 이 고백들이 우리 입술 가운데 넘쳐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