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4): 사람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1:14-18

 


사순절 기간 동안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고 있습니다. 요한은 정말로 소중한 고백들을 우리들에게 들려줍니다. 1:1절은 말씀이 태초에 계셨고 이 말씀은 하나님이라는 선포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번 1: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구절에 하나님을 넣어보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실제로 육체로 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심지어 십자가의 죽음도 하나의 가상적인 일이라고 주장하는 당시 이단들의(Docetism) 주장을 배격해 버립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참 인간됨에 대해 여러 곳에서 보여줍니다. 4:6-7절에 피곤과 갈증을 느끼시는 예수님, 11:35에는 나사로의 죽음에 슬픔을 못 이겨 눈물 흘리는 예수님의 모습 등입니다. 1:17절 하반절을 보면,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놀라운 것을 하나 발견합니다. 드디어 요한복음에서 ‘예수’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합니다. 말씀(1:1), 생명(1:4), (1:5)이란 말로 성자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요한은 이제 구세주의 이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것은 역사의 한 가운데 인간으로 오신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을 부각시키는 요한의 의도입니다. 

 

여기서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그 이전의 하나님 되신 것이 중단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아닙니다. 온전히 100% 인간이 되셨으나 100%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삼위일체만큼이나 우리들에게 오묘한 진리이며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14절 상반절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첫 번째 이유가 소개 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장막에 산다, 텐트를 친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을 보면 애굽에서 탈출하여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살 때 성막에 임하시는 것을 연상시켜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에 이런 신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와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구요? 늘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던 인간들의 소망 때문입니다. 세상의 한 사람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여주시기 원했습니다.

 

물론 출33:11에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표현은 있지만, 모세 역시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출33:20절은 기록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비록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긴 했지만, 인간들이 늘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얼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병으로 고생한 사람들에게는 치유하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을 찾아가 주님은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아버지와의 삶인 천국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외친 말씀은 마4:17절을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고,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팬데믹을 지나면서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들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많이 있는데 아버지에게 말 못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의 걱정과 염려 고난과 슬픔 말 할 수 없는 고민을 들어주기를 원하십니다. 다가오는 예수님께 나아가시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영혼 곁에 함께 해 주십니다. 혼자라고 외로워하는 분이 계십니까? 일단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혼자 있다는 것이 틀린 말입니다. 물론 기숙사나 집에 들어가면 혼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의 사람들은 늘 주님과 함께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 팔려 갈 때도, 심지어 옥에 갈 때도 하나님이 함께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는 삶은 하나님께 이끌리는 삶입니다. 그것이 불이든 물이든 고난이든 시련이든 하나님이 인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어 이끄는 삶은 외롭지 않습니다. 주님이 늘 손을 붙잡고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사람들이 인도하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길입니다. 따라가기를 주저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것입니다. 매일 내 삶에 아침이 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내 손을 잡아 주시옵소서. 내 마음이 주님께로 향하기 원합니다. 나를 이끄시는 데로 신나게 하루 살게 하시고 주 뜻 이루어 내게 도와 주세요.” 주님과의 교제가 무엇입니까? 인생이 외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외로울 수가 없습니다. 외롭고 우울한 마음이 든다면 내 속에 계신 주님을 두드려 보기 바랍니다.

 

“주님 나와 좀 놀아 주세요. 나 너무 힘들어요. 연구도 안 풀리고 인턴오라는 소식도 잘 안 풀리고, job 소식도 없어요. 꽉 막혀 있어요.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요. 기분이 영 풀리지 않아요. 주님 내 마음을 내 스스로 조절하지 못하겠어요. 괜히 짜증이 나요. 아이들 소리에도 화가 폭발해요.

 

이런 문제들로 고민하는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 곁에 오셔서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나와 함께 하시며 내 고민을 들어 주기를 원하시고, 풀어주기를 바라는 주님께, 주저 없이 말을 걸어 보기 바랍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 나와 함께 하시지요. 나 좀 도와 주세요. 내 문제를 주님의 뜻 가운데 바라보게 해 주세요.

 

이 몇 마디가 여러분의 하루를 힘있게 해 줄 것입니다. 고민의 순간을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우울한 감정이 확 사라지고 소망으로 바뀌는 느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인공지능으로 대화를 많이들 합니다. 우리 주님과는 왜 그렇게 친밀하게 자주 아주 작은 것까지도 묻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주님을 나의 구주로 내 인생의 주님으로 영접하신 분들입니다. 우리의 주인이기도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섬기려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요15:15절에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주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제 나와 늘 함께 하시는 그분께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기를 원했던 궁극적인 두 번째의 이유는 14절 중반절을 보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던 곳이 어떤 곳입니까? 원래 우리가 영원히 거해야 하는 곳이 어디였습니까? 우리를 다시 영광이 가득한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 인간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본향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죄는 본향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임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사탄이 보여주는 거짓에 속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사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기억을 상실한 우리들에게 아름답고 영원한 삶이 있는 하나님 나라를 다시 소개해 준 것입니다.

 

죄로 인해 희미해진 기억을 살리는 것입니다. 어둠 때문에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빛으로 비추어 준 것입니다. 빛이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의로와 집니다. 죄 없게 되는 청결한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마5:8처럼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해 질 때 내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 되었던 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진정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예수는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는 단지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눈물 흘리고, 배고프면 먹고, 지치면 스러져 배에서 누워 자는 인간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만큼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면서 교만해져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고향을 찾아 갔을 때, 더 주님을 무시했습니다. ‘어릴 때 내가 아는 예수구나!’ 이 정도 수준으로만 주님을 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회개가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깨끗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눈에 가린 것이 사라지고 밝히 보는 순간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군요’를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나 작은 자일 뿐입니다. 

 

이 고백이 가능한 이유는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기억이 나는지요? 주님 만나고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나를 높이고 살았던 교만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기억나며 가슴을 치며 ‘내가 죄인입니다’ 를 외쳤던 그 시간을 늘 기억하기 바랍니다.

 

교만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우리들에게 회개를 허락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우리 앞에 오셨던 것입니다. 사순절은 나에게 찾아와 주셨던 주님. 그분 앞에 나의 악함과 추한 모습이 드러났던 그 시간을 기억하며, 다시 주님의 보혈로 덮어지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없이는 늘 우리는 교만함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피조물 됨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소리칩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외치고 다닐 것입니다. 이것이 죄이고 죄인 된 모습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이며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우리들에게 와 주셨기에 우리는 지금 변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더 큰 가치를 발견할 때 사소한 것을 내 손에서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붙잡고 세상 것을 내어 놓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요?  

 

여러분이 가진 것들이나 얻은 것들은 다 두고 갈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은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주님이 왜 강조를 안 했겠습니까? 밑줄 치며 외우게 했을 것입니다. 21:21절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는 그것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보석이 있고 길가에 늘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세상 것 다 포기하라’는 것 아닙니다. 주신 것에 감사하고, 무엇이 본질인가, 그리고 더 우선으로 추구하며 살아갈 방향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신 모든 것을 주님 영광을 위한 resource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지식 명예 물질 모든 것을 복음전파에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던 세 번째 이유는 바로 14절 하반절에서 보듯이 우리에게 은혜를 충만케 하기 위함 입니다. 세상에는 세상 운영 법칙이 있습니다. 경쟁하면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다 보면 패한 사람은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소외되어야 합니다. 묻혀야 합니다. 관심 밖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그저 주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주님은 성공하지 못하고 패배해서 세상의 것을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음지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들려집니다. 병든 자, 마음에 상처를 가진 자들을 찾아가 치유하셨습니다. 

 

소외된 자들 역시 사랑 받는 사람임을 깨닫고 소망을 얻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가 충만한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신 성육하신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과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가는 통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팬데믹으로 다들 어려워합니다. 성도님들도 힘드실 것입니다. 교회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형편에 있는 분들을 기억하고 도와야 합니다. 이런 삶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체험한 사람들의 나눔입니다.

 

감사하게도 선교지에 영어를 가르칠 교사들 5분을 구한다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벌써 3명의 자원자가 나왔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단기 선교는 갈 수 없지만 현지 학생들과 교류하며 친교를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선교지 선교사님들과 유티카 커렌교회를 위해서도 관심과 기도를 부탁 드립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신 마지막 이유를 14절 하반절을 다시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충만케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구원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진리가 충만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구원의 방법이 하나가 아니라 더 많아졌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충만해졌다’는 의미는 분명해졌다, ‘부족함이 없이 완성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십자가로 완전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전에는 불완전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르고, 그 의에 이르지 못할 때 동물의 피 제사를 통해 용서 받는 그런 시스템이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십자가 구원의 길이 확실히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희생제물을 찾지 못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희생은 ‘죄는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렸습니다. 완벽하게 인간이 죄 용서함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모든 죄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충만해졌다는 의미는 십자가 구원이 세상으로 입 소문이 나서 모두가 알게 되는 뜻도 의미합니다. 전도와 선교로 시골 오지와 문자가 없는 미종족에게도 복음이 알려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14절 말씀에서 선포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말씀에서 네 가지 사실을 마음에 담기를 바랍니다. 1)세상 끝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가운데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던 우리들에게 오셔서 친구가 되어 함께 거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2) 인간이 늘 보기를 원했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아닌 진짜 우리 집인 본향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나그네로 살게 되었습니다. 주신 것을 움켜쥐는 자가 아니라 손을 펴서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3)진리가 아닌 것을 추구하며 방황하는 인간들에게 진리를 듣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완전한 구원이 허락되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 길 만이 구원에 이름을 믿고 긴 방황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안식과 평안이 있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4)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해 주신다는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 용서함을 위해 하나님의 하나뿐인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죽어 주셨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더해지는 사순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