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2):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1:1-4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부활절 앞의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사순절이라 부릅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이유와 십자가의 죽음을 깊이 묵상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회개가 있는 경건한 삶을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사순절에 예수님을 묵상한다는 의미에서 요한복음의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선포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하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말과 하나님의 관계를 보면 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뗄 수 없는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태초에 계셨다면 말씀도 태초부터 존재하십니다. 또한 말과 하나님은 하나이기에 함께 계실 수 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말씀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 요한은 이제 예수님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주제로 이동을 합니다.

 

이 때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일에 관여했나요? 라는 이 질문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앞에서 예수님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심지어 하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고전 8:6절 하반절에도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라고 바울 사도 역시 동일하게 고백을 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습니다. 창세기의 창조과정을 보면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바로 이뤄지는 모습을 봅니다.

 

, 1:26절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에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창조사역에 관여 하셨기에, 피조물들을 존재하게 만든 분이시고 생명을 부여 한 분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피조물들이 태어나면서 생애나 일생이라고 하는 생명이 주어집니다.

 

또한, 더 근원적으로 모든 우주의 생명의 본질은 바로 예수님께로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부여하는 근원되는 생명입니다. 이것을 조에(zoe)’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는, 피조물이 창조 되면서 갖게 되는 생명입니다. 이것을 바이오스(baios)’라고 부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모든 과실은 허용하지만 단 한 가지 선악과 만은 먹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2:17절에서, 그것을 먹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선악과를 먹고도 호흡하고 아이를 낳고 생을 살아가는 생명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나중 하나님의 부르심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저주를 받고 에덴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심판과 영원한 사망이 인간에게 있게 됩니다.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인해 정녕 죽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생명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요1:4절에서 사용된 생명이라는 단어는 바이오스가 아니라 조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하여 영원히 잃어버린 이 생명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며 누가 다시 그것을 줄 수 있으며 어떻게 얻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오직 예수만이 참 생명을 가진 분이라는 것이 증명된 사건이 있습니다.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부활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제 성도님들에게 적용 질문을 한번 던져 보겠습니다. 왜 죽은 세상 사람들은 부활하지 못했을까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봄이 오면 싹이 나는 것은 씨앗이 생명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씨는 아무리 온도를 맞추고 물을 주고 심지어 밤에 불까지 켜주어도 싹이 나오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나오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칭 구원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르치는 구원은 거짓입니다.

 

그들 자신도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 그들 속에 생명이 없음을 보여 주었고, 앞으로도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전도가 열심으로 일어나는 것은 놀랍게도 이단들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미래가 될 젊은 세대들이 먹히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단들은 가장 먼저 믿는 자들과 만남을 갖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 옵니다


그리고 더욱 친밀한 방법으로 친분을 다지고 미혹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공부에 초대하여 자신들의 사람들로 만들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든 잘 모르는 단체나, 사람들이 주선하는 성경공부 모임이나, 교회에서 공식화 되어 있지 않는 것들은 반드시 목장지기나 목회자에게 알려 주고, 가서도 안 됩니다.  

 

하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성경공부가 이단에서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힌 순수한 성경공부라고 소개하고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 요즘 이단들이 많기에 성경공부를 잘해서 분별해야 한다고 까지 말합니다. 이 정도 되면 속기 쉬운 것이지요.

 

듣다 보면 두 가지를 느낍니다. 하나는 소름이 끼칩니다. 자신들의 정체까지 속이면서 사람들을 거짓으로 이끌려고 하는 악의 마지막 발악하는 모습입니다. 다음은 안타까움과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간 없다, 재미 없다고 하던 분들이 그런 것에는 미혹되는 안타까움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저들이 하는 열심만큼 전도하고 있는가? 라는 회개입니다. 예수 믿고 몇 분에게 복음을 소개해 본적이 있는지요? 그리고 영접기도까지 해 본적이 몇 사람이나 있습니까? 정말 지금 예수 믿는 우리들은 이 질문에 대해 철저히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팬데믹으로 인해 올해 단기선교가 갈 수 없습니다. 지금쯤 매주 모여 단기선교 훈련으로 한참 바쁠 때입니다. 비록 가지는 못하지만 마음과 기도와 그 분위기는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방법이 있기를 기도해 왔는데요. 과테말라 현지 학생들과 관계를 갖는 사역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줌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를 1시간 정도만 가르치는 시간을 가져 보려 합니다. 자원자가 ER, KM, 그리고 성도님들 가운데 5명 정도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한 달에 한 번 참가해도 되고 일대일로 할 수도 있습니다. 2년 동안 가지는 못하지만 그들과 계속 관계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선교지 학교에 인터넷이 있어 선교사님이 리더로 키워내는 학생들에게 좀 더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매년 가면서 코스로 운영해 오던 과정이 있습니다. 직접 선교지에 가지는 못하지만 성경을 읽어주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영어도 가르치는 생명을 살리는 선교가 계속해서 일어났으면 합니다.

 

이제부터 남은 시간은 어떻게 하면 죄로 인해 잃어버린 이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에 대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 전 어릴 적에는 누구의 영향인지 모르지만 막연히 착한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커서는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매일 다니는 길에 육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냥하고 있는 거지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내 능력을 알기 시작했을 때는 세상과 단절하고 죄를 짓지 않고 세상을 떠나 혼자 수행하며 사는 것이 최고다라고 생각도 바꾼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살아도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산 속의 훌륭한 수행자들을 보았습니다.

 

그것보고 나중에는 아예 영생이니 구원이니 하는 그런 것 생각 안하고 현재에만 집중하며 살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예수를 믿고 난 뒤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아프도록 병을 주신 적도 없습니다. 단지 저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도록 만든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을 인간의 종교적 본성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보니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의 고향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에서 태어나고 그곳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영원히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인간 속에 있다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로부터 만물이 창조되었고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바로 이것이 죄의 힘입니다. 죄는 우리의 고향과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에덴을 떠난 인간은 자꾸만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죄의 힘은 우리 인간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인간됨이 무엇인지에 관한 인간의 본질을(하나님의 형상) 잃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은 자신의 지혜로 스스로 해결책을 만듭니다. 도덕과 윤리, 철학과 종교들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은 자기만족입니다. 자기만족은 대안이지 정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원을 얻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한계에 부딪힐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태어날 때 생명을 가지듯,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시 창조해 주는 역사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야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다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친 것은 답을 찾지 못하는 인간에게 해결책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에 생명을 얻는 것을 미리 조금 맛을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입니다.  그 예를 요한은 3:14-15에서 민수기 21장에서 일어났던 광야의 불뱀 사건을 언급합니다. 광야에서 악한 말로 불평하다 불뱀으로 죽게 됩니다. 그러자 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 주어집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장대에 놋뱀을 달아 쳐다보게 하는 것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 사건은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1:29절 말씀처럼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진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올라 저주와 심판을 다 감당하시고 희생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희생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는 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놋뱀 이야기를 마치자 마자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3:16절에서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은 생명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죽이지 않고 아들을 대신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인 심판과 멸망을 피하게 하셨습니다. 9:22절에서 죄사함은 피 흘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피흘림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대신 피 흘려주신 주님의 보혈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9:30절을 보면 십자가에서 물과 피 한 방울까지 쏟으시고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은 인간이 고민하던 죄가 용서 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인간의 방황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착한 노력이나 고행이 불필요함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너를 위해 내가 죽은 것을 믿기만 하면 너는 생명을 얻게 되는 거야. 걱정하지마! 내가 너를 아버지께로 데려가 영원히 살게 해 줄 것을 주님이 직접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높이 든 사건입니다. 미친 짓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믿고 쳐다 본 사람들은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생명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주는 구원과 영생을 믿고 의지하는 온전한 마음입니다. 믿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예수 믿기 전에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알기는 알겠는데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저도 복음 앞에 저항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막상 예수를 영접하고 보니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지 설명이 안됩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설명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예정하심이다라고 만 말하면 나는 그러면 예정 안된 사람인가 봐요. 당신들이나 잘 믿고 천국가세요라고 말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도 예정, 은혜 인정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은혜가 먹히는 사람과 안 먹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인 것은 우리 인간의 의지인 것 같습니다.

 

복음을 들어도 믿지 못하겠고 순종이 안 되는 분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번 믿어도 보고 싶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 따라 남편 따라 친구나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교회에는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갈등 중입니다. 저도 목사가 되었지만 오랫동안 솔직히 그런 시간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쏟아지는 권유에 마음을 연 것입니다. ‘안 믿어지지만 믿어보기로 하자. 한번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한번 따라 가보자. 교회에서 한번 성경공부 하자고 하면 한번 해 보자.’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난 뒤부터는, 전에 안 믿어지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라고 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다릅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때부터 일어나는 것을 본인도 느끼게 되는 것이 차이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고 있었고, 기도하는 자리에 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만큼 걸렸는지는 모릅니다. 분명 그 이후라는 사실만 기억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 나의 의지입니다. 그 순종은 한번 마음먹는 것부터입니다. 의지의 결단부터 시작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은혜가 흐르는 길로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순종은 돛이 달린 배가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바람의 힘에 의해 목적지로 향해 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처음 이 땅에 태어날 때 생명을 가진 것처럼, 잃어버린 생명의 회복은 다시 태어남으로만 가능합니다. 이것을 요한은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처음 육신이 태어날 때 얻는 생명인 바이오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 조에입니다. 이 생명이 없이는 우리는 인생이라는 바이오스만 살다 죽게 됩니다.

 

그 이후에는 심판만 있을 뿐이고 영원한 사망이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원하지 못한 것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오직 영원한 생명은 예수를 믿고 거듭날 때 얻게 됩니다. 이 생명은 예수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로 다시 태어난 사람에게 선물로 주시는 생명은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에게 주신 생명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 주시기 위해 문 밖에 서서 내 남편, 아내, 자녀들, 친구들, 친척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아직도 열리지 않은 영혼들을 위해 마음이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사순절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가진 사람은 자라나야 됩니다. 멈춘 것은 죽은 것입니다. 생명 주신 이유는 주 안에서 자라나 좋은 열매 맺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예수가 주는 생명 갖지 못한 세상을 향해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베풀고 섬기고, 반드시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는 성도님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