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1:1-3

 


봄학기가 이번 주부터 시작합니다. 팬데믹 영향이 있긴 하지만 지난번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이타카에 왔습니다.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하고 함께 힘든 시간을 사랑과 믿음으로 이겨 나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평강과 건강으로 지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번 학기에 처음 이타카에 오신 분들이 있으실 텐데요. 잘 정착하기를 바라고, 저에게 연락 주시면 청년부와 기혼목장으로 소개해서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늘 봄 학기가 시작할 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의미에서, 이맘때쯤이면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왔습니다.

 

이번 학기는 너무 기대가 됩니다. 특별히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 중 한 명이었고, 신약성경에 요한 일, , 삼서 그리고 신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을 기록한 저자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으로부터 어머니를 부탁 받은 후 마리아를 모셨던 제자이기도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남아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의 핍박 가운데 있을 때 위로하고 소망을 던져 주었던 제자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보게 될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와는 좀 다른 접근을 시도합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결론 짓도록 유도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명확한 선포를 들려 줍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 가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유명한 나는 생명의 떡, 세상의 빛, , 선한 목자, 부활이요 생명, 길 진리 생명, 팜 포도나무이다라는 7가지를 보게 됩니다. 또한 7개의 표적을 사용하여 예수님에 대해 소개 하기를 좋아합니다.

 

공관복음서에서 사용한 기적과 이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표적’(sign)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기 위해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한 사건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믿게 하려는 의도가 더 있었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이런 특징들 때문에 초신자들에게 공관복음보다 먼저 요한복음을 읽을 것을 권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읽기 시작하면 정말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할 신학적 내용을 다루기도 합니다. 쉬우면서도 심오한 두 양면이 들어있는 복음서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왜 이 책을 기록했을까요? 

 

20:31절을 보면,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이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어 생명을 누리게 하기 위해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믿음, 믿는다는 말이98번 정도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만큼 요한이 살았던 환경에서 복음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이 있었고, 방해가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과 목적에서 기록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인가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소개로 시작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1:1절 상반절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태초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신 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전달합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과거는 물론, 앞으로도 존재하실 불변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영원성은 우리 믿음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선지자들을 감동시키며 역사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중심에는 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구약의 사람들에게도 약속을 이루신 것처럼 우리에게 허락하신 약속도 꼭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신 분을 못 믿는다면, 어떤 존재가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인간에 불과한 예수의 피가 과연 나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까? 라는 불확신과, 심판과 사망에 대한 두려움이나, 영생에 대한 불신을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주님은 다시 심판주로 오셔서 모든 것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실 줄 믿습니다. 

 

둘째로 1절 중반절을 보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요한은 이 세상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계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두 번째 고백을 들려 줍니다. 17:5절에서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광에 관한 말씀을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함께 계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드러내 줍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가까운 사이이고, 서로 속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아는 가족과 같은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교제 관계를 요6:38절은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행하려고 하십니다.

 

1:12절 말씀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가 가능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 자녀는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가 일어날 때 아빠의 마음을 알게 되고 그 뜻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어떻게 하셨을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주님은 많은 기적들을 이루신 이후에도 조용히 혼자 기도하러 가시는 모습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가장 친밀한 교제를 이루는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결국 기도는 내 뜻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도를 통해 가장 세밀하게 전달됩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맞습니다. 그렇다고 일방적인 내 기도제목만 나열하는 시간이 되지 않기 바랍니다. 봄학기부터는 사소한 것에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가 우리 가운데 더 있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간혹, 성도님들로부터, ‘아버지의 뜻을 잘 모르겠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저에게 물어도 답은 없습니다. 기도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답입니다. 기도했는데요? 라고 말씀하시면, 답을 주실 때까지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고 빈틈없이 철저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 역시 지극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죽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 안 하시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분들은 더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다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들 중 하나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답을 주어야 되는데 요청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일 때, 하나님은 답을 미루십니다. 응답이 늦어질 때, 저는 믿음을 더 키우라는 아버지의 응답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도전해야 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선택합니다.

 

주님은 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의 고난까지도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26:39절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 아플 것 같으니 피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그때 상황에서 주님도 아버지와 다른 의견이 있었겠지요.

 

제자들은 아직 하나님 나라도 이해 못하고, 믿음도 없어 보입니다. 다들 높은 자리에 앉기만 원하고 다투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아버지 조금만 더 이 땅에서 사역 하면 안될까요?’ 물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응답이 없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까지 기도한적 있었던가요?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몇 번이나 와서 기도의 요청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몇 번씩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오는 모습은 짧은 기도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이 지연되고 우리의 뜻이 아버지의 뜻과 충돌할 때 몇 번이고 더 기도하며 나아가라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십자가를 지게 되면, 뒤에 남아 있는 12제자들의 미숙함, 그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 같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걱정과 염려 뒤로 했습니다. ‘맡기라는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한번도 인류에게 허락된 적이 없었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열라는 도전이었습니다.

 

인류 구원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긴 침묵의 시간에서 주님은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죄 용서함과 부활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가 다음 주에 시작되는 사순절 기간은 물론, 평생 동안에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더욱 있을 줄 믿습니다.

 

성도님들에게 기도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를 쉬지 않는 사람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경읽기를 하면서 병행 되어 가야 할 것은 독방 기도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아도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기도 못하는 분들이나, 안 하는 분들이 기도의 시간을 가지려면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른 시간에서 기도의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는 시간을 좀 줄여 보기 바랍니다. 게임이나 오락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 하십시오. 그러나 시간이 없어 기도 못한다는 분들은 한번 시도해 볼 것을 도전 드립니다.

 

의지를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놀라운 변화들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저도 아들과 둘이서만 갖는 시간이 있는데요. 이때 아들에게 세상 살아가는 방법, 힘든 일 다가올 때 이겨내는 방법, 친절하고 구체적이고 알아듣기 쉽게 말해 주곤 합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성도님 가운데 중보기도 팀장도 오래 하셨지만, 개인 기도 룸을 집에 만들어 두고 기도했던 성도를 알고 있습니다. 아파트에 조그마한 공간을 자기의 기도실로 만들었습니다. 힘들면 들어가 기도하고, 논문 막히면 부르짖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한 분입니다. 

 

성도라면 그렇게 해야 하기에 그분의 간증을 나누는 것입니다. 새해, 새 학기, 힘든 시간입니다. 게다가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아직도 기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현실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과 기도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해서 응답 받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요한은 1절 하반절에서 예수님에 대해 엄청나게 놀라운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이 놀랐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오직 한 분 유일신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님이 한 분 더 생기는 것처럼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말씀과 하나님이 다른 이름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는 동시에, 이 두 분이 같다고 말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과 말씀은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하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성부와 성자, 여기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더 나아가 성령까지도 동일한 삼위일체 개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렵지 않게 쉽게 우리 성도님들에게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삼위일체(trinity)는 신비이며 그 어떤 누구도 완벽하게 설명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삼위일체 교리는 엉터리가 아니라 우리 인간 지혜의 한계입니다.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때 하나님은 직접 보여 주시는(예수님의 세례장면) ‘계시를 통해 이것을 밝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신 것이기에 실체이며 믿을 수 있기에 충분합니다. 제가 찾은 한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3 in 1(Three in One) 이라는 샴푸 린스 컨디셔너가 한 통에 들어있는 것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곤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각각 서로 다른 역할을 하지만, 완벽한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을 삼위일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요한은 그 사실을 밝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중요성을 가질까요? 이것을 한 번에 푸는 방법은 1절 하반절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의미를 한번 더 음미해 보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말씀, 즉 성부와 성자 간에는 아무런 높고 낮음의 차이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듯 주님 역시 우리의 영광과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적 배경을 가진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혁명과도 같은 소리이기도 합니다.  

 

이 놀라운 외침은 오늘 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보는 사람들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는 종교들에게 여전히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요한의 이 고백은 우리 믿음의 핵을 이루는 요소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인간이 가진 언어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고백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 역시 주님을 처음 보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귀를 의심하고 마음으로 불신하다 결국 확신에 찬 예수에 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들려 줍니다.

 

들려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요20:29절에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훗날에 우리 모두는 믿었던 이 모든 것들이 진실됨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이 진리 지키느라 메도 맞을 것이고, 감옥에도 가고 심지어 순교자도 나오겠지요.


그때가 오기까지, 우리가 언제나 선포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에 주님은 나의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리기에 합당한 분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기에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주저 없이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 한 방울까지 흘려주신 아버지의 독생자이시기에 평생의 감사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죄인을 살리기 위해 가시에 찔리고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 피가 되고 물이 되어 한 방울까지 남지 않을 때가지 참아주셨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 잊어 버릴 수 없습니다.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것 머뭇거리지 않기 원합니다. 나의 주인이심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이성과 논리로 가득 찬 캠퍼스와 이 세상에서, 앞으로 쏟아져 나올 인간적인 생각들, 신비한 유혹들과 더 나아가 악한 영들의 영적 미혹 앞에, 오직 주님만 섬길 것을 결단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