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직(4): 집사의 직무 

6:1-6

 


우리 교회는 제직들을 임명 하고, 한 해 목표를 향해 힘차게 출발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올해는 특별히 제직세미나를 대신해서 시리즈로 제직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제직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직책을 맡아 봉사하고 섬기는 분들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이라는 한 민족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열방의 모든 민족을 부르시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추상적 개념이 교회를 통해 보여지고 이루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교회 집사의 직분이 생겨나는 배경부터 먼저 살펴볼까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 땅에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6:1절 상반절은 개종하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엄청난 수적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 실천하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하여 사랑이 넘쳐나고 수적으로 성장하던 교회가 문제에 직면합니다.

 

오늘 이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에 두 번째로 언급되는 초대교회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1절을 보면 공동체 내에 두 가 생기고 원망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2:5절에 의하면 본토 유대를 따나 외국에 흩어져 살다가 돌아온 유대인들을 헬라파 유대인이라 부르게 됩니다.

 

이들은 히브리어를 모르고 당시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 하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는, 교회 구제에 의존해야만 살 수 밖에 없는 과부들이 많았음을 또한 보게 됩니다. 하지만 히브리 유대인들에게 밀려 매일 받는 구제에서 제외 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빠지다의 의미는 소홀히 하다, 간과 하다는 의미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계속을 나타내는 동사형태가(미완료 과거 수동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자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투덜댐(KJV: murmuring), 불평(NASB: complaint) 이 발생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원망을 이용해 교회를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은 십자가로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사람과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작년에 에베소서를 볼 때, 4:3절에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원망은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허물어 버리며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는 영적 위기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원망이란 단어는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에서 모세와 하나님에게 했던 동일한 단어입니다(16:7; 14:27). 사도행전은 이 일로 인한 교회의 모습을 상세하게 서술하지 않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의 원망은 하나님의 교회에 상당한 피해를 주었을 것을 짐작해 봅니다. 

 

우리는 이미 예루살렘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행 2:44-46절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자신의 것을 내 주며 공용으로 사용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원망하는 모습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보여 주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순전한 사랑의 공동체가 금이 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한쪽은 자신들이 교회 안에서 기득권을 행사하려고 했고, 다른 한편은 자신들이 푸대접을 받게 되자 마음이 상했던 것이지요. 전에는 마음을 같이하여 모여 떡을 떼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후 얼마가 지났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1절을 보면 성령 강림 사건이 있고 교회가 날마다 수적으로 성장해 가던 어느 때를 그 때에라고 언급합니다.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가득한 교회에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 한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 모인 어떤 믿음의 공동체라 할지라도 이런 문제에 부딪힐 수 있음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는 문제 속에 살아 가야만 합니다. ‘교회이기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너무 쉽게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불안전하기에 교회는 늘 내면적인 회개와 외형적인 개혁이 일어납니다. 개혁이라는 단어를 보아도 re-form입니다. 한번 정해진 형태를 고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 되어 있는 것을 살피고 언제든지 지금 갖고 있는 것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또한 외형적으로는 같은 형식일지라도 담겨 있는 내용을 새롭게 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개혁만 있어서도 안됩니다. 끝까지 변형시키지 않고 지켜 나가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오염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진리를 흔드는 사람들을 대항해서 지켜야 합니다.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고 모든 것이 사도들에게 집중되어 있던 교회의 의존도를 새로운 리더십들에게 분산시키는 개혁을 추진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수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하였지만, 그 수에 따른 조직이 정비되지 않았다는 점이 표면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해야 할 본질적인 일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심각성을 드러내 줍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오히려 구제하는 일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작 사도들은 복음전파에 전력해야 하는 일을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행 1:8절에서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탄은 이런 사도들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 만족하실까요?

 

세상에서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지원하는 구제사역이 교회에 있습니다.이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역으로 오늘날 교회들도 등한시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목적을 잊거나 흐려져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도들이 성령이 아니라 감정에 이끌리는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이 앞서가면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잃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망각해 버립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도 사람들이 늘어나자 자신들도 모르게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것에 쏠리는 잘못을 하게 됩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데 사도들도 어느 정도 유혹을 받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도가 아닌 일곱 사람을 세워서 구제에 힘쓰게 함으로서 사도만이 주님의 증인이 아니라 이제 점차 전 교인들에게도 증인된 삶이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만 아니라 땅끝까지 확장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반을 교회가 갖추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잘못되고 있음을 즉각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 충만함을 경험한 사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 또한 시인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교회 제직들이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처음으로 취해야 하는 모습은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저나 성도님들의 입술에서 남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소리가 먼저 나오면 본인 스스로가 성령충만 하지 못함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그럴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일지라도, 그 전까지는 기도하고, 섬기는 일에 함께했던 형제 자매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내 입에서 그들을 향해 위로나 격려 보다 비난이 나온다면 나스스로 사탄의 먹이 감이 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만 잘 하고 남들은 안 하는 것 같아 보이면 이것은 심각한 수준입니다. 왜 내가 여기까지 왔지 빨리 깨닫고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잘못을 찾아내고 시인하는 모습은 성령 충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은혜입니다. 저와 우리 교회 모든 제직들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차이점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다른 리더십을 통해 구제 사역을 진행하게 했던 것입니다. 둘 다 주님이 원하는 일이기에, 각자 다른 직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쪽에만 사역이 치중할 때,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이 막히지 않도록 아버지의 마음이 성령을 통해 전달된 것입니다.

 

다음은 교회가 일곱 사람을 뽑는 자격을 이어서 말해 줍니다. 사역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야 하기에 성령 충만해야 했습니다. 다음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말씀을 아는 상태에서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알게 된 바를 실천하고 활용하는데 막힘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통해 증거되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다 경험이 많다가 아닙니다. 내가 가진 믿음을 실천으로 옮겨 순종하는 능력의 여부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삶으로 살아낼 때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에게 좋은 평판을 줄 것은 당연하겠지요.

 

일곱을 택한 것에 대하여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라는 등 어떤 다른 영적 해석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장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교회가 넉넉히 구제 사업을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리더들의 숫자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필요하면 더 뽑을 수도 있고 적게 뽑을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절차를 보면 사도들이 임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선출권을 부여하여 세워지게 됨을5절은 말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이 아름다운 전통에 따라 안수를 받는 항존직이 세워질 때, 성도님들의 동의와 결의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제직들이 교회의 행정적인 일을 감당할 때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4절은 말씀해 줍니다. 우리 교회도 세워질 제직들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다양한 영역에서 사역들이 활발히 운영될 줄 믿습니다. 한편, 사도들이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말하는 것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이 기도와 말씀 선포하는 일에 비교하여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래 사도들이 해왔던 일이지만 이제 좀더 교회가 더 효율적으로 복음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요한 사역을 사도들과 집사들이 직무를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제직으로 임명 받는 모든 분들이 마음에 꼭 새겼으면 하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것은 제직으로 임명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알고, 내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우리는 주님이 심판자로 다시 이 땅에 오시기까지 모두가 사명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대문에 지금 하는 것입니다.  

 

누가 더 중요한 것을 맡았느냐가 아니라, 단지 각자 다른 직책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며 하나님의 뜻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제직들이 사도들의 일을 맡아 주지 않았다면, 기도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 소홀히 되고, 이제 막 생겨난 교회가 많은 이단들에 의해 아무런 방어책도 없이 무방비 상태에 놓였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청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제직들에 관한 말씀으로 듣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부름을 받고 교회를 섬기는 사명은 동일합니다. 졸업을 하고 떠난 선배들의 자리를 이제 여러분이 이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를 믿도록 불신자에서 믿는 자로 부르심입니다.

 

다음은 이 세상에서 나가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삶의 터전, 직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부르심입니다. 모든 성도가 이 마지막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면 부르심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직분을 맡으려고 하는데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분이 혹시 있다면 주님께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 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가진 능력과 나를 둘러싼 환경과는 상관없이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입술로 계속 선포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탄이 놀라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군인들이 작은 소리로 힘내자 싸우자 이기자라고 구호를 외치던가요? 큰 소리는 일단 군인 자신들에게 용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듣는 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의 기도는 영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제직들의 기도에는 믿음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적인 사탄을 누리는 힘입니다. 사탄에게 밀리고, 유혹 당할 때 승리하는 비밀입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리스트를 만들어 한번 기도해 보기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담대함과 힘을 얻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믿음과 성령충만이 짝을 이룹니다. 성령충만을 원한다면, 믿음을 달라고 외치십시오. 10: 17에 의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을 때, 성령은 내 속에서 충만해집니다. 성령 충만은 믿음 충만이며, 믿음 충만은 말씀 충만인 것입니다.

 

말씀이 만병 치유 약입니다. 7절을 보면 말씀이 더욱 왕성해질 때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 제사장들이 말씀에 복종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대 제사장들은 새로 태어난 공동체를 적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더 심하게 이단중의 이단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사도들 역시 제사장을 설득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하고 말씀이 왕성해지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성전 제사장들이 개종하게 됩니다. 성도님들도 우리가 사는 지역과 가정에 말씀이 채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학교나 회사나 식탁에서 대화가 예수로 바뀔 때 정말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과 사람들이 말씀 앞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직책은 다르지만, 하나님 나라 위해 일하도록 주님이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 부름 앞에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리고 목회자와 서로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는데 참여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