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직(1): 완전함을 이루는 교회 일꾼   

1:24-28

 


연 초에는 교회 제직들을 위한 말씀을 나누곤 합니다. 1월 마지막 주일날 교회제직임명이 있습니다. 매년 서리집사님들이 임명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집사, 장로, 목회자 모두를 제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 궁금한 것은 제직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입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교회를 위해 일한 사도 바울을 통해, 제직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바라 바라보고자 합니다. 먼저 24절 상반절을 보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언급합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당하는 괴로움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직접 목회를 한 일도 없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아마도 3차 에베소 사역을 할 때 복음이 전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특정 골로새 교회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해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제직은 첫째, 주의 일을 하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그 일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란 우선적으로 기도가 필요한 일을 말합니다. 아픈 분이 생기거나, 힘든 일을 당하거나, 코로나 19 바이러스 팬데믹과 같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경우가 되겠지요.

 

이때 모든 성도가 각자 기도하지만, 특별히 금식 기도도 하고 철야 기도도 하며 주님 오실 때까지 그 아픔들과 힘든 일들을 주의 사랑으로 감당해 가는 것이 제직이 할 일입니다. 갑자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찾아가 위로 하기도 합니다. 선교지를 돕고 후원해야 할 일이 생기면 물질적으로 후원도 하는 것입니다.

 

24절 상반절에서 사용 되는 괴로움이란 단어는 고난/재난/불행 등으로 번역이 가능합니다. 정신적 고통이나, 경제적 손실, 또는 바울처럼 감옥에 가는 육체적 고난까지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결국 제직은 믿음의 공동체 내의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런 모든 일들을 내 일처럼 감당하고 처리해 가는 희생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직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가족수련회, 말씀 사경회, 바자회를 한다고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막상 그 일에 동참하려고 하면, 학교 일이나 직장 일이나 가정 일보다 더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생깁니다. 더구나 직책을 맡은 경우, 자신의 일이 희생 되는 경우도 발생하곤 합니다.  

 

그래서 아예 교회에서 어떤 일이든지 안 하는 그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제외한 교회 모든 행사나 모임이나 부서를 맡거나, 임원이 되는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나의 상황을 고려해 보고 할 수 있는 것만 선택적으로 참여하는 그룹도 생겨 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내 마음이 좀 불편하고, 손해가 좀 있어도 자신을 희생하며 주의 일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것을 주님은 원할까요? 마지막이 좋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전혀 주의 일 안 하는 것 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기회만 보고 미루는 것보다는 낫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경우에, 본인의 자율적 의지도 없이, 남에게 억지로 떠밀려서 할 수도 있습니다. 주의 일이기에 처음에는 감당할만해서 맡아 추진해 갑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맡은 일이 버거워지기 시작하면 점점 원망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조건 주의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것도 꼭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24절 상반절의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뒤에 바로 이어지는 기뻐하고라는 말이 참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일을 하다 보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는 견뎌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괴로움마저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제직은 둘째, 힘든 일에도 기쁨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기 싫어도, 시간이 없어도, 무조건 주의 일은 해야 한다가 우리 신앙생활에서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억지로라도 일을 하다 보면 그 속에서 기쁨을 얻고 은혜를 체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들의 좋은 간증도 듣곤 합니다. 또 믿음도 있고 할 수 있는 능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격상 나서지 않으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억지로라도 일을 하다 보면 오히려 자신의 성격이 바꾸어지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쁜 경우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제직들을 세울 때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두 가지 직분자들을 세우게 됩니다. 훈련 받아 평생 섬기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을 제직으로 세우는 항존직이 있습니다. 목사 장로 서리집사가 아닌 (안수)집사로 모두 안수를 받은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평생 기쁨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겠다는 서약이 있는 분들이지요. 그 외에는 1년을 제직으로 섬기게 됩니다. 우리 교회 서리집사님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일년 제직임명을 받을 때 서약서는 중요합니다. 맡은 일은 어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잘 섬기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하는 것을 기도하며 하셔야 합니다. 가장 먼저 솔직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 믿음도 없는데 내가 감당할 수 없다면 조금 더 기도하며 믿음이 생기면 하겠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쁨이 올 때가지 기다려 주겠다고 면죄부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렇게 한다면 몇 사람이나 주의 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의 의미는 누가 시키든, 순번에 의해 돌아가든,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의 결단으로 시작했든, 일단 주의 일을 시작하고 난 뒤 힘든 일이 나에게 다가와도 기뻐하며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면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우선 기쁨으로 맡은 일을 완수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 왜 저 사람 안 해? 이런 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도 주의 일 하면서 즐거움을 맛보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제직들은 내가 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더 생각하기보다는,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더 생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되야 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한 번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내가 그 일 할 수 있을지를 따지지 말고, 기쁨으로 주의 일 하는 소원과 바램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분들도, 일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의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며 계속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로 보여지게 됩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분들도 안/못 하는 분들을 바라보아도 원망도 정죄가 생겨나지 않게 됩니다. 또 어느 공동체이든지 일할 때가 되었는데 안 하고 있다는 소리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분이 기쁨으로 주의 일 감당하기를 원합니다라는 마음이 더 우리 속에서 기도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누가 힘들어하고 원망하고 싶겠습니까? 하면서 신나서 덩실덩실 춤추며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남들까지 격려 해주며 하고 싶습니다. 지치면 새 힘 얻어 넉넉히 잘 해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즐거움으로 주의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이 질문들을 몇 주에 걸쳐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답을 찾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주의 일로 내게 희생을 요구한다면 기뻐할 수가 있습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하다 보면, 이런 일은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직장에서 승진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고 해도 즐겁게 주의 일 할 수 있을까요?

 

좀 더 현실감 있게 회장으로 일하다가 한 학기 졸업이 늦어지는 일이 발생하면 기뻐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코넬한인교회 제직들과 성도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나눈 것처럼 제직들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섬기다 보면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자기 희생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관심은 교회에서 어떤 사역이나 행사가 있을 때, 과연 내 것을 희생하고 섬기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닙니다. 그것 보다 내 물질, 시간, 다른 것들이 희생을 당하면서까지도 기뻐하느냐? 라는 더 차원 높은 신앙을 다루는 것입니다. 

 

대부분 성도들은 내 시간, 능력, 가족들 상황이나 형편 모두 따지고 점검하고 고려해서 참석하려고 노력하는데 신경을 집중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뛰어넘어 그 일을 기쁘게까지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듣고 보니 더 부담스럽습니다. 더 힘이 듭니다. 거기까지 어떻게 도달 할 수 있어? 난감해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4절 하반절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말씀 가운데 우리가 주의 일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기뻐한다, 즐거워한다는 단어를 ( 5:3, 2:18) 자주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잘되고 편안할 때 나오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울 사도는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분명 그는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진짜인데? 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제직은 물론 우리 믿는 모든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런 기쁨을 가진 사람이라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감옥이라는 암담한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바울의 내면을 싸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한 영입니다. 이것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 속에 거하게 되면 어떤 상황에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하시고 활용하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이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믿음을 갖고 주의 일을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은 활기 있게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두 가지인데요. 주의 남은 고난을 내가 감당한다. 그리고 주님의 몸 돤 교회를 위해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겠다 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기까지 하신 예수의 고난 외에 다른 것이 더 남아 있다는 말입니까? 십자가 고난이 부족했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더 받아야 합니까? 그렇다면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고난과 행위도 들어가겠네요.

 

그래서 이런 해석은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완성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십자가의 고난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 놓은 구원의 복음을 계속 세상에 전하데 될 때 받게 될 성도들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일에 참여하다 받는 고난의 모습을 바울은 내 몸에 고난을 채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성도들은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고난에 참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고난은 주님이 받은 고난과 연결되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 때문에 받는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전파 도중에 고난 받는 것은 우리와 연합되어 있는 주님이 직접 받는 것이 됩니다. 또한 성도들이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의 흔적은 예수님이 직접 나에게 남긴 흔적으로 생각하기 바랍니다. 6:17을 보면,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마라 내가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바울도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나에게 생긴 고난의 흔적을 보시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줄 믿습니다. ‘나를 위해 받은 고난이구나, 네가 받은 것은 바로 나의 고난이다.’ 이 믿음을 가질 때, 성령은 더 큰 고난도 채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주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채운다는 말은 한번이 아니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이라는 점에 더 힘이 생깁니다.  

 

이런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을 25절 상반절은 교회의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이 직분은 25절 중반절, “하나님이 내게 주신것으로 표현 합니다. 사람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직을 임명 받는 순간을 귀하게 여기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목회자나 교회는 단지 주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가 일꾼 되는 목적을 25절 하반절은 기록합니다.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하기 위함입니다. ‘직분이라는 의미는 집을 돌아보는 직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의미는 복음을 아낌없이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제직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선을 다해 전하는 일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분들입니다. 교회가 복음 사역을 위해 무엇이 부족한가? 복음 사역을 맡은 모든 분들에게 어려운 것은 없는가? 살피고 채워나가는 분들입니다. 결국 교회의 일꾼은 복음의 일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제직이 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 일하지 않고, 나의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주님만을 위한 일꾼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 27절처럼 성도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제직들이 수고하고 사랑을 나타내야 할 영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까지 미치게 됨을 알려 줍니다. 이 목적을 마음에 품게 되면, 다음은 이것 이루어 내기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구제와 봉사, 선교를 위해 기도회를 한다, 바자회를 한다. 물질을 보낸다. 이 모든 것들이 부자유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익숙하게 밀착되어 실제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날 때 28절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라는 말에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 말은 인간적으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완전한 고결성과 미덕을 가진 존재를 말하긴 합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언제 도달할지 다들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주님 오실 때, 우리들은 영화라는 구원의 완성으로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특정인에게 완전함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놀랍게도 바울은 성도 모두에게 이 말을 사용합니다. 믿는 우리 모두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있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함을 추구하는 행위의 열심보다 늘 챙겨야 하는 것은 내가 주 안에 있는 자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완전함은 하나님 앞에서의 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없는 상태인 의롭게 됨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되기에, 성도의 완전함은 믿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완전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이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 없음, 이것이 완전함의 의미입니다.

 

라는 완전함을 이룬 성도는 다음으로 완전한 신앙생활이 가능해집니다.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지적 지성주의에 빠진다거나, 감정에 몰입하는 신앙이나, 행위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모든 종류의 공로주의를 배격합니다. , , 의를 포함한 인격적 모습으로 예수를 닮아가는 삶입니다.

 

전체적으로 완전함을 보면, 하나님을 위한 삶과 이웃을 향한 삶의 이중적 구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 함을 받는 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향한 완전한 삶은 이웃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수고와 고난까지 받는 삶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이웃을 향해 나타나는 나의 행위가 연약하고 부족하고 미숙해 보일지라도, 29절 말씀처럼 내 속에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성령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내 힘으로 안되기에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일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완전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주님이 공급해주는 힘으로 살 때, 고난까지도 묵묵히 견디며 살아내는 완전한 성도의 삶이 가능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과 제직들에게 주 안에서 이루어 내는 완전한 삶이, 날마다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