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12): 빛의 자녀 

5:8-14

 


2020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모두들 본인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학생, 직장인, 주부로서 다들 한 해를 되돌아 보는 시간들을 가졌을 것입니다. 올해 초 세웠던 계획들은 얼마나 성취했는지요? 안 되었다면 왜 안되었는지 다들 살펴 보았을 텐데요. 만족할만한 점수들이 나왔는지요?

 

올해는 예상 하지도 못했던 폭탄을 맞았습니다. 비록 팬데믹으로 힘들긴 했지만, 제한된 범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개인이나 가족 중심으로 생활해 가는 것을 배웠습니다. 외로움을 이겨내고 비대면 사회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훈련도 받았습니다. 앞으로 더 힘든 시간들이 올지 모르겠지만 이겨낼 자신감도 어느 정도 생겼습니다.

 

저는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평가해 볼 수 있는 좋은 성경 본문을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것들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원하고 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 2021년을 계획할 때 꼭 챙겨야 할 점검 리스트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반드시 십자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의 이웃관계를 에베소서 4장이 다룹니다. 이어서 5장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하는데요. 그래서 엡5:1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을 엡5:8절 하반절에서는 빛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요일1:5절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전에 우리는 죄로 인해 심판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어둠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나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 자녀된 우리를 향해 엡 5:8절 후반절은  주 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결국 이 한 구절은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를 믿을 때 빛과 어둠이 확실히 대조가 되듯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에 맞는 책임과 의무 또한 주어진다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신앙생활은 구원 받은 것은 받은 것이고, 나의 삶은 예전과 같이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그런 삶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본질적인 내적 변화는 반드시 우리의 외적 삶도 뒤집어 놓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죄에 대해 몸부림치는 자신의 도전을 바라보면서 더욱 구원의 감격이 일어나야 합니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예수를 닮아가는 나를 발견하며 어느 날 예수 믿기 전과 다르게 변한 나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팬데믹 동안 다들 힘들었지만, 그래도 주의 말씀 한 구절이 나에게 힘이 되었어.” 아니면 찬양을 듣는데 너무 은혜가 되어 카톡방에 올려 함께 공유했어요.”

 

이런 경험이 있으신지요?  힘든 일이 다가오면 하나님과와 관계가 일시 중단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빨리 깨닫고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지요? 아니면 지금까지 내리막 길을 달리고 있는 중인가요? 누군가 나에게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들어 시험을 줄 때 조금은 움추리지만 다시 평강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회복력이 있는지요?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고, 교회에 나오는 것조차 싫을 때, 내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주님의 마음으로 다시 형제자매를 바라보는 경험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 가운데 초신자도 있지만 대부분 예수 믿은 지 어느 정도 되신 분들입니다. 힘들면 좌절하고, 사람에게 시험 들면 용서 못하는 그런 모습을 이제 지겨워해야 합니다.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이 바로 엡5:14절에서 말하는 잠에서 깨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 기분 나쁜 상황 만나면 그냥 내 감정대로 따라가는 삶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도 함께 깨어야 합니다. 내 감정을 정당화 시키는 방편으로 실수나 잘못한 사람에 대해 잘못한 것을 지적하고 정죄하면서 자기 정당화를 주장합니다.

 

감정과 지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우리의 의지 또한 십자가 밑에 완전히 내려 놓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최종 결단과 행동들이 나오기까지 심사 숙고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마지막 단계인 십자가 앞에 서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 앞에 내 감정, 지적 판단, 의지적 결단을 비춰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격과 신앙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인격은 아무리 고귀하다 하지만, 인간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습니다. 모든 영광은 그 고귀한 인격을 가진 그 사람에게 돌려집니다. 그러나 신앙은 내 위에 주님을 모시는 삶입니다. 나의 감정과 이성과 의지를 죽일 수 있어야만 신앙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믿기 전과 같이 그대로 나의 습관과 사고방식으로 살기 때문에 삶에서 용서가 없고 관대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불화가 생겨도 화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너무나 행복하지 못하고 슬픈 신앙생활 아닙니까? 행복해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왜 나 스스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어둠에서 빛으로 완전히 나온 사람들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삶에서 주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확실하지 않으면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사는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주인 되면, 이전의 나의 습관과 삶의 옛 방식이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내가 과연 빛의 자녀로 살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 5:9절은 빛은 어떤 열매를 맺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빛의 열매들은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합니다. 빛 되신 하나님이 빛의 자녀들과 함께 공유하는 속성입니다.

 

이것들이 잘 이해가 안 되면 엡 4:31절에서 언급되는 어두움의 열매들인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다른 것들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모든 악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좀 설명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모든 악독은 모든 착함과 대조를 이룹니다. 

 

먼저 착함은 선을 의미하는데 선이 무엇인가를 알면 모든 악은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 1)하나님 한 분, 2) 그분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 3)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것은 (1) 하나님 아닌 영적 존재나 우상들(섬기는 것에 해당), (2) 인간적인 사고나 철학, 세계관, (3)하나님 뜻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은 의로움입니다(디카이오쉬네). 하나님이 택한 자신의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가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관계는 의의 관계 즉 죄 없음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들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인데요.

사람이 스스로 행하는 의는 온전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만으로 달성 가능한 것입니다.

 

그 다음, 진실함은 거짓과 가식, 위선이나 숨기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외식적으로 행하는 것과 다릅니다. 거듭난 성도들의 속이지 않고 솔직하고 정직하며 순수한 모습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닮아 가는 것이 빛의 열매를 맺어가는 삶인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한번만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빛의 열매가 맺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때 선하심과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이 기분 좋으면 나타나고 기분 나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들쑥 날쑥 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가꾸어 갈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내가 빛의 자녀인가를 확인하는 방법을 10절에서 소개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알고들 계시는 지요? 11: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부터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가 믿어지고 구원자이시며, 주권자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다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믿음으로 간구하는 모든 것들에 응답하기 에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이유입니다.

 

 

삼상 15: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세상의 부모들처럼 자녀들이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는 자식을 당연히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은 겔 33:11절에 의하면,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을 행하는 자가 그 죄로부터 돌이켜 회개하고 구원 받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빛 된 성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자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직 이것만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전 10:31절은,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먹는 것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에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듣다 보면,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세상을 보아도 분명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속에도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이 보입니다. 우리만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혼돈스러워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나를 위해서다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때로는 우리의 욕구와 맞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얼마나 나의 것을 굴복시키며 사느냐가 빛의 열매가 얼마나 맺느냐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한번도 주님을 위해 내 것을 포기한 적이 없다면, 내게서 드러나는 착함, 의로움, 진실은 전부 나를 만족 시키기 위함이고,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이기 위함이고, 내가 속한 종교적 생활에 만족하는 삶일

뿐입니다. 

 

이제 빛의 자녀의 마지막 특징은, 5:14절에 의하면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잠자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선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구속 받기 전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4-6장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불신자를 가리킨다면 문맥상 맞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자는 성도를 말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성도를 잠 자고 있는 불신자 취급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5:11절이 답을 제공해 줍니다. 이미 주님을 알고 따르고 믿는 자들이 여전히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믿음의 성도가 과거의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빛의 열매도 없이 전에 살던 방식에 따라 사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생활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해도 바로 변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 안에 살면서도 성화의 삶에 대한 도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 말씀을 계속 의심합니다. 조금만 힘들고 서운한 것 생기면 무너지고 맙니다. 전에 불신자였을 때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 5:14절에서 잠자는 사람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잔다고 표현합니다.

 

과거 믿기 전 죽은 자였을 때 하던 삶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 분명합니다. 5:12절은 은밀히 행하는 것이며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볼 수 없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악한 생각, 미움, 시기, 질투, 열등감과, 반대로 우월감, 남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들이 해당 되겠지요.

 

아직까지도 내 삶 속에서 이런 것들이 행해지고 있다면 엡 5:13절처럼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책망이라는 말을 듣을 때, 죄악된 사람들의 부끄러운 행동들에 대해 험담을 하고 비난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책망을 받다는 빛으로 가져오다, 밝히 드러내다의 의미입니다. 빛이 비춰지면 어둠이 물러가고 그 속에 숨겨웠던 악한 것들이 밝히 보여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악함을 드러내는 이유는 회개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남의 잘못이나 죄를 드러내는 이유는, 나는 당신보다 더 의롭게 산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더구나 남에게 핀잔을 주고 정죄하기 위함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죄 지은 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도록 이끌어 주기 위함이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일에 관여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성경적인 예를 들면, 왕상 18:2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누구를 섬겨야 될지 망설이는 것을 엘리야 선지자가 책망합니다.

 

게다가 계 3:15-16절의 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를 향해 토해내겠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서야 할 자리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을 때, 우리 삶은 열매 없는 어둠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손가락질 합니다. 세상은 전혀 우리들에게서 감동을 찾지 못합니다.  

 

위로 받고 싶어 용서와 사랑이 있는 교회를 찾아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본질을 잃어버릴 때 그들이 교회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세상이 가질 수 없는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평강이 없는데, 교회에 와도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깨지고 말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다 망가진 것은 아닙니다. 나는 괜찮은데 문제가 되는 다른 사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당한다고 소리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내에서 비난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약함으로 무너지고 죄로 인해 힘들어하는 지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가 품은 사랑은 주님이 주신 무한한 사랑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죄를 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비난이나 정죄함이 없어도, 하나님이 그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만들고, 잘못을 깨닫게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 2020년 마지막 주일에 빛의 열매를 맺는 성도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성도는 스스로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죄가 얼마나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고, 어떤 불행을 가져오는 것에 대해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선과 의와 진리가 어둠과 악에 의해 무너지고 있는 이 시대에 빛의 열매들을 맺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