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이 넘치는 성탄  

2:14-18

 


올해 우리 모두는 성탄에 앞서 미리 귀한 성탄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탄 선물로 인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할 성탄은 우리 생애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에 코로나 19 백신 접종이 미국에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2020년이 가기 전에 정말 기대하고 바라던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성탄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할 제목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첫 백신 접종자는 뉴욕시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여성 간호사 샌드라 린지였습니다. 지난 1 20일 첫 확진자가 발생 후11개월 만입니다. 앞으로도 팬데믹이 종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신접종이 시작된 것은 긴 시간의 고통이 종료되는 시작임에는 틀림없습니다. 3월부터 코넬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팬데믹이 현실에서 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점점 우리 가까이에서도 확진자들이 늘어갈 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 수가 증가되면 될수록 우리 마음속에는 백신에 대한 기대감도 커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나올 것이라는 소망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소망이 없다면 하루도 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곧 백신이 나올 거야라는 소망은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행동하게 만듭니다.

 

아직도 싸워 나가야 할 것들이 많지만, 모두에게 어느 정도 두려움도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백신이 나오자 우리의 일상이 회복될 것을 더욱 꿈꾸게 됩니다. 그때까지 모두들 이겨내는 힘을 더 달라고 기도해주시고, 서로 더 많이 챙기고, 격려하는 우리 성도님들 될 줄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팬데믹을 지나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한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늘 하나님은 인간에게 소망을 가지도록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으면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에덴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과의 삶을 다시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모든 사람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소망입니다. 그래서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 극락 정토, 플라톤의 아틀란티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등 다양한 이상향들이 나온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우리 인간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망 가운데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성경만큼 소망 없는 인간의 상태를 잘 소개해 주는 것도 없습니다.

어느 특정 지역의 사람들의 타락이나, 또는 어느 일정 시점의 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든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타락한 인간에 대한 진단인 것입니다. 이것을 엡 2:1절은 너희라는 말로 시작하여, ‘이방인들을 먼저 언급합니다.

 

하지만 바로 엡 2:3에서는 전에는 우리도 다라는 말로 전환하게 됩니다. 유대인이었던 바울 자신과 유대인 모두를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 없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울 사도는 죄 가운데 빠진 인류의 소망 없는 상태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바울은 엡 2:1절에서 우리는 죽었다는 절망적인 선포를 합니다. 이 말이 믿어지세요? 특별히 젊은 학생들이 많이 있고, 학문의 성과들이 쏟아지는 캠퍼스에서 이 말이 통하겠습니까? 그리고 회사에 출근하면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볼 텐데,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 말이 과연 현실감 있게 받아 들여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달라지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번 자신을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1)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무관심하다. 2)성령의 음성에 귀가 열려 있지 않다. 3)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해 전혀 민감한 관심도 갖지 않는다. 4)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자 하는 갈망도 없다.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정신적으로 왕성한 문화 활동과 지적 활동을 많이 하는 분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시체처럼 영혼이 죽은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부를 누리며 살아있다 해도, 하나님이 없는 삶이라고 단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의 영적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가 찾아 오기 전에 우리 모두가 처했던 상태임을 압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살아있는 죽음입니다. 예수를 만나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을 잘 모릅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상태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꽃병에 꽂을 보기 바랍니다. 보면 예쁘고 향기가 있어 좋긴 합니다. 하지만 여름철이면 일주일도 넘기기 힘듭니다. 우리 인생도 화려하게 살아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이 없으면 결국 사망입니다. 살아있는 것 같고 향기도 납니다. 그러나 며칠 뒤면 시들어 죽는 꽃을 생각하면 우리가 죽었다는 것이 좀 이해가 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 성도도 간혹 내 영혼이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현상일까요? 2:1절의 죽었다를 엡 4:18절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일시 중단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결하려고 해도 전화기 자체가 없습니다. 또 가지고 있어도 다른 번호를 가지고,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에 연결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제 성령이 함께 하셔서 유선이 아닌 무선전화기를 가지고 바로 하나님과 연결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게으르고 나태해서 전화기 충전을 잊어 시간이 잠시 걸릴 뿐입니다. 생명 되신 주님과 단절이 있다면 다시 이어지면 됩니다. 기도가 끊어진 분들은 오늘부터 기도의 시간을 정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하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다시 나아가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공급함을 맛보실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를 중단하는 것입니다. 삼상 12:23절에서 사무엘은 내가 기도하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교만이기에 죄입니다. 4:6절에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물리치신다고 합니다.

 

물리친다의 반대 의미는 바로 이어서 나오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말속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은혜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때를 따라 주시는 비와 자연의 변화도 은혜 속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건강도 물질도 모두가 하나님 은혜라는 사실을 알면 달라 질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형통함이 있는지요? 주께로 공급되어 오는 복을 누리고 사는지요? 올해는 카톡으로 새해 기도제목을 적는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년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개인 기도생활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다들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주일까지 개인 기도 제목을 포함해 매일 다른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일주일이 지나면 거의 빠짐없이 기도 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개인과 가정의 기도 통로를 통해 은혜가 쏟아질 줄 믿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역시 하나님도 모르고 기도도 모르는 이방인이었습니다(2:11). 구속의 언약도 없이, 세상에서 죽음과 사망을 향해 나아가던 소망 없던 사람들이었습니다(2:12). 그런 상태에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이며 엄청난 변화들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지금부터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우리에게 준 소망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평케 되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2:14절을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담을 허셨다는 것입니다.

 

은 문맥상으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 짓는 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볼 때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 무너졌다는 의미를 보기 바랍니다.

 

은 사람 사이에 관계를 말할 때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너겼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로 원수 된 것이 소멸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심판을 본인의 어깨에 지셨을 때,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진노가 사라질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화평이 일어난다는 소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서로간의 계약을 만들어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화평/평안(14, 15, 17 에이레네), 화목(16, 아포카탈락세)이란 말은, 소외감이나 적대감이 없고 우정을 재확립할 수 있는 상태에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땅의 사람들 사이에는 문화적/역사적/종교적인 적개심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그들을 볼 때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이며 구원 받아야 할 나의 형제자매들입니다.  

 

그들을 먼저 사랑으로 품어내지 못하고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복음이고, 미워하는 것은 미워하는 것대로 따로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우리에게 그들과 화평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들이 힘든 상황에 있다면 그들을 돕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리아 난민 캠프 사람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요즘 많이 광고를 보셨을 것입니다. 코로나로 세상이 사회적 격리를 말하는데 그들은 마스크도 없이 틈도 없이 사는 텐트 촌을 봅니다. 그분들에게까지 백신이 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우리가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벗어날지라도, 그분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 위험에 노출 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성탄을 맞이하여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마스크를 보내는 일에 함께 동참했으면 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평화 그 자체이며 평화의 전달자입니다.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 그 근원이 있고, 보다 더 강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품은 사람들이 먼저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달될 때 이 세상에 더 나은 평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작게는 우리들 사이에도 어떤 도 세워져서는 안됩니다. 코닝과 이타가, 청년들과 기혼자들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 사이의 모든 담들을 허물었습니다. 성탄을 맞이해서 서로 모르는 분이라도 목장 사이에 성탄카드를 한번 보내 보시기를 도전 드립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우리에게 준 소망을2:15에서 보기 바랍니다. 도저히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법조문으로 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원래 율법은 인간에게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표준을 제시하고 그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율법들을 지켜 낼 수가 없게 됩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여 결국은 사망이라는 족쇄를 채웠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가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으로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복음이 나를 지배하기에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했지만 도저히 도달 할 수 없었던 율법의 조항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부담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허락하신 최고의 축복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 얻게 되는 소망이 엡 2:18절에서 소개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다는 소망입니다. 참 놀라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3:6절에 의하면, 모세도 하나님을 보는 것을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립니다.

 

33:18절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할 때, 하나님은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고 보는 자는 살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33:20). 6:5절의 이사야 역시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를 보십시오.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보다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엄청난 소망이 생겨나게 되는데요. 하나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4: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6절 상반절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긍휼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 어떤 실수를 범하든지 어떤 죄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뜻입니다. 죽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어떤 죄를 저질렀든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16절 하반절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얻게 되는 또 다른 소망을 소개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하늘로부터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인턴 논문 졸업 취업 자녀문제 건강문제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안 된다고 낙심 가운데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울해 하고 힘들다고 원망하는 마음 품지 않기를 원합니다. 외로움 가운데 방황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냥 문제를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상황에 따라 돕는 힘과 지혜와 위로를 공급해 받을 줄 믿습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한 이유는 엡2:18절의 그로 말미암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1)서로간에 화평케 될 수 있다는 소망 2)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십자가의 소망 3)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아직 팬데믹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믿는 우리에게 주신 이 소망들을 꼭 붙잡고 복된 성탄 맞이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