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11):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17-24
전 세계가 팬데믹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확진자와 사망자 그리고 대응 단계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온통 우리의 관심은 코로나 바이러스입니다. 언제 백신이 나오는가? 치유 약은 개발될까? 백신이 나왔다고 한 뒤에는 우리에게 언제쯤
돌아올까? 부작용은 없을까?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시각을 조금만 돌려 보기 바랍니다. 집에서 예배 드리고 있는 자녀들이 보이실 것입니다. 10개월 정도 지나면서 그 동안 키도 몸도 커 있을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다시 한번 우리 자녀들을 보기 바랍니다. 아이들과 이야기도 나누어 보면 확실히 10개월 전과 다른 자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신앙도 성장했을 줄 믿습니다. 지난 주 성경공부를 마치며 잠시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나를 돌아보며 말씀에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도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전부 내 가정의 문제 중심이었지만, 팬데믹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2000천 이상을 기독교인들이 대면으로만 들여오던 예배를 비대면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특히 건물을 가진 교회와는 다르게 정말 40주를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배가 나에게서
어떤 소중함이 있는가를 한번은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형식보다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본질의 중요성을 다들 깨달았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에게 변화가 있었습니다. 일단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대응력과
적응력을 키웠습니다. 또한 개인들이 말씀과 기도와 예배를 통해 분명 주님과의 관계도 더욱 친밀해졌을
것이라 믿습니다.
에베소서 후반부인 4-6장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상세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지키라는 말씀을 4:3절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4:2절은 하나됨을 유지시키는 비결로서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 참음을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4:22절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4:24절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복음을 듣고 난 뒤 새로운 삶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를 믿고 난 뒤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옷을 벗고 입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사용된 용례들을 보고자 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 3:27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첫째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옛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할 때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롬 13:12절의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라고 말하는 것과 롬13:14절의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회개하고 옛 생활에서 돌아선 거듭난 성도들이
다시 그들의 옛 생활을 되풀이하려는 육체적인 본성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이제 참된 영적 변화를 갈망합니다. 인간적 욕망을
부인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
믿었으니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4:22, 24절을
좀 자세히 보면 옷이 아니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새 옷이나 신발을 사면 낡고 떨어진 것은 벗고 새로 사온 것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서 사용된 표현은 사람에게는 적합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 그 표현이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하기에 의도적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벗고 입는다’의 의미는 아무리 오래
입었던 옷이긴 하지만 과감히 버린다, 결별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는 것, 거듭 나는 것, 주의 제자가 되는 것, 성도의 삶은 이전의 내 삶과 단절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를
아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모든 것이 배설물처럼 버릴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 자녀들이 쑥쑥 자라면서 입고 있던 헌 옷을 벗고 새 것으로 갈아 입습니다. 4:15절을 보면 ‘자란다’는
말씀으로 보아 거듭난 삶은 주 안에서 ‘나’ 라는 존재의
확실한 변화와, 동시에 주 안에서 새로운 성장을 경험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벗고/입는다’는 표현은 우리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것을 전제로 사도 바울은 이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주 안에서 나이에 상관없이 자라는 사람들입니다. 4:1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성도 개인의 영적 성숙의 목표가 주어집니다. 이 목표들을
다들 가지고 계신지요?
사도 바울은 4장에서 예수 믿기 전과
후의 우리의 모습을 잘 비교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 없이 지냈던 이전의 삶을 4:17-19절에서 보여 줍니다. 예수가 없었던 모습을 말하는 이유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이겨내라는 의도입니다. 과거의 나쁜 행실을 과감히 청산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첫째, 4:17절에서 구원받지 못한 옛 사람의 마음은 아무런 가치 없는 헛된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하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행복이
여기 있다는 거짓된 사람들의 교훈을 따랐습니다. 천국의 소망 없이 무모하게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내 삶에 비추어 보면 너무 맞고 나의 고백처럼 들려 옵니다.
둘째, 4:18절에서 예수가 없는 사람의
사고와 지혜는 어둠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어두워진 지성’은
지적 결핍이 아니라 불신앙으로 인한 영적 무지를 말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분들이 지적으로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어둡고(천국, 구원에 전혀 무관심), 거듭나지 않은 지성을(주 안에서 비전이 없다) 소유할 뿐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서
십자가로 나아올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그들을 어루만져 주셔야 합니다. 빛을 밝혀 주셔서 그들의 영적인 무기력을 걷어 버려야 합니다. 복음이
귀에 들려지고 예수를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은 또한 ‘마음이
굳어져’ 있습니다. ‘굳어짐’(프로시스)란 뜻은 대리석보다 더 단단한 돌을 의미하는 어원(프로스)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이해도 안 되고, 성령의 감동에도 자신의 의지를 복종시키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죄는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허무와 죄 가운데 빠져 뿌리가 잘린 나무가 되어 버립니다. 생명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이 없을 때 1)마음이
허망해지고(17절), 2)총명이 어두워지고(18상), 3)무지해지고(18중), 4) 마음이 굳어져서 영원한 생명 가운데서 살 수 밖에 없다는(18하) 사실을 알려 줍니다.
마지막으로, 4:19절은 예수가 없어 실제로 드러나는 악한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타락한 상태를 감지조차 못하는 감각 없는 상태가 됩니다. 통제력을
상실하여 원초적인 인간 욕구만을 추구하는 방탕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남에게 피해와(시기 질투 사기), 희생을(다툼과
싸움, 전쟁) 줄 정도로 타락해 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저지르는 악에 대하여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극도의 이기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나아지려는 소망도 갖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삶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회에서 더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우리를 놀라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들과 같이 당시에 많은 것을 누리고, 지적 수준들이 높았던 로마사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적 부도덕이 범람했습니다. 예술의 음란함은 성에
대한 탐닉을 추구해 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죄는 인간의 정신과 삶을 점점 타락시켰습니다. 선한 것, 옳은 것, 참된
진리를 혼돈으로 몰아갔고, 도덕적으로 무너져 갔습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무감각한 마음과 정신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에 민감해 질 수 있도록 이 시대의 예술과 문화, 정신세계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 공동체와
가정의 가치관과 도덕적 기준으로 규정짓지 못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만이 삶의 지침이 되도록 기도할
시점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도덕적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권위를 유지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의 가정이 성경적 세계관을 세워 나가고, 가르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밀려드는 세상의 가치관에 교회 공동체와 믿음의 가정과 우리 자녀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견디고 싸울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왜 세상이 아닌 우리 교회가 그 일들을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진리와 생명을 우리 속에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4:19절에서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그들’과 구별 짓기 위해서 4:20절에서 성도들을 ‘너희’라고
부릅니다. 세상과 구별이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말씀에
기초한 세상과 다른 성경적 가치관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 없는 삶에 대해 마무리를 한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를 알고 진리를 따르는 성도에 대해 말씀합니다. 사실 4:20절은 “오직
너희는”이 아닌 “그러나 너희는”으로 원문은 시작 됩니다. 예수가 없는 것과 있는 것의 대조를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배울 대상은 훌륭한 선생도 세상도 아닙니다. 21절은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제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한 가지 요구되는 것을 강하게 말해 줍니다. 22절에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욕심에 따라 썩어져 가는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골 3:8-10절에서는 ‘분노와 격분, 악의와 비방, 입술의 부끄러운 말,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벗어 버린다’는 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주를 닮아가는 삶의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실제 변화가 따르게 됩니다. 먼저 23절은 우리의 내적 변화인
심령이 새롭게 됩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과 영이 새로워지니 그 다음은 행동도 달라집니다. 이 모습을 24절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매일 하나님을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나를 거짓되고 부패하게 만드는 유혹을 떨쳐 버리고 거룩한 삶이 매일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믿는 성도는 ‘전에는’(과거 2:3)과 ‘이제는’(현재
4:14절)과 ‘옛사람/새 사람’의 대조가 뚜렷해야 합니다.
철저한 변화입니다. 이전의 나는 누더기와 같은 더러운 옷인, 볼품없고, 썩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 안에서의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나의 모습은 새롭고, 아름답고, 성령 충만하고 활기에 찬 사람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았던 삶은 썩어져 가고, 퇴하하고, 몰락하거나
파괴되어 갑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 썩지 않는 진리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나의 옛 사람은 통제되지 않는 욕심이 나를 지배했고, 유혹이 나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님들은 예수의 피로 날마다 의롭고 거룩해지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지요?
심령의 변화가 우리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지요? 그 마음이 유지되고 있는지요? 낡은 옷을 벗어 던지듯이 옛 생활 방식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지요? 악한
행실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본 받는 자녀로서의 혁신적인 전환을 할 것에 대한 촉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듣다 보면 ‘누가 나쁜 것 안 버리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벗어 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바울은 우리에게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태어날 수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누구도 스스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게 되는 새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예수를 믿을 때 이미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옛 자아를
보며 미워하고 돌아서는(회개) 것입니다. 새 생명을 보고 기뻐하며 성령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새롭게 변화는 것이 쉽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해 하지 말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해
가는 성화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낡은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는 것은 날마다 거룩해지는
삶의 반복임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되는 것은 사람의 의지에 의해 한 번의 노력으로 일어나지 않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숙으로 나아가는 성화의 삶은 부단히 주 안에서의 노력과 훈련을 쉬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딤전 4:7절에서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말씀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은 전에 입었던 헌 옷이 더러워지면 다시 입지 말고 내어 버려야 합니다. 이 영적
싸움과 같은 전투는 계속 되야 합니다. 거듭남은 일회적인 사건이지만,
삶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은 계속적인 매일 새롭게 되는 변화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내 심령에서 시작되지만 삶에서 행동으로 끝마쳐져야 합니다.
에베소는 로마제국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도시에는 풍요의 여신 다이아나 여신을
섬기는 거대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여신 숭배와 함께 매춘과 범죄 등의 부도덕한 행위가 성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에베소에 거하는 성도들은 이런 배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부터는 옛 것을 버리는 도전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를 믿은 후에도 전의 세상 방식대로 산다면 허망한 것이고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야
할 사람이 반대로 행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삶은 마음 역시 단단해져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점점 굳어져 갈 때 거룩하지 못한 삶으로 우리는 더 나아갑니다. 거룩함과 전혀 상관없는
생활방식을 따르게 됩니다. 욕심으로 더 높은 자리, 더 많은
것만 원하게 됩니다. 이런 삶은 주님을 따르는 삶이 아닙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진리만을 붙잡고 나아가는 생명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여전히 세상적 욕망을 품고 있다면 새 사람이 아닙니다. 나의 옛 사람이 추구했던 허망한
것을 과감히 놓아 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어둠에서 나와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세상의 공허한 것과 사탄의 속임과 유혹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예수만이
주는 의와 진리로 날마다 거룩해지는 새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