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10):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
엡 4:1-6
지금까지 베이직이라는 주제를 에베소서를 통해 살펴 보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베이직은 신앙생활의
기초를 다루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이것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소개를 합니다. 1-3장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적인 것이라면, 4-6장은 구원 받은 백성들의 실제 삶을 다룹니다.
‘알았다면 행하라’는 것이지요. 성도는 아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자신이 따르는
주님을 드러내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그대로 엡 4:1절
하반절의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는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부르심’은 죄인에서 의인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이전의 모습을 에베소서 2장 전체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엡2:12절은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라고 소상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삶으로부터 구원 받은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게 사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말은’당연히
보답할’ 또는 ‘가치 있게’
또는 ‘..에 어울리게’ 라는 뜻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에게 어울리는 합당한 생활을, 엡4:3절은 ‘편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성도들은 왜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되게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공동체는 하나됨을 강조합니다. 하나됨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가장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역시 우리 교회가 하나로 일치해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4:4절은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하나’라고 말씀하는데요. 이 구절에서 그 첫 번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한 성령에 의하여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에 의해서, 거듭난 한 형제 자매, 더
나아가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가족보다 더 단단히 하나로 묶인 공동체가 어디 있습니까? 한국 분들 촌수를 따지는데요. 삼촌부터 시작합니다. 부부는 무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는 일촌입니다. 형제자매는 이촌이 되겠지요. 그 다음부터가 가장 기초적인 가족의 바운드리를 넘어가는 삼자와의 관계인 삼촌이 시작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 안에서 가족이 되는 모습을 한번 보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로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났습니다(엡2:5). 그리고 모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을 살아갈 존재들입니다(엡2:6).
지금 이 땅에서 몇 년 동안만 아니라
함께 영원히 우리의 진짜 본향 집에서 영생을 누릴 가족들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구원 받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가족이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을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 되라고 얼마나 하나님은 강조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일 수 밖에 없는 둘째 이유는 엡4:4절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한 소망 안에서 불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소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비해 두신 구원과 영생입니다. 결국
하나됨이라는 의미는 구원과 영생이라는 같은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우리가 품은 같은
소망이 우리를 하나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사실 성도가 같은 것을 찾기 힘듭니다. 다 다릅니다. 사는 방식들이 다르고, 살아 왔던 배경도 다릅니다. 피아노를 예배당 오른쪽에 왼쪽에 놓을 것인지부터 시작하여 의견들이 다 다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녹여 버리는 것이 바로 한 소망이라는 단어입니다. 세상에서
소망이라는 말은 반드시 일어나기를 바라지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사용하는 소망은 구원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소망 품고 하나됨을 지켜 나갈 때 성도가 얻게 되는 복을 엡4:3절은 ‘평안의 매는 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이미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들었기에 우리는 평안과 평화를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는
획일화가 아닙니다. 다들 서로 다르지만 성령이 하나 되게 줄로 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을 들여다 보면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유함과 평등을 누리며 조화를 이루어 내는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부터는 성령이 이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어떻게 우리가 지켜 나갈 수 있을까를 살펴 보려 합니다.
엡4: 2절은 3가지를 제시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에베소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일치를 방해했던 요소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한 신앙 생활의 덕목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교만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을
가려 버립니다. 정확히 말하면 내 눈 높이가 상대보다 훨씬 높아 상대가 안 보이는 것이지요. 때로는 하나님도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교만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겠습니까?
한국말 성경은 전부 ‘겸손’으로 번역했고, NIV: humble, NASB: humility로 번역했는데 KJV만은 lowli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잘 번역 되었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원어적 의미가 바로 ‘낮추는, 기어가는, 천한’이라는
뜻을 나타내며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자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헬라인들은
‘겸손’을 자신들의 덕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영웅주의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헬라인들에게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떨까요? 말로는 겸손을 앞세우지만 교회 공동체의
삶에 나타나느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것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당시 세계관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비어 종의 형태로 오셔서 인간을 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낮아지심/비하’(humiliation)라고 부릅니다.
빌2:6-8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겸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겸손이 가능한 것은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죽어가는 자들을 향한 사랑이
없으면 누가 대신 죽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기차 건널목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귀가 들리지 않는 소년이 놀고 있었고 기차는 달려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보고 있었지만 아무 달려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은 예외였습니다.
아들을 밀쳐내고 대신 죽은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인간은 인간이 처한 형편에 안타까워하긴
하지만 희생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 많은 지혜자들이 있었습니다.
고상한 가르침으로 인기와 사랑을 누린 종교 창시자란 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살리고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결국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하나님만이
사랑이시고,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이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신앙 공동체에서는 누가
낮추어야 할까요?
덜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자가 낮추어야 합니다. 덜 배운 사람이 아니라 더 배운 사람이
낮추어야 합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 낮추어야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도 종의 형체인 인간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피조물들과 하나됨을 이루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 가을학기는 팬데믹으로 정말 적은 학생들이 캠퍼스에 와서 힘든 학기를 잘 보내고 있습니다. 다들
어려운 가운데도 도시락을 만들어 청년들에게 섬겨주신 여선교회에 다시 한번 더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제한들이 있지만 집을 오픈하고 사람들을 초대해 주시고 음식을 나누며 섬겨주신 많은 성도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내년 봄 학기에는 더 많은 학생들과 성도님들이 이타카로 올 것입니다. 늘 우리가 해 왔던
것처럼 오래된 성도가 이제 막 교회를 찾는 성도를 섬겨야 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메일이나 교회
게시판을 통해 문의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친절하게 질문에 안내를 돕는 일부터 그분들을 직접
도와 드리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타카에 우버도 택시도 있습니다. 그러나 낯 설은 곳에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기다려
주고 라이더를 제공해 주는 친절한 겸손을 베푼다면 정말 아름다운 사랑 아니겠습니까? 겸손히 섬겨 주시는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교회 공동체를 찾고 믿음으로 하나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됨을 지키는 성도의 둘째 덕목은 ‘온유’입니다. ‘친절한’ 또는 ‘너그러움’을 의미합니다. 결코 연약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한 자가 자신을 절제함으로
부드럽게 사람을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이나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성품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온유함은 신앙생활에서 ‘용서’로 나타납니다. 남의 잘못에 대해 나무라거나 벌줄 수 있는 자신의 권리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게 대하며 용서해 주는 모습입니다. 정말 용서가 필요한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긴 하지만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수와 허물과 잘못이 많은 곳이 교회입니다. 이런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워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 모습을 보면, 누군가 실수라도
하면 성도일수록 용서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들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온유’입니다. 온유는 자신이 가진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 ‘약하다’니 ‘남들이 얕본다’고 조언을 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부터 생겨나는 본능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절제로 이겨 가는 사람입니다. 한
성경의 인물을 보려고 합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열정을 참지 못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40년의 광야훈련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했을 때 그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배고프다 목 마르다
고기가 먹고 싶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봅니다.
말 안 듣고, 마음에 안 드는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백성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 그 논쟁을 듣고 판단하는 최고의 재판관이었습니다. 그의 손에 든 지팡이는 홍해를 가르는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높이 들고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고 원망하는 사람들에게 경고 한마디만 해도 그들은 모세를 ‘신’처럼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늘 자신의 생각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회막 안으로 나아가 앞을
가로막는 적군들과 전쟁을 하러 나갈 것인지도 묻습니다. 물이 없어도 묻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입니다. 바보 같습니까? 아닙니다. 최상의
행동이고, 문제를 푸는 지름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러므로 온유는 우리가 가진 좋은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지는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진정 나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순종의 사람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손해를 보고, 남들에게 자신이 좀 어수룩해 보일지라도 말씀이 우선이면 그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결국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말씀 앞에서 절제하기에 공동체를 분열이나 파괴로 몰고 가지 않습니다. 접착제와 같이 믿음의 공동체를 하나님과 잘 연합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모두가 자신이 가진 권위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공동체는 서로 대립되고 분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남들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줄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는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 앞에서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분명 세상에서 말하는 갑임에도 불구하고 을을 배려하며 그들의 형편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넘어서 권력을 남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절제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성도를 세상은 존경할 것입니다. 상처 받은 사람들이 온유한 자들을 통해 치유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우리 공동체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온유 하라’는 말은 약자의 비굴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한 자의 부드러움입니다. 주인에게 길들여져 자신의 힘을 통제할 수 있는 강함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이 다들 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를 하나되게 유지시켜 나가는 것은 ‘오래 참음’입니다. 인내입니다. ‘인내’는
하나님이 가진 성품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인내는 교회 공동체가 하나됨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며 이루어져야 한다고 엡4:2절 하반절은 말씀합니다. 오래 참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우리 아이들 말 안 듣는 것 그대로 용납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이상 너는 내 자식 아니라’ 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늘 우리의 모습이
서로에게 화가 나고 때로는 힘들게 받아들여져도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모든 공동체는 있는 그대로를 용납하고 기다려 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인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인내는 못 참고 내가 심판자가 되어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결정이 나기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마지막 때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좋은 훈련입니다. 정의와 공의보다, 선보다 악이 더 설치는 세상 속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고, 참아내는 ‘인내’뿐이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을 지내면서 우리가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인내입니다. 언젠가는 백신이 나온다는 소망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부터 영국과 미국에서 백신을 배포하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내는 그냥 먹을 것 실컷 먹고 잠잘 곳 찾아 봄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하고 겨울 잠을 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엡 4:2
하반절은 사랑하며 인내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를 용납하기 위함입니다. 사랑 없이는 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잠시 못 가 인간적인 폭발을 하게 됩니다. 그때 듣게 되는 것은
‘나 많이 참았다’는 소리입니다. 정말 사랑 가운데서 참으면 오늘 말씀처럼 용납이 결론으로 나오게 됩니다.
용납은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수용이고, 타인의 잘못에 대한 용서입니다. 서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더 긴 만남을 이어가게 합니다.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닙니다. 넉넉히 견디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한 가지는, 속으로 계속 마음 상하면서 참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참게 됩니다.
견디기 힘들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 모두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 주님의 마음을 품기를 도전 드립니다. 이것이 하나 된 공동체를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참아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견뎌주고, 사랑하기 때문에 미움을 뒤로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하신 3가지, 겸손과 온유와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이 아름다움이 없이는 어떤 공동체든 하나되게 하신 것을 유지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엡4:3절 후반부는 ‘힘써 지키라’고 말합니다. ‘노력하라’ 보다
더 강한 어조입니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진지하고 열정 어린 태도를 요구합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매우 급박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이미 하나 되게 한 것을 힘써 지키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