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7): 만물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  

1:22-23; 4:15-16

 


지난 주 엡1:20-23절에서 하나님 능력에 대해 말씀을 나누다가 마무리를 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리마인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죽음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장차 부활 때 우리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미 이 땅에서 죽고 사는 부활을 거듭남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이 모습을 롬 6:10-11절은,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죽음 가운데서 살린 예수를 모든 것 위에 높이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어 있기에 성도 역시 높임을 받게 됩니다. 벧전 2:9절처럼 이 땅에서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22:5 하반절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영원히 왕 노릇하도록 높여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성도는 이 높임의 약속을 믿을 때 이 땅에서 겪게 되는 고난도 슬픔도 아픔도 눈물 조차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할지라도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히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높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성도들을 반드시 높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되는데요. 1:23절의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라는 말씀 가운데서 보게 됩니다. 20절부터 시작한 그의 능력즉 하나님의 능력은23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능력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왜 만물에게 충만함이 필요할까요? 태초에 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으로 덮인 이 땅을 말씀으로 창조하시면서 충만케 하셨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창조세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하나님은 다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수고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품고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후 저주를 받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타락 이후 만물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롬 8: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타락하자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까지도 악의 지배를 받아 지금까지’(재림 시까지 되겠지요) 고통 가운데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만물에게 일어나는 것은, 만물의 지배자인 인간이 타락하고 그 지배권을 사단에게 빼앗긴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8:21절은 이 모습을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1) 피조물들의 회복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2)하나님 자녀들이 구원을 통해 영광을 회복함으로 피조물도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3)인간이 먼저 회복 되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 우주적인 요구인가를 또한 알려줍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충만케 한다는 것은 인간 구원과 그에 따른 우주 만물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만물의 회복된 모습을 계21:4-5 상반절의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만들어진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전혀 다른 하늘과 땅이 주어집니다. 그곳에는 다시는 눈물과 사망과 질병으로 아픈 것들을 경험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재 이 땅에서는 그런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는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 함께 계시지만, 21:3 하반절에 의하면 새 하늘과 땅에서는 하나님은 친히 우리들과 함께 계셔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계 21:3 하반절 말씀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이나 미래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대상이고, 축복의 대상이며, 위로 받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관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 21:22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다시는 죄 짓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죄를 속량하는 장소인 성전이 필요 없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제일 좋아합니다. 예수 믿고 제일 좋았던 것이 있다면 죄 용서함 받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영원히 사망 가운데 있어야 할 심판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16: 24절에서 보여주듯, 죽어서 영원을 불꽃 가운데 갈증으로 목말라 해야만 하는 영벌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것 아닙니까? 사실 너무나 기쁩니다. 예수 믿고 병도 낫고, 부자도 되고, 명에도 누리며 살아야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 보다 더 근본적인 즐거움은 십자가의 보혈로서 죄 용서함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개인적으로 괴로운 것도 있습니다. 여전히 내 속에 아직 습관처럼 남아있는 죄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괴로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배고픔도 아니요, 좋은 직장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내 속에 남아 사람들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본다면 성도는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마음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조건이 아닌 성숙된 신앙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지속적인 도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성경읽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읽는 것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에는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 지식이 삶에서 실천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교회에서 성경일독을 하는 분들이 어느 정도 참가하게 되면, 말씀 묵상 나누기 팀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읽고 은혜를 나누는 수준을 뛰어넘어 정말 하루를 살아가면서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죄까지도 나누고 서로 기도해 주는 그런 모임이 될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모임이 만들어질 날을 생각하면서 매일 혼자 말씀을 묵상하시는 분들은 지속해 나가기 바랍니다. 은혜 되는 것을 찾고,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구체적인 적용들을 매일 기록하며, 점수를 주면서 하루 하루를 일기를 쓰며 훈련해 보기 바랍니다(신성일: 앙의 숙을 위한 ).

 

1)             나는 매일 아침마다 주님 사랑해요라고 외치며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는가? 2)매일 말씀을 정한 양 만큼 읽고 있는가? 3)찬양을 한 곡이라도 내 입술에 담고 있는가? 4)하루에 한번 반드시 기쁘게 웃고 미소 짓는가? 5)한 가지 감사를 실천하고 있는가? 6)누구에게든지 미운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는가?

 

7)나의 건강을 위해 나름대로 적당한 운동을 했는가? 8)전도하려는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도전하고 있는가? 9)자기 전에 하루를 되돌아 보며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들을 회개 기도를 드리고 잠자리에 들어가는가? 10)잠자는 동안 주님 안에서 잘 자고 피로가 회복되고 아침에 일어나게 기도하는가?

 

이런 모든 것들이 성도에게서 가능한 이유는 바로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생각나게 만들고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에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이 땅에 살아가면서 거룩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은 날마다 성숙한 신앙을 추구하며, 멋지게 인생을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속에 허물이 발견되고 죄가 있을 때, 철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다시 죄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시간 주 안에서 이 마음 달라고 결단 하는 이 시간 될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나누면서 마음 속 한 구석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나눈 것들이 주로 죽음 이후 아니면 주님 재림 이후 당연히 믿는 우리들에게 일어날 충만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만물을 충만케 하느냐에 관해 더 듣고 싶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 에베소서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우리의 첫 관심은 하나님은 어떻게 만물을 충만케 하실까요?’ 입니다. 1:22절의 상반절의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라는 말은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주의 통치자로 삼으십니다. 1:22절 하반절에는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1)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2) 만물 가운데 그리고 만물 위에 교회를 두었습니다. 3) 그 교회의 머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삼으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만물 위에 교회가 있고, 교회 위에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구조를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만물 가운데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23절처럼 만물을 충만케 하기 위함입니다. 만물 가운데 채워져 있어야 할 것들이 비워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충만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교회가 감당하는 역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교회는 무엇을 만물 가운데 채우는가?’ 라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첫째, 세상은 빛이 없어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빛으로 어둔 세상을 채웁니다. 이 일을 하도록 성도를 빛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셨습니다. 혼돈과 공허함과 흑암이 있는 세상에 빛이 있게 만드셨습니다.  

 

빛은 밝게 비추는 역할도 하지만 경고의 의미도 있습니다. 등대의 빛이나 활주로에 안전등이 없다면 배나 비행기들이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세상에 죄가 가득해질 때 경고 해주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경고로 그치지 않고 안전하게 배가 항구까지 도착하고, 비행기가 잘 착륙하게 돕는 역할까지도 하게 됩니다.

 

세상이 죄로 혼돈 속에 빠져 있습니다. 공허함으로 하나님 아닌 허무한 다른 것들을 추구합니다. 어둠 속에서 헤메고 있는 세상에 우리가 빛이 되어 십자가를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천국 문까지 도달하는 길을 밝혀 비추는 사명이 저와 우리 성도님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비추는 불빛을 어떻게 하면 우리 스스로가 꺼버리게 될까요? 성령 충만을 상실할 때 입니다. 교회는 성령충만 위해 전도와 선교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충만케 되는 때는 대부분 교회나 개인이 생명을 살리는 전도나 선교 현장에서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향해 비추는 빛을 꺼버리는 일은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을 따라갈 때입니다. 진리를 부인할 때 불빛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속에 죄들이 생겨나서 죄가 불빛을 가리우게 될 때 우리는 세상에서 빛이 되는 역할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지를 닦듯이 교회는 빛이 세상에 잘 비추어지도록 죄에 대한 회개가 철저해야 합니다.

 

둘째, 교회는 거룩으로 세상을 충만케 합니다. 성도는 소금입니다.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거룩을 상실해 갈 때, 거룩을 유일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늘 우리를 죄에서 정결하게 씻겨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거룩을 세상에서 충만케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성도들 때문에 유지 되는 것입니다.

 

그 예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킬 때 하나님이 의인을 찾으셨던모습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회가 수난의 시대를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까지 나와서 교회 무용론까지 대두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성도들 가운데도 이런 질문들을 쏟아냅니다.

 

1)왜 교회에는 죄와 허물과 악이 존재하느냐? 고 묻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를 비유할 때 종합병원으로 비유합니다. 병원에는 진단에서부터 여러 병명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일단 뭔가 몸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 오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곰팡이에서부터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득실거리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2)그렇게 위험한 교회를 왜 당장 없애 버리지 않느냐고 강하게 비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발견된다고 해서 병원 자체를 없애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번에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지나다 보니 병원도 뚫린 적이 있습니다. 일정기간은 폐쇄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가야 다시 환자들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자신은 이미 가나안 성도가 되어 혼자서 인터넷으로 예배 드린다고 합니다. 사람 안 만나고 편하게 지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배는 성도 자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문제 삼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팬데믹으로 병원에서도 영상으로 환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급상황이거나 처음 병원을 찾는 분들은 대부분 직접 의사를 만난다고 합니다. 영상이 아무리 은혜가 되더라도 대면으로 만나서 친교와 구제와 봉사와 전도와 선교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4) 교회 안에 악이 득실거리고 죄가 쏟아지고 부정이 넘쳐나는 그런 교회를 당장 왜 안 떠나느냐고 질문합니다. 아파 죽게 된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병이 진행되고 있는 사람은 더 악화 되어 거의 죽게 될 때 엠브런스에 실려 다시 병원으로 돌아 올 것입니다.

 

몸이 아픈 것 같아 검진 받으러 병원에 들어 왔다가 사람에게 해로운 균 하나 발견 되었다는 안내 방송을 듣습니다. 그 길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다시는 안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간단히 고칠 수 있는 병이나, 초기 대응만 잘하면 잡을 수 있는 병도 치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는 불치병인지도 모르고 죽어 가야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5) 교회는 다 같이 하나님 믿는데 내 교회 네 교회 따지지 말고 편하게 신앙 생활하면 어떻냐고 묻습니다. 주치의는 내가 이사를 가거나 사정에 따라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늘 어느 곳에 가도 주치의는 있습니다. 그 말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나를 아는 잘 아는 영적 지도자와 한 믿음의 공동체를 섬기는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있고,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관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세상 한 가운데서 무질서와 공허함과 어둠을 물리치고, 생명이 만물 안에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만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고 구원을 허락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해 기쁨을 상실한 곳에 찬양이 들려지게 해야 합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하심의 능력을 맛보게 하여야 합니다. 미움으로 서로 만나지도 않고 말도 안하고 원수처럼 살며 다투고 전쟁이 있는 세상에 평화를 심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속이고 어린이들과 여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세상 속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게 해야 합니다. 자신의 배부름에 만족하며 사치와 부를 누리며, 이웃을 돌보지도 않는 세상에, 교회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배부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죄로 죽어가는 세상에 구원을 충만케 하는 일에 올인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교회를 만물 가운데 두셨습니다. 교회를 통해 진리와 생명이 충만해지도록 그리스도가 친히 머리가 되셨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수가 이 땅에서 충만케 되는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하는 코넬한인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