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6): 하나님의 능력  

1:19-22

 


성도님들에게 하나님 믿으시는지요?’ 라고 물으면 즉각 아멘으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능력도 믿으시지요?’ 라고 물으면 대답이 조금 늦어집니다. 다음으로, ‘실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 본 적 있을 줄 압니다. 있으시면 나누어 주시지요?’ 라고 하면, 답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능력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 많은 기적들이 다 하나님 능력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나와 관련이 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이 있을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는 이유는 또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능력을 생각할 때, 병 고침이나 기적 같은 일들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남들 간증이 더 생각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내 삶의 다양한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님들의 하루를 한번 보기 바랍니다.

 

아침에 우리 눈을 뜨게 하는 것부터 하나님의 능력 아닐까요? , 매일 일어나는 일들을 감당하도록 건강 지혜 능력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게다가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쉬게 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능력 아닙니까? 너무 우리가 하나님 능력을 치유나 기적에만 제한시켰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어려운 문제까지 응답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능력에 대해 제대로 다 말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능력이 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엡1:19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크심을 알기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능력에 대해, 1:20-23절은 세 가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들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예수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를 높이는 하나님의 능력, 마지막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마지막은 다음 주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1:20절에서 죽음 가운데 있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먼저 언급됩니다. 사실 부활은 이 세상 어떤 사람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직접 본 사람들 조차도 자신들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유일무이한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세상은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성도의 부활도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살아난 예수를 직접 보고도, 증인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인간의 억척입니다. 또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이며, 인간 자신의 한계에 대해 겸손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부활이 있다는 것을 성경과 증인들이 전하는 것 외에 증명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의 변화된 삶 그 자체가 부활이 있음을 세상에 알리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부활은 우리 믿는 사람의 구원 그 자체를 통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구원에는 나의 죽음과 부활이 있습니다. 먼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옛 자아가 죽습니다. 이 죽음의 경험을 벧전 2:24절 상반절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담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로 죽었던 나를 예수 안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이것을 벧전 2:24 하반절은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 과정에서 일어나는 부활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면, 예수에게 일어난 것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남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롬 6:10-11절은,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분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성도가 거듭난 뒤에도 죄를 짓고 넘어지는 불완전이 있다고 하면서 어찌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따지는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나중 재림 때에 완성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완전히 죄를 짓지 않는 존재로 변화될 것입니다(구원의 완성인 영화, glorification).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에게 남은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완성 되기 전까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로부터 해방 되긴 했지만 날마다 우리의 옛 방식을 거부하는 전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롬 6:12-13절은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읽긴 했지만 이해하기 참 힘이 듭니다. 간증 같은 부가적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먼저, 우리 몸에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우선 나의 약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점을 향해 달려드는 유혹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죄의 욕망에 맞서기 바랍니다.

 

맞서는 방법은 우선 유혹의 근원이 되는 것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 오락, 도박 등이 나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그 유혹의 근원이 만약 친구(인터넷)라면 그 친구를 멀리해야겠지요. 다음은, 자기 절제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락을 즐긴다면 의지를 가지고 그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좋은 습관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 이미 시도해도 실패했기에 나쁜 버릇까지 생겨났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의지해야 하는 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은혜가 나에게 부어지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의 유혹 받는 마음을 다스리도록 성령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 말은 죄에게 계속 따라 가야만 했던 과거의 종에서 실제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죄에 대해서 ‘No’라고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에 종이 되었던 과거와는 전혀 다르게 나 이제 더 이상 죄 짓는 것 안 하고 싶어라고 당당히 사탄에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즐기는 분들이 이제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았기에 죄를 거절하는 능력이 우리 속에 주어졌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당당하게 거부하기 시작하면 사탄도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속에 임재한 성령님께 더 의지해야 합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님은 죽음에서 예수를 일으키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계속 이 분을 부르고 의지하게 되면 깡패 같은 사탄도 시퍼렇게 눈뜨고 지켜보는 경찰 앞에서 나쁜 짓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유혹이 접근하면 도와 달라고 긴급 요청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죄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나님은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죄의 유혹 가운데 있는 내 속에 새 일을 하도록 바른 동기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은혜만이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우리들에게 베푸시기에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힘으로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내려 놓을 때 은혜가 우리에게 더 부어집니다. 두려움과 죄책감과 심판을 가져오는 죄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무장해제를 당합니다. 손을 놓고 물러 갑니다. 죄는 우리의 완벽하지 못한 틈을 타고 들어와 우리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죄의 종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낭패와 실패 좌절이 있는 곳에 사랑을 가지고 와서 소망을 키워냅니다. ‘너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너도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을 부어주십니다. 넘어진 자, 쓰러진 자를 위로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 모든 것이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에게 베푸는 능력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20절 하반절부터 22절 상반절을 보면, 죽음에서 살린 예수님을 이제 하나님은 자기의 우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하십니다.

 

2: 6-7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십니다. 그리고 만물 위에 두시고 모든 피조물들을 주의 발 아래 복종케 만드셨습니다.

 

확실한 승자만이 모든 것을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죽음을 정복한 그리스도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높이신 하나님이 주님과 연합된 우리들 역시 높여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2:5 하반절을 보면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간 성도들을 영원히 왕 노릇하도록 높여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성도는 이 약속을 기대할 때 이 땅에서 겪게 되는 고난도 슬픔도 아픔도 눈물 조차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할지라도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히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높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도 함께 반드시 높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신 원래 자리로의 회복입니다. 드디어 창조의 완성을 이루는 마지막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인간타락으로 실패로 끝나지 않았음을 세상에 알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하나의 실수도 없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심판이 있기까지 세상에서 주인 노릇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하나님이 허용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 역시 심판을 받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오명을 받으며 예수를 구원자로 믿었던 것이 진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억울함을 참다 언젠가 그 진실이 드러날 때 느끼는 기분을 아시는지요?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될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창조가 어디 있느냐? 과학과 인간 이성이 하나되어 진화가 맞다고 외치던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고 외쳤던 그들은 높은 곳에 앉으신 주님 앞에 떨며 설 것입니다.

 

그들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게 될 지옥의 유황불을(20:10) 바라볼 것입니다. 그때 지옥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라 죄인들이 영원을 지낼 곳이며, 멸망 받을 자들이 가야 할 실제 장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편,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 높임을 받은 성도들이 누릴 복들이 계 21:3-4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친히 준비한 장막에서 그분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영원히 함께 거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 때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었습니다.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하늘과 땅에 따로 살면서 하나님이 땅에 사는 우리를 방문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우리들은 홀로 있으며 하나님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던 외로움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별하며 애통하고 곡하는 아픈 마음이 사라집니다. 밤새도록 고통 가운데 눈물 지었던 날들이 지나갑니다. 끝까지 주를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 능력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땅에서 하늘로 높임을 받는 존재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인다는 의미를 이제 정리해 보면 무엇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높은 자리에 올려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록 지금은 낮은 이 땅에서 살지만 나중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서 누릴 그 영적 축복을 지금 사는 이 자리에서 누리게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 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영광 누릴 수 있도록 예수가 인간으로 오셔서 그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에서 심판 받는 대상으로 몰락시켰습니다. 생명에서 사망으로 떨어뜨렸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사망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 올리셔서 천국에서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은 곳으로 우리를 찾으러 직접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지옥에서 가장 높은 천국으로 우리를 데려가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처럼 낮은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성도는 주님처럼 사명 감당하는 낮은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드리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는 세상 사람들이 탐내는 자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권력이 있는 곳도 아니고 부귀를 누리는 자리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눈이 머물며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그 자리에 와 주기를 바라는 자리입니다.

 

낮은 곳이고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좁은 길에 놓인 자리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늘 보좌와 연결되어 있는 그 자리에 가기를 사모하는지요? 섬김의 자리요. 구제와 봉사의 자리입니다. 늘 나보다 남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희생의 자리입니다. 때로는 내 것을 다 내어주고 억울함도 덮어 써야만 하는 수치와 고난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비어 있을 때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부를 것입니다.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낮은 그 자리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서겠습니다. 이런 귀한 고백이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코넬한인교회 성도들이 될 줄 믿습니다.

  

목회하면서 늘 저는 놀랍니다.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늘 그 자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능력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보답을 다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2:6절을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일으키고 하늘에 앉히신다고 말합니다.

 

죽은 예수를 일으키시고 높이신 하나님의 능력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를 일으키고 높이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부르심을 받은 이 땅에서 더 큰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주의 사역에 임하게 만들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에도 성도들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담대히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더욱 주의 뜻 이루어 나가는 교회와 성도들 되게 할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이 팬데믹을 지나는 성도들 심령 속에도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힘든 가운데도 우리에게 힘 주시고, 어려움 헤치고 나가도록 능력 허락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물질적으로 심리적으로 위축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울한 마음이 들면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내가 장차 주님과 함께 앉을 승리의 자리를 소망 가운데 꿈꾸어 보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으로, 주님 만날 때까지 우리를 붙잡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있는 물질 걱정, 사람 걱정, 건강 걱정, 결혼 걱정, 인턴 걱정, 직업 걱정, 미래 걱정, 자녀 걱정 모든 것을 다 뒤로하고, 먼저 내가 지금 예수 안에 거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누리는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