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4):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  

1:7-12

 


먼 곳에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다른 나라에 가서 가꾼 농장을 꼭 가 보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혼자 낯선 곳을 여행하면서 겪게 될 모든 어려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떠나는 날에 문 앞에서 가장 급할 때 사용하라고 비상금까지 챙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이 나라의 왕이 만든 길만 따라 가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길을 가면 절대로 집으로 돌아 올 수 없다고 단단히 일렀습니다(이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해당되겠지요). 아들은 아버지 말을 꼭 지키겠다고 약속을 아버지와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서로 의지가 되도록 친구와 같이 가도록 했습니다. 이들이 집을 나서자마자 한 사람을 만납니다. 여행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이었습니다(사탄). 가까이 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일러 주는 길을 가면 더 많은 것을 보고, 쉽게 빨리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유혹).

 

경험도 많아 보이고 말하는 것이 너무 신뢰가 갔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고후 11:14절처럼,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우리를 유혹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친구가 먼저 경비도 줄이고 더 좋은 경험을 할 것 같으니 그 사람 말 듣자고 합니다.

 

친구 말 들어 보니 손해 볼 것도 없어 두 사람은 그 사람이 가르쳐 준 길을 가게 됩니다(불순종). 그런데 그 이후부터 길을 잃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겨우 도착한 곳이 죽음의 계곡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해준 것과 전혀 다른 길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계곡을 건널 수 있는 다리조차도 없었습니다.

 

완전 절망입니다(죄가 들어온 인생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후회). 너무 긴 시간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집에서는 아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할 정도입니다. 돈도 얼만 남지 않았습니다.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을 지경입니다.

 

어느 날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선불지급이라고 해서 미리 돈도 주었습니다. 집에 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다리는 없었습니다. 사기였습니다. 돈만 받고 도망가 버렸습니다(진리로 가장해 세상에 나온 이단과 사이비를 말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비상금뿐입니다.

 

다시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다리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준다는 사람을 만납니다. 돈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조금 고상한 사상/종교들). 지난번 보다는 훨씬 착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비용은 확인 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믿을 만 했습니다. 그는 확실히 다리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도덕적 삶으로 신뢰). 

 

너무 감사해서 몇 번이나 절을 했습니다. 생명의 은인처럼 느껴집니다. 눈으로 다리를 확인했기에 가지고 있던 비상금을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날이 어둡고 피곤하니 일단 잠 잘 곳부터 찾자고 했습니다. 자신은 다리 근처에서 자고 내일 떠난다고 했습니다. 같이 가서 마지막 밤을 보내자고 제안했습니다(세상 끝까지 안심은 줄 수 있을까?).

 

비상금 마저 주어 돈도 없었습니다. 하룻밤만 참으면 될 것 같아 다리 입구에서 잠을 자겠다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드디어 내일 아침이면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잠이 안 왔지만 늦게라도 잠을 청했습니다. 아침이 밝자 해가 정면에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출발을 축복이나 해주듯 말입니다.   

 

다리만 건너면 아버지 집이 있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 다 놓고 출발을 합니다. 너무 기뻐 걸어 갈 수 없어 뛰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달렸을 때 죽을 뻔한 일이 발생합니다. 다리가 뚝 끊겨 있었던 것입니다. 햇빛이 바로 앞에서 너무 강하게 비춰 손으로 앞을 가리고 달려오던 터라 하마터면 떨어져 죽을 뻔 했습니다.

 

다리는 분명했지만 자신들이 선 곳까지만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철학/종교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결코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음의 문으로 그냥 혼자 들어가라고만 말합니다. 뒷일은 자신도 책임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이 땅에서 바르게 살았으니 잘 될거야! 이 정도이지 확신은 결코 주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실망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돈 벌어 다리를 조금만 더 보수하면 완성될 것 같아 보였습니다(은혜가 아닌 행위로 구원받는 다는 세상 모든 종교). 일단 돌아서서 먹고 살 일자리를 찾아 다녔습니다. 아무도 나그네들을 고용해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 저기 구걸하며 거지로도 살았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을 모은다는 농장 소문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건강한 몸이 있어 열심히 일하면 돈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농장 주인을 만나는 순간 거의 기절할 뻔 했습니다. 집을 나선 후 제일 먼저 자신들에게 다른 길을 소개한 그 경험 많아 보이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순간 거짓말쟁이라고 소리치며 달려 들었습니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입니다(사탄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주인 옆에 있던 종들 때문에 꼼짝도 못하게 붙잡혀 버렸습니다. 더 놀란 것은 자신을 붙잡는 사람들이 전부 앞에서 다리가 있다고 속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마귀, 귀신들 그리고 그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영적 상태입니다. 이것을 엡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때는 예수를 모르고 살던 때를 말합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면 인간은 다른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종이 되어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하게 되면, 1:7절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알기 전의 내 삶의 처절함을 알 때 구원 받은 성도에게 나타나는 것들이 있게 됩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과 감사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성화의 삶이 날마다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그 삶을 맛보고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진정한 주인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농장 주인은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이들을 목숨은 살려 주었습니다.하지만 자신을 칼로 죽이려고 했던 죄값으로 평생 자신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풀려날 수 있는 길은 농장 주인이 요구하는 돈을 다 갚으면 풀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용은 죽을 때까지 일해도 못 갚을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간혹 자신이 시키는 일을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귀한 것을 훔치는 일이라고 대놓고 말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을 속여 더 많이 종으로 데려오면 특별 보너스까지 제안합니다. 이들은 그날부터 노예라는 신분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이 쇠고랑은 신비하게도 일단 채우고 나면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제 움직이고 생활하는 데는 너무나 방해가 되었습니다. 족쇄를 차고는 도저히 도망 갈 수는 없었습니다. 다들 쇠사슬이 눈에 보이지 않아 한 번씩은 탈옥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는 날 주인이 불러 가보니 일을 하나 앞으로 시키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간혹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동네에 오는데 골치거리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 처리하면 빚의 반 이상이나 되는 돈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좋은 제안이었습니다.

 

농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 제안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과감히 죽이기도 했습니다. 도망가다 잡히면 독방에 처 넣어 거의 죽게 될 정도로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망 갈 생각도 못하고 고향 집만 바라보다 죽어갔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더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로 인해 멀리 도망 가지도 못하고 붙잡혀 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빠져 나갈 수 있는 길은 주인이 제안하는 특별한 일을 잘 처리해 주는 것입니다. 서 너 건만 처리해 주면 주인의 엄청난 빚을 갚을 수 있는 돈이 마련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사탄은 늘 우리에게 미끼를 던져 유혹합니다).

 

어느 날 농장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 가에서 농장 주인을 향해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소리를 친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몹시 그런 사람이 오면 싫어했습니다(이 세상에 보낸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날 갑자기 주인이 전에 자신에게 제안 한 말이 기억이 났습니다.

 

스스로 주인을 찾아가 그 사람을 잘 처리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농장 주인은 이미 다른 사람이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다음 기회가 오면 하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어떤 사람이 주인으로부터 빚의 반이나 갚을 정도의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농장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것도 주인의 악한 꾀였습니다.

 

절대로 두 번은 그런 일을 한 사람에게는 안 시킨다는 철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갚고 나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런 행운이 오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주인이 일을 시키는 날이 왔습니다. 주인을 악하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다시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사람을 처리하기 위해 다가 갔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자 너무 낯익은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두 사람은 이야기로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임금님을 찾아 아들을 찾아 달라고 울면서 간청을 했다는 것입니다.

 

임금님은 너무 간절한 아버지의 간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백성이기도 한 아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악한 주인이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있다는 것까지 왕이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먼 곳을 여행을 할 때 반드시 왕이 가라고 말하는 길만 다니게 했던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은 사자들을 보내 사람들을 풀어 주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주인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직접 오지도 않는 왕이라고 조롱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자신들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여 이번에는 왕의 아들을 직접 보낸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여기까지는 이 땅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는 구약의 예언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소식을 알리는 고향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 주인은 다른 사람을 보내 그를 처리 했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문제는 시간이 가도 왕자는 오지 않았습니다. 왕자가 너무 오랫동안 자기들에게 오지 않게 되자 더 이상 그 이야기도 믿지 않고 잊고 살았습니다(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인 300-400년의 rs 시간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사도라는 사람이 와서 또 외쳤다는 것입니다(신약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더 놀라운 소문이 추가 되었습니다. 이미 왕자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그 왕자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왕자가 죽은 것은 이곳에서 종 노릇 하는 모든 사람들의 빚을 갚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 자신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날 것이라는 것도 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도록 채워져 있는 족쇄를 다 끊어 버린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실들을 믿기만 하면 악한 주인을 맞설 용기가 사람들 속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악한 주인이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것도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왕자가 죽임을 당하면서 빚을 다 갚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악한 주인 앞에 당당히 나가 이렇게 선포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나의 빚은 다 속량(곧 죄사함) 받았다. 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주인이 더 이상 아니다.”

 

나의 진정한 주인은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왕자님이다.” 이렇게 담대히 고백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던 내 발의 족쇄가 풀린다는 것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나를 구원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속에 생명으로 들어와 자리잡는 것입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 드린 모든 것이 바로 엡1:9절에서 말하는 창세 전에 이미 세우신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에 해당됩니다. 4:4절 말씀처럼 때가 찾을 때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죄에서부터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가던 하루는 왕자가 이곳 사람들을 위해 한 모든 사실을 외치며 죽어가는 전도자를 본인이 직접 보고 듣게 되었습니다. 다시 왕자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였으면 하나뿐인 아들까지 죽이면서 자신들을 구하려는 왕의 마음과 왕자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정말 깨달아 알기 시작했습니다(믿기 시작한 것 아님). 

 

그 사랑을 알고 난 날부터 정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있고, 서로 사랑하고, 해치지 않고, 시기 하지 않고, 오래 참아주고, 눈물을 서로 닦아주는 곳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선한 왕이 아버지처럼 자기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곳이 다시 그리워지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도자가 죽으면서 그에게 일러준 악한 주인 앞에 당당히 서서, ‘나는 이곳을 나가야겠다고 말만 하면 주인은 한 마디도 못하고 당신을 내어줄 것이라는 그 말이 너무 생생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침 일어나 주인에게 나가 그 말을 하려고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아직 마음으로 믿어 입술의 고백이 없는 상태이다). 

 

그러던 어는 날, 갑자기 자신과 동료와 함께 아프기 시작했습니다(우리 삶에 고난이 찾아옵니다). 악한 주인은 약도 의사도 주지 않습니다. 약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죽으라는 것입니다. 친구는 같이 길을 떠나 평생 같이 함께 했고, 위기에도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구해 주었던 동료입니다. 둘 다 같이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악한 주인에게 먼저 가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친구도 왕이 보낸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들었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족쇄가 풀린다는 말은 믿지를 않았습니다(복음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게 될 순간입니다. 밤새 고민하다 주인에게 나아갔습니다. 전도자가 일러준 대로, 악한 주인 앞에 당당히 서서 자신을 내 보내달라고 외칩니다. ‘이미 나는 나의 왕자님이 와서 빚을 다 갚았다. 그리고 이제 나를 살리신 그분이 나의 주인이다라고 힘을 다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점점 굳어지면서 한 마디 말도 못합니다. 그리고는 너무 쉽게라는 말만 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이렇게 진작하지 못했을까? 결국 믿음은 들음에서 났다는 것입니다. 많은 전도자들이 와서 믿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좋은 소식들을 들려주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변한 것입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리까지 단숨에 뛰어 가면서 여전히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족쇄가 진짜 풀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행동이 너무나 자유로 왔습니다. 가슴에는 기쁨이 차고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해방이라는 감격 때문인지 앞을 가릴 정도로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입술에는 찬양과 감사가 넘쳤습니다.

 

전에 끊어진 곳까지 왔다 싶어 다리를 살펴보니 더 이상 끊어진 다리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자세히 살펴 보니 완전히 새롭게 지은 다리였습니다. 이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리는 왕자님이 흘린 보혈의 색으로 온통 칠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리의 칠해진 색으로 인해 달려오는 동안 자신이 입은 옷도 보혈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천국으로 이어지는 이 구원의 다리는 엡1:9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워진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진리의 길입니다.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흘린 주님의 보혈로 속량, 곧 죄사함 받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는 모습입니다. 사탄의 종 되었던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자유함을 얻는 모습입니다. 지금도 예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 너무 많습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만 남았습니다.

 

그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들려 주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없는데 어찌 가족들이, 이웃들이 기쁜 소식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분들이, 그 사랑/ 그 기쁨/ 그 눈물의 감격 잊지 말고, 아직도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더 가까이 다가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