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3): 나에게 아빠가 있어요!  

1:3-6

 


살면서 정말 아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릴 적에 한 번도 아빠라고 불러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엄격한 집안의 문화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버지라고만 불렀습니다. 형들은 그렇게 불러도 저는 막내라서 아빠라고 불러도 될텐데 말입니다. 모두들 아버지라고 부르니 저도 그렇게 불러야 될 것 같아 따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빠라고 불러야겠다고 용기를 가졌을 때는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말들 중에 하나도 아빠입니다. 결혼을 하고 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말하기를 은근히 바랬습니다. 제 기억은 엄마보다 분명히 아빠를 먼저 말했다고 기억이 됩니다. 

 

아마 아내는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보고 아빠라고 불러줄 때 정말 눈물이 났습니다. 지금도 아이들이 아빠라고 하면 화가 다 풀립니다. 그리고 얼굴 찡그리던 것 다 없어집니다. 혼내고 싶은 것 거의 사라집니다. 정말 신기한 마술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식구들은 아직 저의 비밀을 모릅니다. 

 

오래 기다리던 부부에게 아이를 가진 기쁨이 지금도 남아서 그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제가 불러 보지 못했던 아빠라는 소리에 대한 감정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이후 기도할 때 놀라운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방언 기도를 할 때면 아버지 대신 늘 저는 아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엄청 아빠 부르고 난 뒤 기도는 이렇게 이어집니다아버지 모든 것 알아서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해 손을 털어 버립니다. 그러면 거짓말같이 내 마음에 평강을 찾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몰려 왔던 근심이 줄어듭니다. ‘내게 어떤 일이 다가와도 상관없다는 안정감이 몰려 옵니다.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저는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 음성 그 자체를  들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시고 알아서 처리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일어납니다. 제가 할 일은 그냥 아버지 이것 큰일 났어요. 도와주세요. 그러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왜 고민하고 걱정해야 합니까? 고민한다고 될 문제면 왜 하나님이 필요합니까?

 

내 손으로 그냥 하고 말지요. 내가 못하는 것이고 안 되기 때문에 아버지 찾아가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아버지께 맡겼다면 우리가 할 일은 나아가 계속 묻는 것입니다. “언제 되지요? 왜 안 되지요? 이렇게 하며 안될까요? 다윗은 되고 왜 나는 안 됩니까? 나는 하나님 아들 아닌가요? 아니라면 지난번에는 왜 내 귀에 말씀까지 들려주셨습니까?” 이런 말들로 묻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아 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의 물귀신 작전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근성을 은근히 타고난 것 같습니다. 조카 롯을 구하려는 아브라함의 기도 모습을 보기 바랍니다. 별 내용 없습니다.

 

18:23절을 보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것뿐입니다. 50에서 45, 40, 30, 20, 10명으로 묻습니다. 이 모습이 야곱이 천사를 가지 못하게 잡고 늘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18:33절에서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로 되어 있습니다. 얍복강에서도 천사는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32:26절에,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뭔가 공통점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늘 분주하십니다. 그러나 분주해서 분주한 것이 아닙니다. 또 급히 떠나려는 것도 사실 아닙니다.

 

아빠 간다 빨리 메달려라는 뜻입니다. 회사 가는 아빠보면 아이들은 일단 출근 못하게 가로막고 붙잡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가 아이와 같이 달려 오기를 바랍니다. 아빠를 붙잡기 원합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따지고 들면서 간청하기를 원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하나님 앞에서만큼은 어린아이가 다들 되시기 바랍니다.

 

좀 성장했다고 폼 잡는 순간 이제 너 아이 아니쟎아 네가 알아서 해야지.’ 이것은 육신의 아버지가 하는 말입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이 땅의 육신의 아버지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에게 스스로 책임지고 살라고 말할 때 우리 믿음의 아버지들은 이제 너 진짜 하늘 아버지께 구하며 살아야 되라고 자식들에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대학가면 너희들이 책임지고 살 준비 하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 그 말 할 때 저도 이제 너희들도 영적 아버지인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아야 해라는 말을 단단히 해 주는 것을 잊었습니다. 이번에 집에 아이들 오면 꼭 그 말을 다시 해주려고 합니다.

 

46:4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백발이 되기까지 우리를 품고 업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의 힘든 삶에서 보호하시고 위험한 길에서 지키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의 부모님은 재력적으로도 한계가 있습니다. 나이가 드시면 자녀를 돕는데 체력적으로도 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시고 창고에 넉넉함이 줄어들지 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 나라에 오기 전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자녀들에게 가지고 계신 것들을 다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또 이 땅에서 수명을 다해 하늘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도 영원히 함께 하시며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보다 앞선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 땅에서 살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들에게 풍성히 나눠주고도 남은 것들이 우리 앞에 또 풍성히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다 우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하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7:7-8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 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은 주실 것도 약속 하지만 주실 분에게 먼저 구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어 마7:11절은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내가 구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주십니다. 본문 말씀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대로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땅이 제대로 작동 하겠습니까? 이기적인 인간으로 인해 더 가지거나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세상은 싸움판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이제, 우상이나 다른 신들에 대해 보려고 합니다. 우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준다는 생각을 사람들이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가 봅니다. 그러나 우상은 우리가 구하는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줄 무언가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46:6절을 보면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우상들은 사 46:7절에 의하면, “그것을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여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우상을 이용해서 점을 친다. 복을 준다는 것은 속이는 것입니다. 

 

이제 다른 신들에 대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부와 명예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또 필요합니다.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재산이나 명예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믿는 신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도 그 신을 섬기면 자신도 그렇게 될 줄 알고 따라 믿습니다.

 

다른 신들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원하는 것을안 주겠다고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떠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적 존재가 사람을 무서워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분명히 다릅니다.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안 되라는 말을 죽 먹듯이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신이 진정 인간을 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그것을 때로는 해가 되기에 안 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구한 것은 늦게라도 반드시 주십니다. 언제 주실까요? 잘못된 구함이 주 안에서 바르게 고쳐질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한 것들은 늦게라도 응답이 온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응답이 늦어질 때는 내게 문제가 있구나를 꼭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살펴볼 것들 중의 하나는 바로 우리 속에 욕심입니다. 부모가 자신의 말 안 들어줄 때 고집센 아이들 모습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 아니면 안 된다고 딩굴고 소리치며 난리 납니다. 아이 키워본 분들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가 대부분 거절하는 경우는 이미 아이가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큰 장난감이거나 예뻐 보이는 다른 인형을 더 사달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 많이 가지고 있잖아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갖지도 못한 것 네 방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쟎니. 너 욕심장이구나.” 뭐 그런 소리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구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먹고 사는 삶의 기초가 되는 직장을 구하는 것은 좀 다른 차원입니다. 그때는 아버지 하나님께 어떻게 구할 것을 마 21:21-22절은 가르쳐 주십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정말 필요해서 구할 일이 생길 때, 이 믿음으로 나아가 구할 또한 분명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자녀가 아버지께 기도하고 간구할 때 가장 문제점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래 전에 제가 섬겼던 교회에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아이에게 급성으로 콩팥에 문제가 생겨 이식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습니다. 두루 찾다가 아버지가 딸에게 자신의 콩팥을 준 분이 있습니다.

 

세상 부모도 자녀들이 힘들어 하고 특히 아파할 때 자신의 것을 주어서라도 사랑하는 자녀를 살리려 합니다. 아버지께 구한 것은 반드시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비결은(의심하지 않는 방법)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희생을 확실히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나를 향한 희생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한 그 아이는 이제 커서 대학 3학년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신체의 일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예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자식처럼 아끼고 이름까지 지어 부르는 강아지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지요. 이 강아지는 너무 안 좋은 것을 계속 먹고 싶어하고 주인이 없으면 뒤져서라도 먹습니다. 주인이 이것 알아차리고 병 나지 않고 오래 살게 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일단 말이 소통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아들을 그것도 우리 가문의 자랑인 몇 대 장손 아들을 강아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할 수 있으십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춘기 지내면서 말 안 들어서 고생 좀 하라고 지구에 여행 보내신 것 아닙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외 아들입니다.

 

어디에도 보내지 않고 영원을 곁에 두고 사랑하신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만든 피조물을 위해 인간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귀하고 권력 있고 명예를 가진 사람 집에 태어나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흔한 이름을 가진 어머니 마리아와 왕족의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명예와 재산도 상실한 요셉의 집에 옵니다.

 

그 정도는 자식 훈련 시키는 셈치고 이 땅의 부모들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창세 전에 인간을 위해 세워진 구원 계획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엡1:5절에 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 안에 특히 말미아마라는  단어 속에 나타납니다. ‘말미암아의 뜻은 예수가 수단이 되어, 예수를 죽여서 그런 뜻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죄를 대신해서 사랑하는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는 사건입니다. 그것도 가장 수치스럽고 잔인한 십자가 형이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창세 전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 계획 세워 놓고 우리 같으면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겠습니까? 

 

더 힘든 것은 아들이 죽어가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 가운데 내버려 두어야 하는 가장 긴 사흘의 시간을 하나님은 참아야 합니다. 다시 엡1:5절을 보면 그게 무슨 기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쁘신 뜻대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그 계획에 동참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아버지 독단의 결단이라기 보다는 아들과의 온전한 이해와 합의에 의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아프고 힘들고 수치스럽고 잔인해도 감당할 수 있느냐? 라고 묻는 아버지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정말 아버지에게 확신에 찬 대답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죽이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에도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인간이 뭐길래 아들을 죽이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선악과를 먹으면서 자신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을 배신한 자들입니다(#1 배신자). 가장 따르고 순종해야 할 아버지 하나님의 말을 거역한 자들입니다(#2 불순종한 자).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한 죄인들입니다(#3 죄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이유는 창세 전에 우리들을 아들/딸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를 들면 지난 주에 하나님이 창조 전에 우리를 사랑하사 선택했다그리고 예정했다라는 말씀이 좀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라 믿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 부부가 아이가 없어 입양을 하려고 합니다. 이 부부는 한국에 있는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기 위해 미국에서 서류에 sign을 마쳤습니다. 이것을 창세 전의 하나님의 계획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창세 전부터 흘러 나온 것처럼, 미국에 있는 부부는 sign 을 하는 그 순간부터 한국에 있는 자녀에 대한 사랑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품에 안는 순간 정말 내 자식이 되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순간 나를 향한 놀라운 그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도 커가면서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 다들 한 번씩은 있을 줄 압니다. 제가 아이들 키우면서 놀린다고 부부와 딸이 미리 이야기를 하고, 아들에게 너 다리에서 주워 왔다고 하면 꾀 심각해 집니다. 너무 아이 마음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거짓말이라고 하면 엄청 신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사랑 받는 대상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죽이심을 통해 확실히 증명이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의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세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늘 함께 하시며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가/아빠가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아빠와 함께 행복한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는, 복된 인생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