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1):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1)  

1:3-7

 


구약의 다니엘을 지난 주에 마쳤습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서 출발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니엘을 보며 힘찬 시작을 했습니다. 이제 신앙의 기초를 다져 나간다는 의미에서 베이직이라는 주제로 에베소서를 보려고 합니다. 사복음서를 읽은 분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그리고 다른 서신서를 읽기 전에 에베소서를 권장해 드립니다.

 

그 이유는 이 서신서가 가지는 좀 다른 특징들 때문입니다. 다른 서신들은 주로 특정 교회들이 직면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룹니다. 하지만 에베소서는 그런 복잡한 문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냥 성도와 교회에 관한 일반적인 것을 취급합니다. 또 새로운 교리를 설명하지 않고 기존의 믿음을 강조하기에 좀 쉽기도 합니다.

 

소아시아에 있던 교회들에게 보내어 읽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엡1:10절이 보여주듯이 흩어져 있던 교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것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팬데믹으로 대면예배가 중단된 우리 교회로서는 성도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주 안에서 하나되는 믿음을 배울 수 있어 좋습니다.

 

에베소는 지금 터키 지역에 위치합니다. 로마시대에는 아시아의 중심도시로 무역이 활발했던 항구도시였습니다. 상업이 매우 발달했고 많은 사람들의 왕래로 인해 다양한 이교도의 영향이 있기도 했습니다. 특이 로마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다이아나를 숭배하여 행 19:27절에서 언급되는 아데미 신전이 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20:17-18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어떤 사역지 보다 많은 수고와 열정을 쏟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베소에 보내는 이 편지가 기록된 장소는 엡3:1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힌 자그리고 엡4:1주 안에서 갇힌 내가6:20쇠사슬에 매인 사신등의 말들을 보아 로마 감옥으로 추정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로마의 죄인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를 묵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의 으로 대체해서 말합니다.계획이나 뜻은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하나님의 계획이 만들어진 시간은 창세 전이라고 합니다. ‘창세 전이라는 말은 1) 먼저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이 생겨나기 전에 존재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2) 만물이 그분으로 인해 생겨난 것임을 선포해 줍니다.   

 

또한 3) 인간을 향하신 구원 계획이 창조 전에 세워졌다면 이 땅에 만물들 보다 먼저 인간을 생각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비록 창조 과정에서 인간은 마지막 날이지만, 인간을 가장 먼저 계획하시고, 그 다음 인간이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는 순서로 창조가 진행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인간을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땅의 그 어떤 피조물보다 하나님의 사랑 받는 대상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은 영원 전부터 흘러 내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조 전에 인간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인간 타락이나 그들에 대한 구원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했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을 향하신 구원 역시 어는 날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타락 후에 급조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1) 이것을 딤후 1:9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2) 게다가 구원이 창조 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는 증거는 4절 그 자체가 증명합니다. 3) 또한 3절에서 찬송하라고 시작한 문장은 14절 마지막에 찬송하라고 끝납니다. 여러 절이지만 원문은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속에는 선택과(4) 예정과 양자 삼음(5), 속량과 죄 사함과(7) 성령의 인치심(13)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문장 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전 구원 계획은 4절에 언급된 창조 전이라는 말에 전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더 구원의 청사진이 창조가 있기 전에 이미 완성 되었다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특히 6절은 구원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가장 간결하게 내리는 정의와 같은 역할을 해 주고 있습니다.

 

구원은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라고 바울은 선포합니다. 이 부분을 하나씩 떼어내어 상세히 설명하려 합니다. 1.먼저 그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창세 전에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설계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구원 계획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만들어졌다면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인간이 구원에 무엇을 관여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아이디어 하나 제공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 전에 정한 구원 방법 이외의 것을 만드는 종교는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구나 구원 계획을 세우신 분이 전지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지능을 IQ로 표시합니다. 우리는 그 숫자에서 1이 더 많느냐 작느냐를 가지고 똑똑하니 아니냐를 구분 합니다. 그런데 전지 전능하다라는 말은 과연 숫자로 측정이 가능할까요? 그런 분에게 인간이 만든 종교로 구원을 논한다는 것이 웃기는 일 아닐까요?

 

게다가 하나님은 창조 훨씬 전에 스스로 존재하던 시간이 있습니다. 창조가 일어나는 태초도 언제인지 인간은 모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앞선 시간 개념인 하나님의 존재 시간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엄청난 시간 가운데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허락된 구원은 얼마나 완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이 지금도 만들어 내는 종교는 불안전합니다. 이 소리 하면 돌 맞을지 모르지만 저는 확실히 말합니다.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방법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종교는 구원 근처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창조 전이라는 말을 성도님들의 마음 속에 확실히 자리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엉뚱한 소리 하는 세상 소리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성도에게는 있어야 합니다. 제가 말한 것 기독교인의 교만 아닙니다. 세상 종교를 폄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오히려 존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당당히 말 못하면 우리는 어둠을 비추는 세상의 빛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연히 길가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옆에 서 있는 엄마 아빠를 내 부모라고 말 못하는 아이가 있습니까? 물론 영화를 보면 남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엄마를 친구 집에서 우연히 보는 장면에서 일어나곤 합니다. 아니면 아빠가 남의 집 리무진 운전하는데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차 속에서 자식이 눈을 돌려 버리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 착각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 부모님은 그런 형편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집에서 일하는 경우가 종종 인생 살다 보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전혀 그럴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물질이 없어 만드신 천사들 집 방문해서 좀 꾸어다 온다는 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만물을 그분의 발 아래 두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나의 아버지를 당당히 말하지 못한다면 정말 문제 아닐까요? 그런 아버지가 주신 구원에 대해 틀리다, 못 믿겠다, 부족하다토를 달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도 비싼 차 하나 있다고 자기 아빠 자랑하는데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한 구원 자랑 못하는 분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너무 얕보는 교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또는 정말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단 교만은 제쳐두고 정말 감사하게도 구원은 이 세상 어떤 사람이라도 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학위를 받아야 통과하는 그런 복잡한 과정이 불필요합니다. 시험을 쳐서 얻는 것도 아닙니다. 높은 점수 맞아서 그렇게 구원 받은 분 우리 가운데 계시는지요? 하나님을 알아가고 믿음이 생기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정말 지독히도 긴 시간을 끌며 가족들 애타게 만드는 분도 있긴 합니다.

 

그런 예외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교회를 접하고, 교회를 다니고, 어느 날 자신의 귀에 들려 오는 복음을 접하는 순간 나의 죄를자복하고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 받는 분들입니다. 구원이 쉽게 얻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구원 받은 사람들이 간직하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구원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얻는 구원은 이 세상 어떤 것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에게 구원을 허락하기 위해 가장 귀한 아들을 희생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값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힘들여서 세상에서 번 돈, 자지 않고 공부해서 얻은 높은 자리와 명예. 뭐 이런 것들 아닙니다. 그런 것을 내 주어야 구원을 얻는다면 구원에 인간의 뭔가가 첨가 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작품이 되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가장 귀한 것을 내 주어야 되는데 그것은 라는 자아입니다.

 

우리가 라는 자아를 내어 준다고 하니 내가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또 보입니다. 그러나 라는 존재도 사실 알고 보면 하나님이 창조 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는 라는 자아는 내 것이 아니라 내 주인 되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는 순간 내가 주인으로 행사했던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내가 주인 된 라는 자아를 다시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사건이 일어나는 복된 시간입니다. 그럴려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가 나의 죄를 용서할 구원자이심을 진정으로 믿고, 이제부터 내 속에 오셔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실 것을 입술로 고백할 때 한 사람은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을 확신한 성도의 특징이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허락한 방법대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말 목숨처럼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것이고 오류가 있으니 구원 자체를 믿지 못하겠다. 그것을 전하는 자들의 말도 믿지 못한다고 말하는 분은 아직도 구원을 받아 들이지 못한 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갈릴리에 걸어 다니던 실제 예수와 십자가 사건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보고 기록해서 전하는 복음만을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그들이나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나 구원은 동일하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창세 전에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구원의 계획에 등장하는 예수에 대해 좀 나누려고 합니다. 다시 본문 6절에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말을 보기 바랍니다. ‘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의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분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실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도 이미 창조 전에 계획 되었다는 것을 4절은 보여 줍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 역시 창조 전부터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에서 인간을 구원하려는 계획에 참가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다음 주 나누지만 성자 하나님은 구원의 실행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사랑의 관계라는 의미는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기 싫어하고, 사람에 의해 못박혀 죽고 싶지 않는데 아버지 강요에 의해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7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말처럼 구원은 예수님 자신의 자발적인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자발적인 내어주심이 있기에 우리는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아버지 정말 이것 안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강제로 시켜 이 고생 합니다”--이렇게 말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십자가는 나를 위한 자발적죽음이 아니라 억지로 죽은 피살이 될 것입니다.   

 

목적 없이 죽은 쌩 죽음일 뿐입니다. 죽고 싶지 않은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나를 위해 죽으신 나의 구원자라는 명칭을 예수님께 줄 수 있을까요? ‘쓸데없는 짓 했다고 소리칠 것입니다. 나의 구원자자 아닙니다(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심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6절 후반 절을 보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자발적이고 더 나아가 우리를 끔찍이나 사랑하셔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지 않으면 우리가 살아날 길이 없음을 알기에 자신의 몸의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다음은 6절뿐만 아니라 에베소에서 많이 나오는 “() 안에서라는 말이 구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없이는 구원이 허락되지 않는다. 예수 아닌 다른 어떤 것에는 구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종교가 말하는 구원이든지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 구원은 거짓이다라는 선포입니다.

 

결국 예수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만이 우리의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제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룰에 최적의 제물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죄는 죽음이다. 그런데 죄 용서함은 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죄는 사람의 피만이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사람의 피나 흘리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나의 죄를 위해 이웃의 A를 죽이고, A를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다 살인/자살로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가치가 있는 그 사람을 죽이면 모든 사람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흠 없는 어린 양이 죄 지은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흠 없는 어린양과 같은 죄 없는 사람을 찾아 죽이면 될 것입니다. 문제는 이 땅에 아담으로부터 들어온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 전부터 계신 죄 없는 하나님 아들이 이 땅에 죄 없는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고, 죽어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해 성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가를 6절 후반절은 은혜, 찬송, 영광이라는 세 단어를 통해 알려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이라는 최고의 선물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은혜라는 사실만을 우리 입술을 통해 선포하라고 말씀합니다. 다음은, 주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이 너무 완벽해서 불평 거리를 찾을 수 없고, 다른 종교들 따라가지 않고 오직 예수로만 만족하는 찬송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구원으로 인해 줄줄이 이어지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마음껏 누리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바울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거저 주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며, 불평과 원망이 사라지고, 늘 만족함으로 찬송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복된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