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출발(6): 고난 가운데 감사하는 사람  

6:1-10


 

요즘 방탄 소년단이 한국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 우승하거나 평화상 외 다른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으면 더 자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런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꼭 거창한 것만이 아니라도 가게에서 거스름돈 잘못 준 점원에게 잔돈 돌려 주는 일도 사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5주 동안 보아왔던 성경 인물 중 다니엘도 자랑스럽습니다. 십대에 인질이 되었습니다. 많은 고난 가운데도 자신이 섬기던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는 참된 신앙의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누구도 못하는 남의 꿈까지 맞추고 해석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48-49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지혜자의 어른으로 왕궁에 거하며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는 인물이 되기도 합니다. 5:29절을 보면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때에 벨사살 왕에 의해 나라의 셋째 통치자의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공식적인 왕이 나보니두스였고, 아들 벨사살은 비공식적 왕이었다면 세 번째 자리가 의미하는 것은 국무총리 자리까지 올랐음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의 전성기에서부터 망하기까지 정치의 한 가운데 있던 인물입니다. 세상 말로 하면 자수성가한 사람이고, 가문의 자랑을 넘어 온 유다 민족이 자랑할 만한 인물이 배출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1:21절은 다니엘의 명성이 바벨론을 넘어 페르시아 시대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드디어 6:1-2절에서 다니엘이 바사제국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바벨론을 정복한 다리오는(고레스) 지방장관() 120명을 세우고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6:3절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워둔 세 명의 총리들 가운데 다니엘이 두각을 드러냅니다. 그 이유는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한 사람’(개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 KJV“an excellent spirit was in him” 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래서 다리오의 눈에 들었고 다시 전국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올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은 다니엘을 시기하기 시작합니다. 6:13절에 의하면 이들은 다니엘을 유다 포로 출신으로 지칭합니다. 아마도 신분상으로 포로 출신인 다니엘이 자국민을 다스린다는 것이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 같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이런 시기와 반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의도적으로 다니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7절을 보면, 누구든지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겠다는 법령까지 만들 것을 왕에게 요청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은 10절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11절은 다니엘의 약점을 이들이 발견합니다. 다니엘로서는 인생 최대의 고비입니다. 그의 고난은 어린 유년 시절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그러다 총리까지 되고 인생 멋지게 마무리 짓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거의 죽음을 앞둔 나이에 사자 굴에 들어가는 수모와 고난을 또 당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난 앞에 선 그의 태도입니다. 이 정도되면 하나님, 왜 나만 가지고 이렇게 괴롭힙니까? 내 잘못도 아니고 부모들이 잘못해서 어릴 적부터 잡혀왔는데 이 나이에 또 고생입니까? 저 고생 많이 했거든요. 이제 그만 두시면 안될까요?” 이런 원망과 넋두리 조차도 안 들려옵니다.  

 

무고한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방을 비난하고 저주하는 소리 하나 내지 않습니다. 80을 훨씬 넘긴 그의 나이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어차피 죽을 인생 아무렇게나 죽으면 어때? 자포자기일까요? 두 제국을 이어가면서 누릴 것 다 누렸는데 이만하면 됐어! 라는 자기 만족일까요? 어느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뭘까요?

 

6:3절은 “He possessed an extraordinary spirit”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NASB). 그는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아는 풍성함이 고난 가운데도 그를 원망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성도 역시 성령이 우리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동일한 모습이 고난 가운데 나타날 줄 믿습니다. 

 

, 그러면 왜 고난 가운데 원망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고난의 시간에 원망은 맑은 유리 창에 더러운 걸레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빛이 내 앞에 잘 비추어져야 내 갈 길을 잘 갈 수 있을 텐데 원망은 더 어두워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망은 나를 통해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뜻을 가리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오히려 현실을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심과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태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모습은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매일 하던 것처럼 다락에 올라가 세 번이나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관여하게 고속도로를 놓은 것입니다.  비포장도로보다 훨씬 쉽게 하나님의 뜻이 적힌 편지가 전달 될 것입니다. 기도는 더 빠른 응답을 받기 위해 나와 하나님 사이에 광케이블을 까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유선보다 어디에서나 터지는 무선이 대세를 이룹니다.

 

그래서 4G에서 훨씬 더 빠른 5G 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운로드 되는데 걸리는 시간이 엄청 단축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도 입술로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는 응답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기도 생활 가운데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6:10절 후반부에 나오는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아이 때부터 배웠기에 습관적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시간에 감사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는 것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10절에서 궁금한 것은 고난과 감사의 관계입니다. 어떻게 고난의 시간에 감사가 나올 수 있을까요? 그리고 감사가 고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입니다. 고난이 오면 빨리 지나가는 것에만 사람들이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다 보면 고난이 왜 나에게 왔는가를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 빠른 응답을 받는 비결과 동시에 나에게 온 고난의 목적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고난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데 고난에 대한 응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나를 찾아온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삶 전체를 보면 감사가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가 인질로 잡혀온 후 예레미야 선지자가 렘 29:10절에서 하나님이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기쁘긴 하지만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70년이라는 긴 세월 후에나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10대 때 잡혀왔으므로 70년 후면 죽고 난 뒤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절망해야겠지요. 그리고 바벨론이 망하면 돌아갈 줄 알았는데 더 강한 제국 바사가 바벨론을 대신합니다. 이런 상황을 어찌 감사 하겠습니까? 소망이 없는데 어찌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더구나 이제는 다니엘을 죽이려는 사람까지 생겼습니다. 7절을 보면 다니엘의 적들은 법령을 30일 동안이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30일 동안 하나님께 기도 안 한다고 갑자기 벌 주겠습니까? 잠깐 휴식 좀 하면 어떻습니까? “일평생 잘 섬겨왔는데 하나님 30일만 찌그러져 있을게요.” 이렇게 다니엘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은 전혀 달리 행동합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평생 해 오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것이 비정상입니까? 아니면 정상입니까? 이 문제 우리 성도님들 확실하게 답을 하셔야 합니다. 절망 가운데 감사가 없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것이 틀린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 삶이 지친다고 기도가 멈추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내 생각대로 안 되고, 아프고 병들고 어려운 일 생기고, 21세기에 팬데믹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긴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삶 잊어서는 안됩니다. 감사하는 삶 뒤로 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속에도 정상적인 신앙인의 삶이 우리 가운데 자리 잡혀야 합니다.

 

다니엘의 모습이 바로 고난 가운데 우리가 따라가야 할 정상적인 삶인 것입니다. 죽음 앞에도 기도하러 나가고 아무 희망이 없는 상황에도 감사가 있는 삶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는 누구에게나 이 평안이 없으면 하나님은 역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감정이나 의지 그리고 영적 상태가 흔들릴 때 절대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 (기적) 보일 수 없습니다. 매일 감사의 기도는 흔들리는 나를 평안 가운데 거하게 하는 무게 중심입니다. 이미 흔들리고 난 뒤에는 균형 잡기가 힘이 더 듭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새벽부터 감사 기도를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낯선 땅에서 인질로 나중에는 다시 포로민으로 사는 것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세 번 기도한 것은 율법에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의 매일 삶이 힘들었기에 내적 평안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의 감사 기도는 흔들릴 때 마다 그를 붙잡아 주는 힘이 된 것입니다.

 

모두가 기적들을 원하지만 기적은 하나님 주시는 평안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겁이 나서 놀라고 당황하며 들어간 것 아닙니다. 기적을 원하신다면, 아니 내 문제가 풀리기를 원하는 분이 있다면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올 때까지 감사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6:10절의 다니엘의 감사 기도가 정답입니다. 우리들에게 동일한 상황은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망할 수 있는 고난이 주어질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을 다니엘로부터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현실은 고령의 나이입니다. 그래도 인질로 잡혀와서 여기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 마지막 자락에서 사자 밥이 되는 것 모욕이고 수치스러울 수 있습니다. 30일 휴가 왔다고 생각하고 다락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것 그만 둘 수 있습니다. 나이든 사람이 매일 세 번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 관절에도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건강을 고려할 나이도 되었습니다. 그런 조언도 무시합니다. 

 

고집불통이라는 소리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더욱 놀라운 것은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10절을 다니엘 시리즈 두 번째인 기도로 준비된 사람이라는 주일설교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감사라는 주제는 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묵상이 덜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의 감사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인질로 잡혀와 바벨론과 바사라는 나라에서 총리까지 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라 법을 어겨 사자 굴 속에 던져져 처참하게 죽는 것이 감사할 일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아무것도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데 다니엘은 무엇을 감사했을까요? 아무것도 감사할 것이 없을 때 남는 것은 내 몸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감사를 못 찾을 때 또 하나의 비결은 나를 중심으로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것이 저의 묵상의 힌트였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역사를 조금 이해하면 좀더 현실감 있게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주전 605년에 인질로 왔고 바벨론이 망하는 때가 539년으로 66년이 흐릅니다. 인질로 올 때 어린 소년이라면 계산의 편리를 위해 14살 정도라고 하면 지금 다니엘은 80살 정도입니다.

 

여기서부터 반전입니다. 나이가 80을 넘어간다는 것은 반대로 유다 백성들이 70년의 포로기간에서 풀려 날 시간이 정말 멀지 않았다는 것을 또한 뜻합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이 망하고 다리오가 자신을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에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죽을 나이에도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감사합니다.

 

9:2절을 보면 다리오 왕 원년에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해 70년이 되면 포로에서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9:4절에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크시고 두려워 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라고 기도합니다.    

 

문제는 바사 왕입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은 그들을 돌려줄 마음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스 1:1절을 보기 바랍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주전 538년에 1차 포로 귀환이 이뤄집니다. 시간 순으로 보면 주전 539년 바벨론이 망합니다(5:31). 다음 사자 굴 사건이 있고 난 뒤 주전 538년에 1차 바벨론 포로귀환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이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세 친구들은 이미 하늘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이 망하고 고레스가 포로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는 예언을 사 44:28절에서 이미 했습니다. 거의 모든 포로민들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껏 다니엘은 자신은 바벨론의 왕들에게 하나님이 세상 역사의 주관자임을 드러내는데 사용 되었습니다.

 

지금 이 고난은 페르시아의 왕인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레스로 하여금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임을 믿게 만드는데 다니엘 자신을 사용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감사했던 것입니다.

 

고난은 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이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고난의 목적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아무리 힘들지라도 주저 없이 고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 왕의 강심장에 하나님을 믿게 만들겠습니까? 그래서 동물의 왕인 사자 입에서 살리는 사건을 연출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 후 고레스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만이 다스리며 자신 역시 하나님 주권 아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감동은 유다인들을 귀환시키게 합니다.

 

고난은 목적을 가지고 옵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세상에 나타나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제안입니다. 고난의 때에 나 같은 사람을 원하는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