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출발(5): 바른 선택을 하십시오  

5:1-10


 

어릴 적에 연을 날렸던 기억이 납니다. 바람이 좋아 나가려고 하는데 실이 얽혀있어 엉망이 된 날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신나게 노는데 나가 놀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 동네 가게는 실도 안 팔고, 또 얽힌 것 다 끊어 버리면 너무 실이 짧아 재미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얽힌 실을 가만히 풀어야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라도 마찬가지로 문제들이 얽힐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말기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데요. 그때 슬기로운 지도자가 나타나면 난국을 타개하고 발전의 기회로 삼아 더 부강한 나라로 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위대한 지도자가 죽으면 어려움이 닥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전 605부터 562년까지 43년 동안 제국을 다스리던 느부갓네살 왕이 죽자 바벨론도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죽은 562년부터 539년 제국이 망하기 까지 23년 동안 공식적으로 왕이 4명이나 등극합니다. 게다가 두 번이나 가족들의 왕위 찬탈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복잡하게 얽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벨사살 왕은 귀족들과 함께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30절에 의하면 그는 죽임을 당하고 31절은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에 의해 망하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이것을 보면 벨사살은 바벨론의 마지막 왕임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공식적 역사를 기록한 바벨론 역대기를 보면 나보니두스로 기록됩니다.   

 

그래서 한 동안 성경이 가공된 기록물이라는 소리를 듣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발굴된 고대 점토판이 해독되면서(대영박물관 보관) 벨사살은 나보니두스의 아들임이 밝혀집니다. 벨사살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라를 다스리다 제국의 몰락을 맞이한 비공식적인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것입니다.

 

나보니두스가 아들을 대신 왕으로 세운 이유는 망해가는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전쟁을 하러 도성을 떠나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설명은 나보니두스가 역대 왕들이 섬긴 바벨론의 마르둑 신을 버리고 달 신을(Sin)을 섬기려는 종교정책으로 백성과 신하들에게서 원성을 사서 밀려 났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벨사살이 도성에서 술 잔치를 벌인 이유도 나름대로 있습니다. 1)당시 도성 가까이 와 있는 메데/바사의 연합군과의 대대적인 전투를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멀어진 신하들의 마음을 모아 도성을 방어하고 마지막 전의를 다지기 위한 것으로도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군인들이 모여야 할 텐데 귀족들이 모인 것으로 보아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나보니두스는 연합군에 패해서 다른 성으로 도피해 있던 상태였습니다. 2)이런 위기 속에서 바벨론 성이 여전히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적들에게는 사기를 저하 시키고, 백성들의 동요를 막으려는 전략으로 보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건 전투를 앞두고 이런 여유 있는 잔치가 가능했던 것은 느부것네살 왕 덕택입니다. 도성을 건축할 때부터 높고 두꺼운 성벽과 성 주위를 빙 둘러 유프라테스 강을 끌어들인 해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성에 엄청난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록 이런 인간의 철저한 노력과 계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했습니다. 13:1절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라고 말씀합니다. 13:18절에는 그 군대가 메데 사람들이며, 13:19절에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47:11절에는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47:13절은 그 많던 하늘을 살피는 자들과 별을 보는 자들도 임할 멸망에서 구원할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가 말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바벨론은 아무도 예상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망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한 모습인가를 말해 줍니다. 그렇다고 미리 짜여진 하나님의 극본대로 진행되는 역사가 아닙니다. 그러면 바벨론은 들러리로 매우 억울해 하지 않겠습니까?

 

역사는 하나님 공의대로 행해지지() 않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정해두신 대로 진행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대로 진행되는 역사 앞에 인생이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선택을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이 잘못되지 않도록 앞으로 내가 선택할 시간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알고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앞날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말씀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119: 30절은 주의 말씀을 자신 앞에 두어 성실한 길을 늘 택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31절을 보면 말씀을 언제나 명심하고 있으면(새번역) 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본문은 벨사살의 두 가지 선택을 보여줍니다. 5:2절을 보면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 잔치를 벌였고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성전기구를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1(597) 2(586) 포로들을 잡아올 때 많은 성전 기물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562년 죽기까지 그는 기물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에월므로닥(562-560), 네리글라살(560-556 사위), 라바시마르둑(556, 9개월), 나보니두스(556-539 사위)도 성전기물에 대해 어떻게 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벨사살 역시 아버지를 대신해서 통치하면서 바벨론의 마지막 해인 539년까지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도 나라의 절대 운명을 앞두고 있는 왕의 마음에 성전기물이 생각이 났던 것은 참 기이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이 나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바벨론이 타국을 무너뜨리고 가져온 전리품이긴 하지만 일국의 신을 섬기던 성전의 기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비록 유다를 패망시키긴 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에 두려움은 전 바벨론에 걸쳐 알려져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향력은 느부갓네살 이후에도 미치고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 예가 성경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죽고 아들 에윌므로닥이 잡아온 포로민들에 대한 대우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52:31-34절에 의하면 에월므르닥은 포로로 잡혀온 여호야긴 왕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유다 왕으로서의 직위를 인정해 주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벨사살 왕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는지를 전혀 몰랐을까요?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이 죽고 대략 13년 후에 나타나는 인물입니다.

 

그가 몇 살에 왕이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비록 나이가 어려서 다니엘을 직접 보지는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자라면서 들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 증거가 22절에 있는데요. 다니엘이 술 잔치에 나타난 이상한 손이 쓴 글을 해석하러 왔다가 벨사살에게 해 주는 말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벨사살을 항하여 느부갓네살 때 일어난 일들과 하나님이 그에게 행한 것들을 다 알고도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느부갓네살과 벨사살 왕의 2가지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1)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모르고 실수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으로 앞 장들에서 보여집니다.

 

한편, 벨사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분명 알고 성전 기물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2)느부갓네살과 같이 여호와라는 신도 자신들이 굴복시킨 나라의 신일뿐이라는 교만을 보여줍니다. 느부갓네살은 경고를 보고 거기서 멈추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벨사살은 선을 넘어 하나님을 조롱하게 됩니다.

 

그가 그런 행동을 취한 이유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변명 없는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앞에서 말씀 드렸지만 아버지 나보니두스는 어느 날 갑자기 마르둑 신을 버리고 달 신에 꽂혀 다른 신을 섬기려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 많은 귀족들로부터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벨사살은 이런 상황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인생 최대의 도박을 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다 성전 기물을 가져오게 함으로 여호와를 이기고 승리를 가져다 준 마르둑을 아버지와는 달리 자신은 섬긴다는 것을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기 일보직전이고 자신의 왕권을 유지시키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벨사살은 지나온 시간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을 7년 동안 제국의 왕좌에서 물러나게 한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모른체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성전기물을 술잔으로 사용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모욕을 보여 주는 행위를 선택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4절을 보면 성전기물들을 가져와 술잔으로 사용해 마신 후 금, , 구리, ,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합니다. 그냥 우상 숭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온갖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규합하는 행위입니다.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얻고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던 때입니다.

 

후원자로 삼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책략임을 보여줍니다. 함께 어울리며 그들 신들의 능력을 찬하하며 여호와 신의 나약함과 패배를 선포하며 그들에게 아부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오늘 날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성공의 도구로 사용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우리 마음에도 이런 위험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 6:7절에서 스스로 속이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그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을 말씀합니다. ‘업신여긴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행동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미 잘 알고도 조롱했던 벨사살에게 딱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덯습니까? 하나님 알고 믿고 따르는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교만하지 않는지요? 아니 더 나아가 교만을 너머 하나님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는지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명령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지키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보며 서운해 하는 곳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캠퍼스입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을 도마에 올려 놓고 마음대로 칼질해 버립니다. 신앙을 종교로 끌어내리고, 이제는 의미(meaning)정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 믿는 사람인 것 제대로 선포하며 살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1:1절에 의하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이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않지 아니하는 사람이라 말씀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만을 넘어 무시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시대의 사조와 철학 이론 가르침 아이디어들 알아야지요. 그러나 따르지는 말아야 합니다.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이런 사역을 해오던 라비 제카라이어스 기독교 변증 학자가 지난 오월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도에서 태어나 철학 종교 타문화 등 다양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계 지성인들을 오만의 자리에 앉지 않도록 복음을 전하던 변증학자였습니다. 그분 책이 20권 정도 되는데요.

 

신입생들에게는 이번 가을학기에는 기독교가 당신을 실망시켰다면?” Has Christianity Failed You? (2017, 엔센티아) 라는 책을 꼭 권해 드립니다. 주위에 반기독교적 정서를 가진 분들이나 교회에 상처와 실망을 경험한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치유와 교만을 벗고 하나님 무시하는 태도에서 돌아서기를 소원합니다.

 

사실 교회 바같 분들은 믿지 않기에 하나님 무시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는 교회 내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하나님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분들은 없을까요? 22절을 다시 보기 바랍니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라고 다니엘이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 알고도아직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떻게 섬기며 따라야 하는지 모르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있지는 않는지요?

 

벨사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13절입니다. 벨사실 왕이 그의 앞에 온 다니엘에게 하는 말입니다. “네가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왕은 다니엘을 잘 모르고 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사실 몰라도 되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 중에 그 다니엘이란 말에서 유다에서 잡혀온 다니엘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능력은 소문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듣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23절은 3가지를 지적합니다. 1)하지 말아야 할 성전 기구를 술잔으로 사용하는 신성모독을 했고 2) 어린 아이들도 하지 않을 금은 구리 쇠 나무로 만든 죽은 신들을 찬양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을 지적합니다.

 

마지막으로 3)우리 인생의 호흡과 모든 길을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임을 느부갓네살 왕을 통해 확실히 알고도 믿지 않는 오만함을 말합니다. 비록 이런 세상의 사람일지라도 그들 역시 하나님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6절은 잘 보여줍니다. 벨사살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자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무릎이 부딪힐 만큼 두렵고 떨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조금 뒤에 올 그의 죽음 앞에 양심이 두려워합니다. 몸이 표현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모습입니다. 벨사살은 하나님이 역사했던 그 다니엘인가를 아는 순간 느부갓네살처럼 하나님을 찬양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무시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한 가지 질문은, 회개할 기회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25절의 벽에 쓰여진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자에서 두 번 반복되는 단어는 메네입니다. ‘세어 보았다는 뜻입니다. 두 번은 충분히 면밀히 검토했다뜻입니다. 기회도 주어졌고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는 23절 하반절 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선택을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이고 십자가 구원 사건입니다. 이 은혜 앞에 교만하지 않고 주님 무시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종교를 피하고 신앙을 택해야 합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만으로 구원받음을 선택해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더 나빠지는 것을 피하고 더 나아지는 삶을 위해 우리는 다른 이 세상 영들이 아니라 성령만을 선택하고 따라가야만 합니다. 내 앞에 놓인 선택들을 잘 살피는 복된 성도님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