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출발(4):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  

4:9-17


 

어릴 적 어느 초등학교에든지 두 개의 놀이기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끄럼틀과 시소입니다. 미끄럼틀은 혼자서도 놀 수 있지만 시소는 상대가 있어야만 탈 수 있습니다. 내려올 때도 좋지만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은 그네 못지 않게 재미가 있습니다. 

 

놀이기구라서 올라가고 내려가는 즐거움이 있지만, 인생살이가 그렇다면 힘이 들 것입니다. 올라가는 상승세를 타면 좋습니다. 하늘을 나르는 기분이고 모든 것이 내 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하강세를 타서 내려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점을 알 수가 없고 나 스스로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한계인 듯 합니다.

 

3:1절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왕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천하를 지배하고 다스리던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도 추락하는 한 시절이 있었다고 다니엘 4장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왕좌에서 물러나 있었다면 제국을 다스리던 왕으로서는 참 힘든 시기였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40년이 넘는 통치기간 동안 주변의 많은 나라들을 쳐서 발 아래 꿇어 엎드리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세력들도 저항하지 못할 엄청난 국력과 부를 갖춘 제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이룬 제국의 태평 성대한 모습을 즐기는 모습이 4절에서 나타납니다.

 

바벨론 성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헤로도토스) 성벽 높이는 14미터, 성벽이3겹으로 되어 있고, 마차가 왕복한 넓이(7m)로 둘러 쌓였다고 합니다. 성을 방어하기 위해 주위를 물로 둘러 해자까지 갖춘 도성이었다고 합니다. 찬란했던 바벨론 성이 독일 고고학자 콜데바이에 의해 땅속 20미터 깊이에서 1899년부터 18년간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가면 바벨론 도시의 웅장한 첫 성문이 조금 작기는 하지만 복원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제국을 이룬 왕의 교만이 10절의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다는 말 속에 잘 드러나 보입니다. 당시 바벨론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았던 그들의 세계관이 보입니다.

 

22절에서 다니엘은 세상 한 가운데 서 있는 나무는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꿈을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11, 20절에서는 그의 제국이 커가고 왕의 권력이 견고해지고 제국의 위상이 높아져 하늘에 닿고 권세가 땅 끝까지 미친다고 말합니다.

 

12, 21절은 실제 그의 업적을 더 화려하게 시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주전 612년에는 고대근동을 주름잡던 앗수르를 패망시킵니다. 605년에는 당시 애굽의 패권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몰아내기 위해 갈그미스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합니다. 그리고 터키지역과 유다까지 집어 삼키며 제국이 팽창하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공 앞에서 실제 그는 어떤 모습으로(겸손/교만) 살았을까요? 이것을 살펴 보기 위해 2장에서 첫 번째 꿈부터 4장의 두 번째 꿈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보려고 합니다. 2:32-35절을 보면, 왕은 어는 날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두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고, 종아리는 쇠이고, 발은 쇠와 진흙으로 된 큰 신상 봅니다. 그런데 한 돌이 날아와 그것들을 다 부숴 버리는 첫 꿈을 꾸게 됩니다.  

 

꿈을 꾸고도 무엇을 꾸었는지도 모르는 왕에게 그 꿈은 바벨론 이후에 오게 될 나라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해 줍니다. 특히 2:44-45에서 다니엘은 바벨론 이후 일어날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무너지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한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질 것도 왕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온 세상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알려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을 들은 왕은 2:47절에서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 왕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너무 놀랍습니다.

 

완전 개종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거듭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런 왕이 이어지는 3장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금으로 만든 신상을 세우고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는 세 친구들에게도 경배하라고 명령합니다. 정말 엉뚱한 모습을 지난 주에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2장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고백이 진정한 고백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2:47절의 왕의 고백을 다시보면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라고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두라 평지에 금 신상을 만들어 절하라는 명령은 완벽하게 하나님에 대해 불순종 하는 행동임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선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진실된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다음은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입술의 고백은 삶에서 행동으로 언젠가는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기적까지 보고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몇 번이나 하는데도 하나님을 진정 믿는 사람은 왜 되지 못했을까?

 

이유는 있겠지요. 일단은 본인 의지의 게으름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격적인 주님과의 일대 일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일대 일로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느부갓네살은 꿈을 맞추는 것은 물론 풀무불 속에서도 사람이 타지 않는 기적을 똑똑히 경험했습니다. 그렇다면 기적을 보고 경험하는 것과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400년 이상 종살이 했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오기 전에 엄청난 기적들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막상 홍해 앞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의 그 엄청난 기적조차 잊고 원망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기적의 현장에 있어도 기적만 본 것입니다. 교회에 다닐 뿐입니다. 고백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고백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을 히 6:4-6절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이라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입술의 고백이 진실됨을 아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입술을 통해 고백된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오고 그때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 우리 모두는 인생 마지막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둘째, 믿다가 거짓에 미혹되거나 배교할 때 거짓 고백이었음이 드러날 것입니다. 셋째, 주님 오실 때까지 인내하며 심지어 순교를 통해 확인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런 시간이 다가오지 않았다면 우리의 고백이 진실임이 어떻게 드러날까요? 역시 살아가는 삶에서 JOY원칙으로 나타납니다. 예수가 나의 삶의 우선이 됩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삶으로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나를 희생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JOY: Jesus first, Others, and finally yourself).

 

또한 성도가 살아가는 학교, 실험실, 직장, 가정, 교회에서조차 저 사람 예수쟁인데 정말 현실 감각이 없어, 남들 다 하는데 자기는 예수님 때문에 못한데. 자기 양심으로도 죄짓는 것조차 안 한데. 우리와는 정말 달라.” 이런 소리 늘 듣고 사는 삶이 진정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삶 아니겠습니까?

 

이런 분들은 ‘JOY’의 앞뒤 순서가 섞이지 않습니다. 주님 일이라면 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목숨까지도 원하면 드린다.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분들이 나올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내 삶의 중심에 모십니다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발은 되지만 부족할 수 있습니다(물론 가능한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입술의 고백으로 믿음생활이 시작되긴 하지만 아는 것과(고백) 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인격적 만남)에 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괴리가 내게서 없어지는 계기,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의미의 인격적인 주님과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인격적 만남의 계기는 어떻게 일어날까요? 성도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주님은 우리의 모든 형편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무한한 분이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또한 모든 주의 자녀들을 집단이 아닌 일대 일로 꼭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의 보기들을 성경은 제시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욥입니다. 신약에서도 니고데모와 삭게오, 우물가의 여인,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창녀, 세리들, 수 많은 병자들 역시 주님과 인격적 만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면 대부분 영적으로나 아니면 현실에서 고난을 겪는 가운데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도님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가운데 주님을 만났다고 간증하는 분도 있기는 하겠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고난 가운데 만남을 가졌다고 전합니다. 고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편할 때는 주님을 만나지 못할까요? 바로 그 답을 느부갓네살 왕이 해줍니다. 그는 기적 같은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결정적 이유가 있습니다. 답부터 먼저 말씀을 드린다면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그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통해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인정까지는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믿는 마르둑 신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뛰어나다는 교만입니다. “아무리 다니엘이 나의 꿈을 맞추고 해석까지 하고, 또 세 친구들이 불에 타 죽지 않아도 그들은 내가 싸워 이긴 나라에서 잡아온 나의 종들이야.”

 

내가 믿는 마르둑 신이 더 우세하고 뛰어나고 힘이 있어. 그래서 유다 사람들이 믿었던 신을 이기고 그 땅도 정복하고 그들을 데리고 와서 종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야.” (예수쟁이들 아무리 잘 나도 나 보다 못해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런 사고가 그를 지배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같은 그런 사람을 자신 밑에 두고 있다면 능력 있는 신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고대 세상적/종교적 사고 때문입니다. 

 

한 번 더 왕의 교만을 증명해 주는 곳이 30절입니다.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위엄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구절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일인칭을 세 번이나 사용합니다.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건설한 도시의 영광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이 정도로 교만한 사람은 우리 가운데는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들 역시 내 능력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서운해 합니다. 또한 내가 이룬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돌리지 못하는 삶은 우리들 가운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요? 모든 일의 진행 속에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도움 없이 전부 내 힘으로 이룬 것이라는 교만입니다. 18:12절은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이 극치를 이루었을 때 13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순찰자를 보내어 그의 마음을 살피고 그의 모든 것을 7년이나 빼앗아 버렸다고 16절은 말씀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고 실제 그렇게 하십니다. 고난 속에서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도록 하는 배려입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의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고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 잘 작동되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이 때는 일이 잘 안될 때가 아니라 잘 나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12절처럼 자신의 이름이 여러 나라에서 점점 명성을 얻어갑니다. 자신의 발 아래 복속하는 나라들이 늘어납니다. 모두가 자기 아래 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입니다.

 

교만은 잘 나가는 자신을 볼 때 자랍니다. 이때 특징은 사람을 사용하든, 환경을 이용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께 대항합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머리만 금이 아니라 전신이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들어 세웠던 것입니다. 자신의 왕국이 영원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어떤 신분일지라도 교만한 자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한 거룩한 자가 14절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을 보면 그 나무를 베어 버립니다. 그리고 가지를 자릅니다. 잎사귀를 떨어 버립니다. 열매를 해치고, 짐승들을 그 아래에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가지에서 쫓아냅니다. 나열된 것들이 나무()에 붙은 것들로 보아 그가 이루어 낸 업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이룬 것들이 자신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럴 때37절 하반절 말씀처럼 교만을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치유가 고난으로 주어집니다.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31) 7년 동안 들에서 들짐승처럼 지내게 됩니다(32). 이런 고난을 주신 3가지 목적이 17절에서 언급됩니다.

 

1)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2)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3)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에게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추가적인 의미와 목적을 또한 제시해 줍니다.

 

1)내 삶을 다스리고 내 인생의 주인 되는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네게 주신 부모, 공부 잘하는 것, 건강, 명예, 물질, 자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사실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 뼈 속 깊이 철저히 깨닫는 것입니다. 성도는 내 것이라 주장하다 빈털터리 되고 고난 뒤에 하나님 인정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

 

3) 나는 지극히 천한 자,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 깨닫게 하기 위해, 우리를 흔들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결국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있어야 할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교만의 자리는 누구도 욕심 낼 필요도 없고 내서도 안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앉아서는 안될 사망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엄청 사랑하는 하나님은 겸손이 잘 작동되지 못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아픔이 반드시 찾아오게 하십니다. 그것을 고난이라 부릅니다.

 

자녀들에게 아프긴 하지만 필요가 있다 판단 될 때 하나님만이 쓸 수 있는 도구입니다. 하나님 뜻을 알고도 내 뜻대로 하려는 억지 부리는 나의 교만을 꺾게 하는 처방입니다. 주의 자녀들은 교만으로 오는 고난의 자리까지 갈 필요가 없고 가서도 안됩니다. 저는 오늘 아주 극단적인 경우를 설명하고 나누었습니다.

 

모든 우리 성도님들은 복음을 들은 분들입니다. 듣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진실되게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한 인격적 만남을 가진 분들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혹시 아직도 내 인생 내가 설계하며, 내가 주인 되어 사는 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일대 일의 인격적 만남이 반드시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