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출발(3):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3:8-18


 

지난 주에 코넬이 가을학기를 시작하였습니다. 모두들 주 안에서 힘차게 달려 나가기 바라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기도 합니다. 다들 가 보지 않은 길을 매일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다가올지 걱정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도 됩니다. 몇 주 전부터 보고 있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2:48-49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왕이 꾼 꿈을 맞추고 그 꿈을 해석함으로 온 지방을 다스리며 모든 지혜자들의 어른이 되었습니다. 세 친구들 역시 다니엘의 요구에 따라 지방을 다스리게 됩니다. 그들은 각각 왕궁과 지방에서 이전과는 또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 하였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편안 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고난과 시련 가운데로 데려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 세상에서 다루는 방법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느 날 세 명의 친구들에게 힘든 시간이 다가옵니다.

 

3:1절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은 대략 너비 3미터, 높이 30미터 금으로 만든 신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수도가 아닌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웁니다. 그곳이 어디인지 의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고, 주변 나라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어느 곳에 두었을 것으로 짐작 됩니다.

 

웅장한 건축은 왕들의 막강한 통치와 제국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그 유혹을 저버릴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거대하게 만들어진 금 신상은 왕에 대한 개인 우상화는 아닙니다. 오히려 바벨론의 신을 섬기도록 하여 속국들에게 왕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 내려던 의도입니다.

 

2절에는 왕이 각 지방 모든 관원들도 낙성식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3절을 보면 지방을 다스리던 세 명의 친구들도 오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드디어 5절에서 모인 사람들을 향해 악기 소리들이 드릴 때 왕이 세운 신상에 엎드려 절하라는 왕의 명령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6절을 보면 그 명령은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않는 사람은 풀무 불에 넣겠다는 위협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온 사람들 중에는 타국인들도 있었기에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절을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명의 친구들에게도 그 명령은 들렸습니다.

 

하지만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천하의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일지라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전에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1>. 절하는 사람과 세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신뢰가 저항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절을 했을까요? 첫째는, 낙성식에 참가한 바벨론 백성들은 자신의 신 앞에 절하는 것은 너무 자랑스럽고 당연했을 것입니다. 다음은 전쟁에서 패해 속국이 된 나라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신들이 마르둑보다 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힘이 센 신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 친구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그런 사고를 거부 합니다. 유다가 비록 망했지만, 하나님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벌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이 만든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1절은 확실하게 우상에 대한 태도를 보입니다. 신상이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를 먼저 언급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우상에 대해 사 46:7절은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도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만든 피조물이라면 사람보다 못합니다. 그런 것을 신이라 부를 수도 절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국가 의례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하고 타협했다면 엎드렸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왕으로부터 직위를 받아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다른 이유는 왕의 꿈 해석 사건을 통해 진정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2>.

 

2:47절을 보면 다니엘로부터 꿈 해석을 듣고 난 직후 느부갓네살 왕은 그의 입으로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을 정복한 왕의 입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생히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말한 왕이 지금은 하나님 아닌 신상 앞에서 절하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왕의 문제이지 그렇다고 자신의 신앙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입니다<3>.

 

이들이 낙성식에 올 때 신상 앞에 절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왔는지 아니면 현장에서 알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잡혀 왔을 때부터 보여주었던 믿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코넬에 처음 왔을 때 가졌던 결단들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변함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코넬대학도 우상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좋은 직업과 더 나은 미래라는 우상이 여러분들을 향해 절하라, 그리고 하나님 보다 자신을 섬기라고 유혹할 것입니다. 학기가 시작되고 학년이 높아지면서 친구나 선배들이 좋은 직장을 얻어 졸업하는 모습을 보면 나 정말 이렇게 사는 것이 맞아?’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개선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시간이 없어지고 주일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쪽으로 간다면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학부 대학원생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그래서 학기 초부터 다니엘을 보는 이유입니다. 다니엘에게서 배운 것을 두 주에 걸쳐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먼저 단1:8절의 다니엘 처럼 뜻을 정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뜻을 정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어떤 요구들이 일어날 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어떻게 움직일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장에서 세 친구들처럼 어떤 엉뚱한 요구가 주어질지라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믿음을 지켜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든든한 믿음도 사탄은 유혹합니다. ‘하나님 섬기는 시간 대신 너를 위한 시간에 투자해. 그러면 더 나은 삶을 선물로 받을 거야? 옆에 친구를 봐!’ 이런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단6:10절의 다니엘처럼 기도하는 습관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들이 되어 오늘의 나의 믿음이 주님 오실 때까지 견고하게 설 줄로 믿습니다.  

 

지금부터는 다니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는 다니엘 친구들처럼 믿음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물론 하신 분). 특히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이 무능해 보이고 내 기도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신앙을 버리는 분들의 말을 크리스천저널을 통해 들으면,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도 별 도움이 없고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습관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만들어 낸 것이 종교라는 소리가 더 설득력 있게 들려 온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렇게 생각도 해 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고 대면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이때 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합니다. 성도는 뭔가를 행함으로 구원에 이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믿음뿐입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기적을 베풀어 주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도 있습니다. 다니엘 보다 앞선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기적이 눈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적들을 물러가고, 배고픔이 사라지고, 질병들로부터 구원 받는 하나님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늘 이런 기적의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왜 나에게는 이런 하나님이 아닙니까?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단3:18절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고백입니다. 정말 중요한 믿음을 소개하는 곳입니다.

 

구약은 기적을 동원해서 구원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지 않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홍해 바다를 갈랐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나타났고, 요단 강물을 흐르지 못하게 막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기적으로 자신들을 구원해 주지 않아도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기적이 나타나야 할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1). 이런 모습은 초대교회에 더 많이 나타났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잡혀온 성도들을 향해 달려오는 사자의 다리가 부러져 넘어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불 속에 던져질 때 갑자기 천둥이 내려 그 불을 꺼 버리고 성도를 묶은 기둥이 박살 나 버리는 그런 기적도 없었습니다. 처참히 죽어갈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심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다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의 믿음도 여기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적을 보았던 성도들이 보지 못한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2)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은 배고픔과 죽음을 제거해 주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보지 못한 성도들도 여전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그들의 아픔과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그들만 보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함께 하는 하나님을 노출시킵니다. 그 예가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7:55절을 보면 그를 죽이는 사람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자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며 그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하나님 우편에 서서 그에게 힘을 주고 계신 예수를 그만 혼자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주님이 승천하고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는 사건 이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적이 멈춘 것은 아니지만 구약에서처럼 기적이 나타나는 수는 분명 줄어듭니다. 이것은 기적이 없어 하나님이 무능력해 보이고 죽은 하나님처럼 보이는 그런 시대에 우리를 밀어 넣는다는 의미도 될 수 있습니다(#3).  

 

이 믿음이 팬데믹 상황에서 새 학기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많은 분들이 지쳐 있고 뭔가 기적 같은 신선한 충격이 없나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별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있는지 불신이 일어납니다. 습관처럼 내가 예배 드리고 있는지 의심도 생깁니다.

 

이 시대 우리들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고백을 외쳐야 합니다. 자신을 도와 주지 않는 서운한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상에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겨 풀무 속에 던져질지라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단단한 믿음입니다[#1].

 

하나님이 나에게 심지어 섭섭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응답해 주시지 않는 분이야. 그렇다고 나는 서운해 하지 않아. 서운해 할 필요가 없어.” 이런 믿음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고백을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의 고백은 멋진 것입니다.

 

팬데믹이라는 상황을 지나가면서 정말 필요한 믿음은 바로 그리 아니할지라도의 믿음의 고백이라 믿습니다. 6개월이 다 되어 가지만 일 년 이상 더  교회도 나오지 못하는 현실이 되면 어떨까요? 백신에 대한 소식은 있지만 확실하지도 않고 확진 자는 늘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학기는 시작 되었지만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그리 아니할지라도의 믿음이 더욱 필요한 이유입니다. 내가 기대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인정하는 믿음입니다[#3]. 그럴지라도 우리는 주를 원망하지 않고 주만 바라 보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입니다.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일어나도 내가 믿었던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을 세상에 알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세 친구들이 사용 되었습니다. 자신들을 불 가운데서 구해주지 않아도 절하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왕이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왜 그렇게 해야 되지?” 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을 가치가 있어? 죽으면 무슨 소용 있어?” 이 질문들을 그 당시 사람들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들이 되어야 합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니야?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 불 속에 들어가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안잖아? 뭔가 있는 것 같아! 저런 믿음은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

 

부활에 대에 친구들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다시 한번 부활의 믿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3:25절을 보면 세 사람은 불 속에서도 상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아들과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3:27절에서 몸을 해하지 못하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고, 불 탄 냄새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 땅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천상에서의 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부활신앙을 믿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이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믿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실입니다[#4]. 우리에게 왜 부활 신앙이 필요할까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 영원한 생명을 믿지 못하면 어떻게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앞으로 겪어야 할 최고의 시련의 때를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반드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 신앙과 부활신앙입니다. 특히 부활신앙은 우리 믿는 성도들을 죽음까지도 담대하게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 힘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 아니할지라도의 고백은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해 주시고 이 믿음까지 가질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고백입니다[#5]. 이 땅에서 내게 베푸신 은혜와 긍휼에 대한 감사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믿음 가운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들의 고백을 지금 들을 때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면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내 기도 안 들어 주면 원망하고 하나님 떠났던 적이 얼마나 우리 신앙 생활하면서 많이 있었습니까? 이런 우리의 모습이 이제는 사라져야만 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팬데믹 상황에도 하나님은 이렇게 믿는 거야.’ 팬데믹을 보내고 있는 성도님들과 특히 새로운 시작을 하는 신입생들 모두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의 고백으로 가을 학기를 주님과 함께 뚫고 나가시고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