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출발(2): 기도로 준비된 사람 

2:11-19


 

오늘은 2020년 가을학기를 출발하는 개강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먼저 코넬 학부와 대학원 신입생들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리고 포닥으로, 교수로, 비지팅으로 이타카에 오신 분들이 계시면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모든 분들이 다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새 학기인데 서로 만나 뵙지 못해 조금 서운합니다. 하지만 곧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시간이 곧 올 것입니다. 새로운 곳에 오신 분들은 낯설고 어색함은 있겠지만 주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앞으로 학기를 지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 주시고, 교회는 최선을 다해 돕고 함께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교회 건물이 있는 ATH이 가을 학기 동안 닫히게 됩니다. 하지만 온 성도님들이 여러분 곁으로 더 가까이 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기 전 지난 주부터 새 학기를 준비하면서 다니엘서를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출발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코로나19 펜데믹처럼 예상치 못한 일로 인해 기가 막히고, 어안이 벙벙한 일들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뜻 밖의 일을 만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첫 번째는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1절을 보면 어느 날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런데. 그 꿈은 그로 하여금 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장에 나가 장수들을 칼로 눕히며 제국을 이뤄낸 왕이 꿈 하나에 잠을못 잔다는 것은 이해는 잘 안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일지라도 불안과 두려움 앞에 인간은 이처럼 연약합니다(#1). 인생은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고, 세상 것 다 가졌다 해도 두려움이 생기고 잠 못 자고 걱정 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는 것도 같아 보입니다. 2절을 보면 자신이 꾼 꿈을 알기 위해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무섭고 이상한 꿈을 꾸면 그 꿈을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꿈 해석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좀 다릅니다. 5절을 보면 자신이 직접 그 내용을 말하기 보다 누군가가 그 꿈조차 알고 해석까지 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던 이유는 47절에 근거합니다. 누군가 꿈을 알아 맞추고 해석까지 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 지혜자이고 그것을 알게 한 신은 참 신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왕의 이런 생각 때문에 황당한 일을 만나는 <2>두 번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2절의 바벨론의 박수, 술객, 점쟁이, 술사와 13절의 지혜자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점을 치는 것을 너머 국가의 중대사를 왕과 함께 의논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남이 꾼 꿈까지 알아내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계 밖의 일입니다(#2).

 

그렇다고 뒤로 물러 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먼저 하는 것을 4, 7절에서 보면 합리적으로 왕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황당한 요구를 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한 번만 더 설득하면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8절에 의하면 왕은 시간을 지연하려는 술책으로 몰아 버립니다.

 

그러자 이들 역시 반격합니다. 10절을 보면 어떤 크고 권력 있는 왕이라 해도 이렇게 난감한 것을 그들에게 물은 왕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1절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고 오직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하는 신들 외에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정말 어리석은 것은 왕이며 왕이 억지를 쓴다는 뜻입니다.

 

41:24-25의 바로 왕도 이상한 꿈을 꾸고 그것을 설명할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꿈을 해석할 사람들이 없을 때 요셉이 나아가 꿈을 듣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해 줄 수는 있었지만 무슨 꿈을 꾸었는지 까지 알아 맞추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정말 황당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9절에는 사람들의 변명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결국 12절을 보면 왕은 진노하고 통분하여 왕 앞에 온 술객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단지 폭군 같은 왕이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성경의 의도는 아닙니다.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서 이런 사람도 만날 수 있고,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생은 원인도 알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가를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사용해도 풀 수 없을 때 왕처럼 그가 가진 힘으로 폭력을 휘둘러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가지고 설득하다 안 되면 비난하며 책임을 회피해야 될까요? 모든 가능성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왕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바벨론의 지혜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했습니다. 고민도 하고 방법도 찾아봅니다. 그러나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왕 앞에 나아갔던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 못하자 왕을 더 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로 다니엘과 친구들까지 죽게 될 위험에 처합니다. 왕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는 날 천청 벼락을 맞았던 것입니다. <3>세 번째는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들에 의해 문제가 일어나지만 나에게까지 황당한 일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억울해 하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무대의 중앙에 세우기 위함입니다. 다니엘을 가만히 보면 그때까지는 인질로 잡혀와 바벨론의 학문과 지식을 배우는 견습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엮이기 시작한 때부터 다니엘은 사건의 중심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황당함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누가 문제 속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하겠습니까? 다들 편한 것이 좋고 문제 없이 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건의 기획자이며 감독자이십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Ready Action’이라 외치는 감독의 소리에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투덜거립니다. 왜 나입니까? 왜 우리 가족이 되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액션 싸인을 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함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남에게 피해를 주고 심지어 생명까지 헤치는 폭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또 세상 지혜자들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경험과 학문적 지식 그리고 이성적인 접근으로 문제를 풀어가려 합니다. 지혜자들은 인간 차원을 넘어선 영적 파워까지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 해결에는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 하나님이 있다고 말 한마디 안 합니다. 하나님이 빠져있고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 우리를 문제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하나님 없는 어둠에서 빛이 되게 하고, 진리가 없어 섞어 가는 곳에 소금이 되게 하려고 문제 속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상 못했던 기가 막힌 일, 무섭고 떨리는 일이 있어도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인질로 잡혀오면서부터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지금 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바라보며 조용히 하나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때가 되었을 때 그는 사건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15절에 보면 급하게 움직이는 근위대장의 행동을 보며 왕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모든 일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16절을 보면 자신이 스스로 왕에게 들어가 꿈도 알지 못하면서 해석을 알려 주겠다고 말합니다. 다니엘과 친구들까지 죽이라는 명령이 있는 상황인데 왕께 나아가는 것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이나 같습니다.

 

우리 주님을 보기 바랍니다. 죽음과 사망이라는 황당한 문제 앞에 인간들이 고통하고 있을 때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땅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세상의 종교나 지혜자들이 풀 수 없었던 인생의 난제 앞에 해결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죽음 앞에 놓인 인생들을 향해 답이 되어 주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무도 제시하지 못했던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죄로 인한 사망 앞에 어쩌줄 몰라 두려워하고 떨기만 하는 인생 앞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구원자는 될 수 없지만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가진 우리는 상처투성이인 세상 중심에 서야 합니다. 문제에 휩쓸려 넘어지고 쓰러지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역시 죽을 목숨이 될 수는 있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삶의 현장에서는 우리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기 때문입니다.

 

사자 굴을 알고도 들어가는 것은 자기 집을 찾아가는 사자거나 사자보다 더 강해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자보다 강할 수 없고 더구나 사자는 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부활의 믿음을 가졌기에 조심해야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담대히 지나가야 합니다.

 

다니엘의 행동을 보면 무모한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도 왕이 어떤 꿈을 꾸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왕에게 가서 해석까지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1:8절에서 본 것처럼 다니엘이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결단할 때, 1:17절에는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다니엘이 남의 꿈을 해석하는 능력이 있어도 어떤 꿈을 꾸었는지 알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다니엘의 믿음은 작은 일을 만나면 나타나고 황당한 일을 만나면 기가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위와 같아야 합니다. 견고함을 보이며 그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수 없이 내려치는 번개와 비바람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런 견고한 믿음을 지켜 나가도록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분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잔잔하게 늘 주를 바라보고 응답을 기다라며 흔들림이 없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했다는 증거는 먼저 18절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교회는 청년부 중보기도회, 수요자매기도회, 주일 예배중보기도회가 있습니다. 다들 하나씩 조인해서 나에게 있는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 나가시고 힘든 팬데믹 상황 속에서 승리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오래 전부터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내 일도, 주의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새로 오신 분들이나 우리 성도님들 믿음 가운데 있어야만 합니다. 다니엘은 늘 기도의 사람이었기에 황당한 일을 만났지만 믿음에 흔들림이 없이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지난 주 단1:8절에서 ‘뜻을 정하여’ 라고 할 때 왕이 주는 포도주와 음식을 먹지 않는 것만이 그의 결심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6:10절을 보면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며 감사했다’ 말씀을 봅니다. 이미 다니엘은 잡혀 왔을 때부터 기도하기로 결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럴 때 단1:9절에는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니엘은 친구들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도 동일하게 긍휼을 입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단 2:18은 보여줍니다. 왕을 만나고 나온 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사’ 죽임을 당하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 가운데 보게 됩니다.

 

다니엘이 1장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하려고 했을 때 환관장에게 이미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긍휼을 얻은 것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믿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죽을 것 같은 환경에도 죽도록 그냥 두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든든하게 만듭니다. 팬데믹을 통과하는 온 성도님들의 심령 가운데도 이 믿음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께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만이 갖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다니엘은 바벨론의 무고한 다른 지혜자들도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지만 또한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랑의 사람입니다. 팬데믹 기간을 지나면서 얼마나 세상을 위해 기도하느냐가 결국 우리가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의 양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죽고 사느냐 문제 앞에 남들 생각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웃을 위한 기도의 제목을 추가시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구원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다니엘은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월요일마다 금식하며 코로나가 물러 가도록 기도하며 이 땅의 공의와 정의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의 동일한 모습입니다. 세상을 위한 기도가 없다면 교회는 왜 존재하겠습니까? 자신의 복만 구하는 기복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는 통로입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밀함을 보이시고 그분의 움직임을 보여주십니다. 대통령이 움직일 때 경호원들만 동선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특권을 누립니다. 19절을 보면 다니엘은 그날 밤 기도 가운데 환상으로 그 꿈의 실체를 봅니다.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는 무엇보다 우선이 되야 할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다니엘은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하는 기도에 응답하기를 좋아하는 주님께 온 성도가 한 마음 되어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기 원합니다.

 

기도하는 공동체는 응답이 빠릅니다. 반드시 주님은 힘든 우리 삶에 답이 되어 주시고, 개인과 가정과 자녀들 위에 지혜와 지식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회복되는 은혜를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백신을 개발하는 팀들에게도 안전하게 검증된 약이 빨리 개발되도록 반드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 하십시오.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 나아가십시오. 이 땅에서 고난 당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무너진 이 땅의 공의와 정의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먼저 뜻을 정하신 분들은 이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응답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