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출발(1): 뜻을 정하고
단1:1-10
사람들은 결심하기를 좋아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침이 오면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를 출발합니다. 또 새해가 오면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대학 캠퍼스는
늘 새 학기가 시작되는 가을학기는 어느 때보다 더 결심들이 많이 생겨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음 주부터 2020년 가을학기도 그렇게
출발할 것입니다. 단지 올해는 팬데믹으로 조금 더 힘들게 시작할 뿐입니다. 이미 많은 시간들을 경험해서 그래도 대처하기가 좀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입생들과 미국에 처음 와서 생활해야 하는 분들은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먼저 코넬 입학을 축하하고 이타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식도 못하고 대면으로 모이는
것조차 학기 내내 안 되는 형편이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힘든 시기에 새로운 결심으로 출발하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고 힘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단단한 결단을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8절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였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은 결심하다, 새번역은 마음을 먹고, NIV: resolve, KJV: purposed
in his heart, NASB: made up his mind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뭔가
목표를 세워 마음으로 단단히 결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이런 결단을 하게 되는 배경이 먼저 소개됩니다. 1절을 보면 바벨론은 여호야김의 삼 년째 되는 해에 유다를 침공합니다(주전605년, 왕하 24:1). 그리고 2절은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바라보는 다니엘의 시각을 밝힙니다. ‘주께서
유다 왕과 성전 기구 얼마를 넘겼다’는 표현에서 이 사건의 주체가 하나님을 확실히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성전기구를 가져온 바벨론은 그들의 신인 마르둑이 여호와를 이기고 영적
세계까지 다스리게 되었음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서술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사건들에 일일이 개입하고 있는 하나님을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한편, 무력으로 주종관계를 맺은 바벨론은
제국들이 했던 세상 방식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합니다. 3-4절을 보면 왕족과 귀족들의 자녀를 볼모로 잡아갑니다. 이것은 유다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와(병자호란 청에 소현세자)와 인류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일단 무력으로 눌려 놓고 유다를 길들이려는
제국의 의도였습니다.
당시 느부갓네살 왕은 한창 영토를 넓히는 중이었습니다. 북쪽 앗수르와 리디아를 점령하고
남으로 기수를 돌려 애굽을 삼키려는 구상을 하던 때입니다. 가는 도중 조그마한 유다는 그냥 지나갈 수
없어 일단 군사적으로 눌려놓습니다. 그리고 고분고분 따르게 하기 위해 왕족과 귀족 자제들의 인질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인질로 잡혀온 다니엘이 왕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는 결심은 애국심 강한 한 소년의 기특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부모들도 그들이 잡혀가기 전에 단단히 살아야 한다는 것 가르쳤을 것입니다. 귀족자제나
왕족이라면 잡혀 오기 전 왕실에서 민족적 자부심 정도는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국심에서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바벨론 학문과 언어를 배우기를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자신의 이름을 바꿀 때 완강하게 저항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받아들이고 이제 와서 왕이 주는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뭔가 이상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방신을 섬기고 난 뒤 왕이 주는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그의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1). 10절에서의 환관장의 반응을 보기 바랍니다. 만약 다니엘의
명령을 받아주면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도 위태롭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의 요청은(ask for: 8절)은 환관장에게서 일단 거절 당합니다.
다니엘의 결심은 왕의 명령에 대한 직접적인 거부이며 제국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2). 환관장도
왕의 명령을 직접 받아 수행하는 자였기에 그의 명령만으로도 다니엘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9절에서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결단을 할 때 하나님은 생명까지도 지켜 주십니다(#3).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긍휼입니다. 환관장에게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의 결심을 그만 두지 않습니다. 11절을 보면
다니엘은 환관장이 잡혀온 소년들을 감독하게 한 사람에게 한 번 더 청합니다(12절: Please).
다니엘의 이런 행동을 볼 때 우리가 결심을 할 때 안되면 말고가 아니라 끝까지 가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4). 그러나 그것은 내가 결심했기에 의지로 밀어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사건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2절에서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단입니다(#5).
왕이 명령하고, 환관장이 거절한 것을 그 밑의 감독이 허락할 리 없습니다. 그러나 뜻을 정한 자에게 하나님은 다른 길을 찾는 지혜를 주십니다(#6).
17절을 보면 “학문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에서 주셨다는 단어를 두 번 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뜻을 정한 분들에게 동일하게 도울 사람이
보이고, 길이 열리고, 방법이 생각날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한 가지가 궁금합니다. 만약 나라면 다니엘과 같은 결단을 할 수
있을까? 자기 생명까지도 내어 놓겠다는 결심 속에는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믿음을 버릴 수 있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을 위해 살아줄 단 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다니엘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바램 때문에 이루어지는 믿음의 결단이어야 합니다#7). 이
믿음 때문에 생명까지 요구하는 환경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결단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인질로 잡혀 온 세 친구를 포함하여 용모와 지혜와 지적 능력을 갖춘 소년들의 수가 상당했음을 보여줍니다. 귀한 집 자식들입니다. 유다에서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좀 편하게 자랐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의 삶 역시 인질이라는 신분만 빼면 좋은 곳에 살고, 입고 먹고 날마다 쓸 것
부족함이 없었습니다(5절). 그러면 제국이 제공하는 편안과
보장된 지위를 누리며 바벨론에 충성하며 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이도 든 소년들임을 암시해 줍니다.
4절에서 소년들이 용모가 아름답고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한 소년들이라 말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들은 십대
중반을 넘어 후반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나이를 떠나 세상을 보는 눈과 상황을 읽어내는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더 약해지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생활에 만족하며 순응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현실만 추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다른 친구들보다 더 빨리 바벨론에서 출세할 수 있을까? 현실적인
고민을 더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밀어내고 뜻을 정한다는 것은 참 힘든 결단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 위해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 힘듭니다.
그런데 안락한 삶 속에서 출세까지 보장되어 있다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결심하기도 쉬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삶이든 쉬운 환경이든 하나님 알지 못하는 이 땅에서 성도가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만 드러내기를 바라는 아버지를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8).
다음은, 나의 결단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니엘의 영향력은 1장에서는 바벨론
왕의 신하들까지만 제한 됩니다. 하지만 다음 주부터는 온 바벨론 백성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인물로 부각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나중 끌려온 유다 포로들에게도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됩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인질로 온 후 거의 20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유다 포로민들이 발생합니다. 8년이 지난 주전 597년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여호야긴 왕이 1차 포로로 끌려옵니다.
왕하 24:12절에 의하면 그때 왕은
물론 그의 어머니와 왕비들, 신복들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과 내시들이 함께 잡혀옵니다. 13, 14절에는 이때 엄청난 양의 재화와 인적 자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져옵니다.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모두’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사용합니다.
전쟁에 나갈 사람들과 기술자들 까지도 다 잡아 옴으로 유다에 비천한자 외에는 남은
자가 없었다고 말해 줍니다. 포로들은 대부분 유다를 다스리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도자들이고 최고의 기술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포로가 된 이들의 실망과 좌절은 어떻겠습니까?
가족과 집을 잃고 삶은 파괴되고 직위는 빼앗겼습니다. 낯선 땅에 끌려와 이제는 포로라는
신분으로 살아야 합니다. 군인들은 명예를 잃고 바벨론 도시를 건설하는 노동자로 전락합니다. 자신들이 섬기던 성전을 수리하던 기술공들의 좌절감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이런 박탈감 속에 있던 포로민들에게 다니엘은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나라가 망한 유다
포로민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롤 모델이 됩니다. 포로민들이 도착하지 마자 그들은 앞서
인질로 온 자식들의 소식을 들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과 접촉할 기회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힘들었을
것입니다.
단 2:48-49절에 의하면 다니엘은 전국을 다스리는 자리에 앉아 왕궁에 살게 됩니다. 친구들은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로 나갔을지라도 다니엘의 이야기는 소문을 통해 퍼져갔을 것입니다. 유다 포로민들은 앞서온 다니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용기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1:21절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가 바사제국까지
살았음을 말해 줍니다.
특히 다니엘은 바사 왕 고레스 원년까지 있었다고 말합니다. 고레스 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스 1:1, 3에 의하면 유다
포로민들에게 귀환하는 칙령을 내리는 왕입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70년의 긴 시간 동안 포로민들에게 계속해서 신앙을 지켜 나가게 하는 샘물과 같은 역할을 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8).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문화 속에서 신앙은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가? 삶이 어렵고 힘들
때 어떻게 바로 서야 하는가? 살기 막막하고, 낯선 땅에서
실망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고 싶을 때 누가 도와 주겠습니까?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아야겠다는 바른 결단을 갖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팬데믹을 격으며 새 학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까지도 영향력을 미칠 줄 믿습니다. 코넬대학은
여러분의 출세를 보장해주는 name value를 가진 명문대학입니다.
이곳에서 너무 현실과 환경만 보면 내가 품은 꿈과 야망에만 메몰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 오기 위해 투자한 노력과 시간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새 학기가 시작되면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바쁜 스케줄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주 안에서의 믿음 생활만큼은 잘 할 것이라는 결단이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쁜
일정 가운데도 시간을 드리고 자신의 재능을 드리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겠다는 결단이 모든 분들의 심령 가운데 있을 줄 믿습니다.
이런 결단은 늘 환경에만 너무 집중하지 않고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바라 보아야만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다니엘처럼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뜻을 정한 다니엘과
같이 기존 성도님들은 물론 이타카에 새로 오신 분들 모두가 다음에 올 후배들에게 남겨줄 믿음의 좋은 롤모델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미 졸업하고 이곳을 떠난 역대 청년부원들이나 성도님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며 믿음을 세워 나갔던 분들입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우리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뜻을 세우며 각 영역에서 섬겨 주시는 귀한 분들입니다. 새로 오신 여러분들도 함께 결단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 나가는 일에 동참해 주실 것을 부탁 드립니다.
누구나 다 결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는 결심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나의 희생과 바꿀 수 있는 용기 있는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맹목적으로 밀어 붙이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믿음의 결단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인 결단이어야 합니다. 이때 다니엘
처럼 함께 하는 믿음의 친구들이 있으면 힘이 됩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교제와 대면만남이 줄어든 상황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가 제공하는 성경공부
목장모임 등 친교의 자리로 나아가서 믿음의 친구들을 만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나의
작은 결단이지만 주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한다는 선한 부담을 갖기 바랍니다.
캠퍼스는 우리로 하여금 매 순간 마다 결단을 요구합니다. 합리적인 것을 따지고 이성적 접근을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이라는 절대자를 바라보는 시간보다 세상을 지향하며 연구하고 학문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이미 이 환경 속에 들어와 있거나 관련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다니엘과 같은 결단을 할 수 있습니까? 다니엘의 결심은 사실 따지고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니어야 정상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따르는 유대인라면 다 그렇게 말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며 살던 유대 사람들이 이방 땅에 산다고 막 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함께 인질로 잡힌 유다인 모두가 다니엘과 같은 결단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 만을 위해 살겠다는 선한 뜻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벨론에서 유다 공동체를 영적으로 이끌어 가는 주 핵심 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런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을 더하셨습니다.
그런데 시 106:46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그들을 사로잡아 간 모든 나라들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는 다는 약속을 발견합니다. 다니엘서는 환관장으로부터 긍휼을 얻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 106:45절은 하나님은 사로잡혀간
이스라엘을 위하여 언약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베푼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또한 약속하신 말씀 때문에 뜻을 정하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을지라도 묵묵히 주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성도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사 43:2). 이 약속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코로나 팬데믹은 어떤 분에게는 우리를 위협하는 물이요 강이요 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해도 주지 못하게 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코넬한인교회 성도님들과 새
학기를 출발하는 분들 한 분도 예외 없이 이 말씀 붙잡기 원합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 살겠다는 결심으로
좋은 결실들이 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