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10): 은혜 가운데 드림 

고후 8:1-5

 


7/23일에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길 바라면서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을 연구 기금으로 KAIST에 기부한 분이 있었습니다. 전에 기부한 것까지 합치면 766억 원이라고 합니다. 경기여고, 서울 법대를 나와 기자 생활을 마치고 축산업과 부동산 업을 하며 돈을 벌었다고 하는 이수영 광원산업 여 회장입니다.

 

이 분의 인터뷰를 보면서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는, 이번 만이 아니라 몇 번에 걸쳐 KAIST에 거액을 기부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더 추가 기부를 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혔습니다. 다른 하나는, 첫 기부를 하고 난 뒤 KAIST와 인연을 맺고 현재까지 발전재단 이사장 직을 본인이 맡아 KAIST에 애착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말은 오랫동안 가까운 곳에서 지켜 본 결과 KAIST가 인류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이런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일회성의 기부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큰 기부가 가능했던 것은 KAIST와의 관계 속에서 기부의 기쁨을 맛보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 성도님들 역시 주님께 드리는 즐거움을 맛보는 순간 물질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와 시간을 드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지속적인 드림의 즐거움이 신앙생활 가운데 자리 잡기를 소원합니다. 이 즐거움 때문에 30년이 넘게 자신을 드리는 성도를 두 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한 분은 자신이 갖고 있는 달란트를 어린이들을 위해 교회 교사로 평생 섬겨 온 권사님이십니다. 다른 한 분은 기업의 CEO로 매년 한 해도 빠짐없이 거의 30년 가까이 단기선교를 다녀오는 장로님입니다. 미국에서 자수 성가한 분으로 정말 할 일이 많은 분임에도 불구하고 주 안에서 시간을 드리는 즐거움을 아는 분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런 스토리를 하나 만들어가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설 때 너 나에게 이야기 해 줄 것 없니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평생 따르면서 주님께 드렸던 즐거운 이야기를 5분 정도는 주님 붙들고 할 수 있는 코넬한인교회 성도님들이 다 되기를 도전 드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기부문화가 있다면 교회에는 성도들의 헌금생활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 보고 있는 고린도후서의 8장과 9장 두 장에 걸쳐 연보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헌금에 대해 많은 질문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많은 질문이 생길 때는 더 근본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뭔가를(특히 물질) 요구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또한 스스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이십니다. 우주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라면 이 세상 전부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피조물인 우리에게 달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에 비하면 우리가 가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알렉산드 대왕이나 징기스칸 같은 사람이면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포춘지에 매년 실리는 세계의 부자들이면 가진 것 좀 달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 가지고 남은 것 나눠 먹고 사는 우리들에게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조금은 속이 좁아 보입니다.  

 

비유를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모는 맛있는 것이 있으면 아이 앞에 놓아주며 먹으라고 줍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 것처럼 자기 앞으로 다 가져갑니다. 그러다 잠시 냉장고에 가서 목마르지 않도록 음료수를 좀 가져다 주려고 갔다 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먹는 것 하나 달라고 합니다.

 

바로 이 장면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것 못 만드실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왠지 같이 함께 있고 싶고, 같이 나누어 먹고 싶고, 우리가 하는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너 가진 것 줄 수 있니? 라고 묻는다고 봅니다.

 

아이가 손에 쥐고 있는 것 하나 꺼내어서 아빠 입에 쏙 넣어주면 너무 사랑스럽고 귀엽고 안아주고 난리 납니다. 또 안 준다고 해서 안 귀여운 것도 아닙니다. 안 주는 모습 그것도 귀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아이에게 훈련이 들어갑니다. “나누어 먹어야 돼.” 뭐 이런 소리입니다. 

 

게다가 좀 나이든 아이면 부모는 조금 다르게 취급합니다. 아이가 바르게 잘 자라도록 훈련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부모님들은 그러면 안돼. 나누어 먹어야지. 아빠도 주고, 이웃 아저씨도 주고, 친구들과도 나누어 주라고까지실제 훈련을 하곤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우리 육신의 아버지와 같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하나님의말씀들이 있습니다. 하나가 헌금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난 뒤 하나님께 많이 드리면 복 받는다는 말을 부흥사님들을 통해 듣곤 했습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헌금에 관한 것은 담임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강한 말씀은 전하면서 성경에 있는 헌금에 관해서 말 안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많이 드리면 복 받는 다는 말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드리기 전에 꼭 알아 둘 것을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를 말할 때 복보다 먼저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도님들이 드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위해 일하고 나면 나중에 받는 것을 이라 말합니다. 복은 하나님 일을 하면 이런 놀라운 것을 계속해서 받는다는 학습 효과와 같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은혜는 복과 하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일을 선듯 자원하거나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대부분 없습니다. 특별히 처음 하는 일이고 어려운 것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 일 전에 미리 성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두 곳을 보면서 확인을 하려고 합니다. 6:8절을 보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은 분명히 방주를 짓기 전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배를 만드는 일 그 자체가 힘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긴 시간을 이겨 나가는 것은 더 어렵고 지치는 일일 것입니다.

 

은혜가 있어야만 내 힘으로 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시간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은혜는 환경으로부터 느끼는 인간 한계를 뛰어 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은혜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와야만 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위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나중 홍수 심판이 있은 후 노아에게 주신 것을 이제 보고자 합니다. 9:1절을 보면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입니다. 굳이 은혜다 복이다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좀 세밀하게 본문을 살피면 시간 차이가 있음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알아두면 기도 할 때 내가 지금 무엇을 구해야 하는 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이 원리를 지금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있으면 정말 가보지 않은 가을 학기라는 도전의 시간을 걸어가야 합니다. 학교 측에도 거의 매일 학생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있지만, 예측 가능한 것은 불안뿐입니다. 이런 시작을 앞에 두고 우리는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먼저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가 흘러 가는데 통로가 막히지 않도록 회개가 우리 가운데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가뭄에 필요한 비가 올지라도 흘러가는 길이 막혀 있으면 그것은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속에서 거의 5개월을 지나면서 잃어버린 하나님 관계를 회복하기 바랍니다.

 

또 물이 흘러가는 관이 터져 있다면 정작 갈증이 있는 곳까지 물은 흘러 갈 수 없습니다. 구멍 난 곳을 막아야 합니다. 깨어진 곳을 보수 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삶의 자리로 다시 나아오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가을학기 목장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혹시 모임이 있다면 회개의 기도를 집중적으로 갖기를 바랍니다. 

 

새로 오시는 분들이 아직은 많이 없어 새 목원들이 없어 서로 잘 아는 분들입니다. 새 학기는 늘 새로 오시는 분들 환영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가을학기는 방학 동안 주님이 주신 힘 가지고 나아가기 바랍니다. 새롭게 오시는 분들이 주위에 있으면 목장으로 잘 인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자 그러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헌금생활에서 일어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고후 8:1절 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케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바울이) 너희에게(고린도교회) 알린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회들에서 있었던 일을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2절을 보면 마케도냐 교회들이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일이 있어났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은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2절은 환난과 많은 시련 가운데 있는 그들의 형편이 소개 됩니다. 물질이 없어서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극심한 가난 가운데도 풍성함이 넘쳐 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결국 우리의 먹을 거리가 없어지고, 호주머니에 쓸 재화가 없는 이 때에 은혜를 더 풍성하게 부어주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이들이 겪은 시련은 성경 학자들에 의하면 그 당시 마케도냐 일대에 일어났던 지진으로 몹시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분명 바울이 환란과 시련 그리고 극심한 가난을 언급하기에 정확하게는 어떤 일 때문이라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힘든 상황은 분명히 존재 했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는 2절에서 언급된 풍성한 연보그리고 20절에 거액의 연보는 불가능합니다.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앞으로 어려운 형편이 계속 될 것이 예상됩니다. 게다가 당장 어려운 형편인데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습니까? 안 돕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만약 돕는다면 정말 조금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 생겨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체험하는 수단들을 성경은 소개합니다. 그 중에 물질을 드리는 것도 하나라는 사실을 본문은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헌금을 했다는 것이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어려운 상황에도 흘러 넘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경험은 예수님 사역에도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사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덩어리가 기적의 불씨였다는 사실은 요한복음만 알려 줍니다(6:9). 자기 배 고프다고 안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어 놓습니다. 은혜는 나이도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먹을 것을 아이들에게 다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있는 것 다 먹고 정말 남은 것이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이 아이 역시 남들 모르게 자기 입으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마음에 주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은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는데 한 사람이 쓰임 받도록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은혜라고 합니다.

 

노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세상을 뒤덮을 홍수가 날 테니 배를 지어 준비하라는 말씀에 따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교회도 여러 헌금들과 선교사님들을 돕기 위한 손길들이 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도 시간과 달란트를 드리는 성도들을 여전히 있게 만드십니다.

 

은혜 가운데 이루어 지는 것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2절에서 언급되는 넘치는 기쁨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늘 내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은 주님 안에서 기쁨 가운데 내가 움직이고 있느냐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기쁨 속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억지로 아니면 눈치 때문에 주님 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직장생활 할 때 느끼는 그런 의무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에 의무감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들보다 기쁨이 앞서야 합니다. 여기서 기쁨은 자원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본 은혜의 메커니즘을 보면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은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우리 가운데서 나타나게 만드는 신앙생활의 매개체들이 있습니다. 성도가 가진 시간이나 달란트 그리고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드릴 때 더 구체적으로 은혜는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의 일을 할 때 내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적까지도 체험하게 만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고, 영향력을 주어 다른 성도들도 사역에 동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렇게만 은혜가 늘 작동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늘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은혜는 우리 속에서 감동으로 출발합니다. 감동은 일종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감정은 이성에 의해 점검을 받습니다. 그래서 늘 감동은 있지만 우리의 이성이 환경을 보기 시작하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마케도냐 교회들은 달랐습니다. 2절에 의하면 환난이나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이 있었고 극심한 가난이라는 환경에도 풍성한 연보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교회들은 하나님 주시는 은혜가 은혜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의지의 순종 때문에 일어납니다. 의지도 이성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의지가 환경을 보지 않고, 내 속에서 내려지는 판단에 따라가지 않도록 하게 만드는 것이 성도에게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모든 정보가 우리 속으로 들어오고 감정이 감동을 일으키고 이성이 판단을 내려도 거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최종적인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의 특징은 즐거움입니다. 이 즐거움 때문에 환경보다 더 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즐겁다고 하니 감정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 가득함 믿음 견고함 자신감 등 설명이 불가능한 단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과 귀에 너무 의지하지 말고 성령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면 이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5절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말속에는 그들이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의지가 내 속에 임재하는 성령님께 굴복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5절에서는 그들이 먼저 자신을 드리고라고 표현 합니다. 그리고 난 뒤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도를 섬기는 일에 참여하면그 결과는 3절에 의하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자원할 수 있게 됩니다.

 

8:14 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며, 그분의 인도함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적 판단에만 따르고 성령의 말을 거부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님들 가운데 물질을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느냐 고민하는 갈등이 없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들려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여 어려움 가운데도 넘치는 기쁨과 자진하는 마음으로 주께 시간과 물질과 달란트를 드릴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