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9):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근심  

고후 7:9-11


 

요즘 여름 철이기도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생활 리듬이 변해 밥에 잠을 잘 못 자는 분들이 많다고들 합니다. 게다가 코로나가 장기적으로 가면서 염려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새 학기를 맞이해야 하는 우리 청년들은 가을 수강신청부터 걱정이 됩니다. 초중고 대학의 우리 부모님들도 자녀들 못지않게 새 학기가 근심이 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기우’(기인지우)라는 말이 있는데요. 춘추전국시대 중국에 ‘기’ 나라에 사는 한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지 않을까 늘 근심했다는 것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것을 너무 과하게 걱정하고 두려워할 때도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사실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몸에 안 좋다는 것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속될 때 불면증 그리고 우울증까지 올 수 있습니다. 15:13절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 고 합니다. 정신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몸까지 상하게 할 수 있음을 잠 17:22절은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마 6:25절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게다가 마 6: 34절은 너무 오랫동안 근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걱정을 하지 말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상황에 예민한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캠핑을 가면 일기예보도 좋은데 텐트 주위에 물고랑 파고 대비를 철저히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예민함이 예상하지 못한 폭우를 만나 도움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예술과 문학분야에서 걸작들이 스트레스와 고뇌 속에서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도님들도 근심이 생기면 잠도 못 자는 일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기도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근심과 고뇌로 인해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약의 한나가 그 좋은 보기 입니다. 그녀는 좋은 것 먹고, 입고 여행하며 불편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그녀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남편의 사랑으로 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삼상 1:5절에 의하면 남편 엘가나가 그녀를 사랑하여 제사를 드리고 난 뒤 얻는 제물의 분깃을 갑절을 더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나가 기도의 사람이 된 것은 그녀를 괴롭히는 한 여인 때문입니다. 삼상 1:6절은 그녀의 “적수 브닌나가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고 말합니다. 브닌나는 임신하지 못하는 한나를 매우 상심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 근심이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과 깊이 대화를 나누는 사람으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나는 나중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이스라엘 역사에 내어 줍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왕정으로 나아갈 때 마지막 사사로 쓰임 받습니다. 두 왕을 세우며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길러내는 스승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한나의 개인적인 근심 가운데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에도 고민하고 근심하던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봅니다. 도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고 실망합니다. ‘혹시 제자들과 가까이 하다 잡히면 어떻게 될까?’ 이런 근심으로 제자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던 때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요한복음 20장은 잘 보여줍니다.

 

1절은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부활 사건이 일어납니다. 19절은 같은 날 저녁에 이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모였고 주님은 그곳을 찾아옵니다. 24절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도마는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25절을 보면 나중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알려주지만 도마는 여전히 불신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실망과 부활에 대한 불신으로 고민하는 그의 모습입니다.

 

그런 그가 26절에서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8일 뒤에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오게 됩니다. 낙망하고 근심하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다시 그 자리에 와 주십니다. 그 순간 그가 가진 의심과 두려움과 근심이 사라집니다. 28절에 주님에 대한 그의 위대한 고백은 나중 인도에까지 가서 그를 순교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여기까지 말씀을 나누다 보니, 한편으로는 세상 일에 집착해서 근심에 빠져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심으로 출발하지만 주 안에서 기도의 사람이 되어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좋은 결과를 낳는 근심을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근심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고후 7: 9, 10, 11절에서 세 번을 말합니다. 그리고 해 보았자 아무런 영양가가 없는 것을 10절은 ‘세상 근심’이라고 말합니다. 9-10절은 두 가지 근심을 구별하기 위해 회개가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지 3가지를 조건으로 제시합니다.

 

먼저 세상 근심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3:8절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숨는 것은 처음으로 인간이 근심하는 모습입니다. 근심 가운데 있는 아담에게 던져진 질문은 ‘먹지 말라 한 그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 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있게 한 그 여자가 주어서 먹었나이다’ 라고 창3:12에서 대답합니다.

 

자세히 보면 아담은 근심하지만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1). 먼저 하나님을 원망하며 여자 탓으로 돌립니다. 이것으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불렀던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이웃인 아내에게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2). 그리고 영원한 생명인 구원이 아닌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영원한 사망이 들어오는 저주를 받습니다(3).   

 

아담과 같은 자기변명과 합리화는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나의 죄로인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그런 태도는 회개가 아닙니다.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를 솔직히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다라는 자리가 회개의 자리입니다.

 

다음은 가롯 유다를 보려고 합니다. 26:15절은 가롯 유다가 주님을 은 30에 팔아 먹습니다. 그리고 그의 세상적 근심이 시작되는 모습을 마26:16절은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고 소개합니다. 세상 근심을 보기 바랍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임을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가 판 스승이 누구인가를 영적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인간적(3), 윤리적(선생), 상식적인(착한 일) 차원에서라도 생각했더라면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돈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세상 근심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고하는 것을 차단시켜 버립니다.

 

입맞춤으로(26:48) 예수님을 군인들에게 넘겨주기까지 가롯 유다에 대해 마태복음은 놀라운 기록들을 남기고 있습니다. 26:21절에 주님은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릴라”고 모두에게 알립니다(#1). 그리고 22절에서 제자들은 각각 자신인가를 주님께 묻습니다(#2). 유다도 물었을 것입니다.

 

세상 근심은 양심조차도 무시하며 자기 이익만을 챙기도록 몰고 갑니다. 주님은 23절에서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 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롯 유다는 끔적도 안 합니다. 24절에는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뻔하였느니라”고 경고합니다(#4).

 

그런데 정말 놀라게 하는 것은 25절에서 유다가 주님을 향해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은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분명히 유다를 지적합니다(#5).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요? 그 답은 요13:2절을 보면 사탄이 이미 그에게 예수를 팔 생각을 집어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다가 사탄의 미끼가 된 것은 요12:6절에 의하면 제자들의 돈궤를 맡은 사람으로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갔다고 말합니다. 돈에 욕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딤전 6:8절은 성도를 향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 알라고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보물을 쌓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탐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딤전 6:9-10절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라고 경고합니다. 

 

세상 근심의 가장 치명적 부분은 영적인 것에 무관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가롯 유다가 진정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안았음을 보기 바랍니다. 다른 제자들은 마16:16(베드로의 고백)에서와 요20:28절의 도마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는 위대한 고백들을 남깁니다. 그도 그런 고백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늘 주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26:25, 49). 세상적인 ‘선생’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병자들을 고칠 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는 주님의 말씀을 수 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못 들어도 주님이 일으키는 기적들은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야, 구원자, 주님, 하나님으로도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근심은 회개와 구원과 같은 것에 전혀 무관함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내 죄의 문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복 받는 일, 기분 전환하는 곳, 사람 만나 네트웍 만드는 일, 세상 보다 좀 좋은 사람들 가면 만나겠지, 정신적 스트레스 푸는 곳으로 보일 뿐입니다.

 

세상 근심은 예수를 만나 복음을 들어도 회개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그 이유는 가롯 유다처럼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무관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속은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번도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 조차도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마침으로 하나님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는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내 심령의 자리에 하나님 말씀 앞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오면 자기 자리를 내어줍니다. 회개가 없다는 것을 예수를 자신보다 아직은 낮게 생각하고, 주님으로 모실 수 있는 겸손이 아직 생기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 근심은 걱정과 슬픔에 대해서만 마음 아파하고 걱정합니다. 그러다 자포자기하고, 한탄과 절망하며, 자기 합리화를 찾고, 원망과 분노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에게도 위험한 인생을 삽니다. 우리는 이런 죄를 피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는 근심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고후 7:11절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만들어내는 특징을 소개합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간절하게 합니다. 목적어는 생략 되었지만 성공, 건강, 돈이나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풍요로움으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잘 살아 배고픔의 아픔을 상실하고 이웃의 아픔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큰 사고와 뉴스에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만 정말 옆에서 신음하고 아파하는 내 이웃의 고통에는 무관심하고 나태합니다. 다들 이름 내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만 쏠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보여준 사랑이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조차도 싫어하는 영적 무감각에 빠져 있습니다. 대관절 우리의 근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녀 진학 직장 성공 업적 재산이라는 물질주의에 성도들 조차도 메몰 되고 있습니다. 드리는 예배조차 형식화 되고 영적 감각도 무뎌집니다.

 

찬양에 가슴 뛰는 분들이 줄어듭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에 싫증이 납니다. 세상에 이단들이 이렇게 설친다는데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성실과 뜨거운 열정과 절박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삶에 목마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되는 세상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캠퍼스는 어떻습니까? 주님께 나아가 간구하는 시간에 투자하기 보다는, 실력과 성과를 쌓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무한 경쟁 속에서 신앙인의 가치인 겸손과 배려와 사랑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선 발전 등이란 명목으로 비판할 것만 찾는 사람이 뒬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근심이 우리 가운데서 시작 되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경건을 회복하고 기도의 열정을 되찾고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하는 근심은 생명 있는 회개로 나아가게 합니다. 회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열매를 통해 구원 받은 백성임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열매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입증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회개와 그 열매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한번 보기 바랍니다. 내 십자가가 없다면 있어야 합니다. 너무 가볍다면 다른 성도가 감당하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나누어야 합니다. 내 십자가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는 근심이 전혀 없고 세상 근심으로만 채워져 있는 삶이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는 근심을 들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통해 예수를 내 안에 모시고, 주를 향한 열정과 거룩을 회복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좋은 것들이 내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초조 분노 불안과 염려 우울감 만을 만들어 내는 세상 근심의 사람이 되지 말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있는 청년부들이 있을 줄 압니다. 팬데믹으로 인턴 자리가 날아가고 job market이 열리고 있지 않는 지금 현시점입니다.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두 가지의 근심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직장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세상 근심보다는 불안에 떨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함께 해주시는 주님을 선택하십시오. 

 

나의 약한 부분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동요를 붙잡아 주시고 이 힘든 상황에도 헤쳐 나가는 지혜를 허락하는 성령님을 찬양하는 청년들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 뜻 가운데 근심하는 자들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고, 집 나간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는 복을 누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힘든 분들이 있는지요? 자녀로 인해 걱정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재정적 손해를 본 분들이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있다 해도 세상 근심을 선택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하는 근심을 시작할 때 주님만을 의지하지 못하고 사는 나를 불쌍히 여겨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이 은혜 가운데 하나님과 관계가 부족했음을 내 입술은 시인하게 됩니다. 하나님만 생각하고 주님만 인정하고 성령님만 의지하는 근심은 우리를 평강으로 충만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 은혜, 성도라면 반드시 맛 보아야 합니다. 스트레스만 내 속에서 쌓여가는 세상 근심을 이제 버리기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고 우리 삶을 풍성케 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심이, 힘들고 어려운 팬데믹을 통과하는 우리 코넬한인교회 성도님들 가운데서, 더 많아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