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8): 거룩이 주는 위로
고후 6:16-17, 7:1
저는 예수 믿고 난 뒤 성경을 배우면서 가장 어려운 개념들 중에 하나가 ‘거룩’ 이었습니다. 거룩 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무엇이 거룩이며, 왜 거룩해야 하며,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는가? 등에 대해 질문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동물 제사나 거룩에 관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거룩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질문들이 쉬운 것들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거룩과 비슷한 개념들인 경건, 온전, 정결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구절을 일단 제외하겠습니다. 단지 신약에서 같은 원어에서 번역된 ‘거룩’ 이란 단어가 들어있는 말씀들만 찾아 출발을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고전 1:30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거룩의 개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우리 성도들에게 공유된 것임을 말씀합니다. 거룩은 인간이 스스로 자체 생산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있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인간은 죄로 인해 거룩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 종교들이 ‘우리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하지 못하는데 신이 되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불가능하기에 만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찾아와서 거룩을 선물로 주실 계획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다음은, 살전 3:13은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에게 준 거룩을 다시 주님이 이 땅에 찾아 올 때까지 간직하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난 순간부터 일생을 통해 거룩은 요구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을 이 세상에서 계속 유지시켜 나갈 책임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잠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이런 모습을 이스라엘을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제, 어떻게 거룩해졌을까요?
고전 10:1-2절은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씀합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출애굽 당시 홍해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거룩해졌다고 알려줍니다.
고전 10:3절의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공급하는 만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고전10:4절에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거룩을 이스라엘은 삶에서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러다
율법을 어길 경우 다시 거룩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의 자리인 제사로 나아갑니다. 이스라엘의 본보기는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거룩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해줍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룩을 주려고 했을까요? 살전4:3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와
살전 4:7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라고 말합니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관점에서 거룩을 보게 만듭니다.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생겨난 것입니다. 창 3:8절에 의하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에덴에서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낯을 피해 숨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소리가 나면 달려 나갔습니다. 이번에는 나타나지
않자 처음으로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창 3:9절에서 인간을 부릅니다.
창 3:10절을 보면, “네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라고 답합니다. ‘벗었다’는 것은 거룩을 상실함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는 ‘정녕 죽으리라’는 사망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에덴으로부터 추방을 당합니다. 거룩을 상실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 해졌다는 뜻입니다.
비유를 하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가 놀다 먼지와 진흙 그리고 오물까지 잔뜩 묻히고
들어옵니다. 부모가 그 아이를 식사 자리에 바로 오도록 할까요? 식사
자리에 앉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깨끗하게 오물을 제거하도록 샤워부터 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샤워는 물론 먹을 물도 없는 형편이라면 어떨까요?
그냥 먹어야겠죠. 여기서 살펴 볼 것은 손 씻을 물도 없는데 먹는 음식은 제대로 씻어 음식을
준비했겠습니까? 그러니 에덴을 떠난 인간은 아프고 병 나고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살아가는 모습이라면 너무 제가 지나치게 상상을 했을까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지나가던 한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불쌍히 여깁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내어서 동네 사람들이 쓰고 남을 우물을 파줍니다. 그게 끝이 아니고 가정마다 물을 사용할 수 있게 바로 집 앞까지 상수도 시설을 해주고 갔습니다. 이제는 먹을 것 씻을 것 하나 걱정이 없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 거룩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대로 두면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더러운 죄 가운데 더 빠져가는 인간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아들에게 전달 됩니다.
드디어 거룩을 상실한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드라마가 시작 됩니다.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거룩을 담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의 죄를 완전히 씻어 주셨습니다. 앞의 비유에 의하면 동네에 우물이 파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물이 있을지라도 너무 깊어서 사람이 퍼 내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동네
사람들은 너무 가난해서 집 안까지 끌어 들일 수 있는 장비조차도 구입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이 부자에게
정말 필요하다고 요청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결국 내 집 안까지 상수도가 설치 되어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실한 나의 거룩을 실제로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내 옷에 너무 많은 오물이
묻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나를 씻어 주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예수의 보혈로 내가 씻어지면 다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거룩을 내 속에 다시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고후 4:7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여 함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내가 거룩해지기 위해 내 힘으로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어 영접할 때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내주함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됨으로 거룩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고후 5: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해
줍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칭의(justification)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질문은, 거룩이 회복 되었으니 다 끝난 것입니까?
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부르는 순간이나 아니면 주님 오시는 마지막 날인 경우에는 ‘그렇다’ 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대부분 성도는 거룩을 회복한 새로운 피조물로 흙탕물과 오물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 다시 나가 살아야 분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거룩이 회복된 이후에도 마음으로든 행위로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깨끗해진 성도들에게는 요일 1:9절의 “만일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는
죄 용서의 자동 시스템이 설치되었고 작동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그러면 계속 죄를 지어도 될까요? 라는 자연스런 질문이 또 나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옷에 더러운 것 묻히는 것 점점 줄어듭니다. 이
모습을 고후 7:1절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거룩이 부족해서
우리가 더 충족시켜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하나님 주신 거룩을 이제 드러내는 삶인
성화를 이루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질문은, 이미 거룩을 소유한 사람은 구원을 확인 받은 것인데 왜 굳이 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칭의 성화 영화의 구원의 전 과정에서
성화단계를 뛰어넘어 바로 칭의에서 영화로 가면 안됩니까? 좀 솔직하게 말하면, 구원 받았으니 죄 지으며 살아도 되지 않느냐는 것 입니다. 이것은
구원파의 주장입니다.
먼저 칭의, 성화, 영화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계획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배제시켜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롭게 된 사람이 성화를 건너뛰어 월반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게 산 사람도 주 안에서 이루어 가야 할 성화가 있다는 뜻입니다.
엡 4: 24절 이후는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이 이루어갈 성화의 리스트를 제공합니다. 25절은, 거짓을 버려 다시 죄짓는 버릇이 하나도 없습니까? 26절은,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으십니까? 29절은
말에 덕을 쌓는 모습을 묻습니다. 32절은 친절하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잘 하는 것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남들보다 좀 잘한다고 주님은 월반시켜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상처를 받지만 여러분
자신도 남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가 성화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성화는 우리 신앙생활의 열매입니다. 열매는 나도 먹지만 남들도 배부르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열매를
보며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은혜에 의해 칭의로 거룩하게 된 내가 성화의
단계에서는 내 힘으로 거룩을 이루어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도 철저히 하나님이 이루는 것입니다. 성화 다음 영화도 우리 스스로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구원의 과정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모세를 살펴보면 이해가 잘 될 것 같습니다. 출애굽을 한 후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으로
두 번 올라갑니다. 이때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에는(출32:15) 그의 얼굴에 광채가 없었는데 두 번째에는 사람들이 두려워할
정도로(출34:30)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출33:11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다고 말합니다. 나중에는 얼마나 자주
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면 모세는 친구들이 이야기하듯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는 나중에 민 12:3에 의하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칭찬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모세의 가장 약한 부분이 다듬어지고 그가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에게
나타난 모든 거룩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모세와 같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실까요? 첫째, 우리
성도는 먼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고후 6:16절에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가까이 계십니까?
한 집에 살아도 다른 방에 자는 자녀들보다, 같은 방을 사용하는 아내보다 더 가까이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내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일어나면 가족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음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인사도 없고 함께 식탁에
앉아 밥 먹는 일도 없다면 서운해 하지 않겠습니까?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기회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을 주님과 함께 만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감사하게도 구약 읽기에 조인해 주는
분이 있어 2기 성경일독이 벌써 18명이 되었습니다. 꼭 조인 안 하셔도 온 성도들은 매일 생명의 삶의 순서에 따라 묵상의 시간을 갖기를 도전 드립니다.
둘째는요, 고후 6:17을 보기 바랍니다.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성별과 성결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별되고 부정한 것에 가까이 가지 않는 성별된 삶입니다.
저는 오늘 마지막 부분을 한국의 차별금지법에 대해 좀 나누고자 합니다. 이 법안에 대한
내용들은 저 보다 더 성도님들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기보다는요. 이 법이 국회에 상정되고 통과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 거룩이라는 관점에서 잠시만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교회에 피해를 주지 않는데 왜 교회들이 들고 일어나느냐고 합니다. 지난 7/20일 전 헌법재판관 한 분이 국민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을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1) 동성애의 죄성을 지적하는 설교는 금지대상 차별행위에 해당된다(3조). 2)일반/기독교 언론이나 SNS
에서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나 강의는 금지된다(28.29조). 3) 교육부인가를 받은 일반 학교 조차도 동성애를 비판할 수 없다(32조).
이 법안에 대한 교회의 생각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론이나 교육부분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교회를 고립시키고 반기독교적 사회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 이라고 말합니다. “대학이나 교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비판 조차도
명예훼손으로 처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법을 저지하는 이유는 단지 교회와 목사님들 그리고 성도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그들의 주장이 맞다면 성경이 먼저 그들을 지지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나 가르침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 말씀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법을 만들어 핍박할지라도 교회는 오직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야 되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다스림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들이 법을 만들어 앞으로 학교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그들의 주장이 맞다고 가르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이미 캐나다나 LA에서 실시되고 있는 초등학교 교육 커리큘럼을 보면 정말 황당합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생각을 표현하지 않아야 피해를 보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성도는 둘 중의 하나가 되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피해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 성도는 말세의 현상들이 확실히 나타나는 세상에 살아야만 합니다. 오늘 말씀 고후 6:17절을 보면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라고 말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준비가 되었는지요?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에게 물었습니다. 또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저지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대학 그리고 보편적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도전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소수 사람들에 대해 정죄하려는 권리를 교회가 찾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서
선포 되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반대/저항입니다.
혹시 모르고 계셨던 분들은 관심을 갖기를 부탁 드립니다. 아직 이 문제에 대해 기도 못한
분들은 월요일에 한 끼라도 금식에 동참해 주기를 부탁 드립니다.
고후 7:1절 말씀처럼 성도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세상에서 구별과 성별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야’ 합니다.
거룩은 개념만을 머리에 생각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삶입니다. 투쟁입니다. 거짓과 진실에서 명확하게 나를 나타내는 선택입니다. 세상과 사우면서도 이루어 내야 할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 죄를 씻어 주셔서, 깨끗게 된 그릇에 거룩을 담아 주셨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 거룩함에 흠과 티가 생기지 않도록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