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7): 은혜 가운데 위로
고후 6:1-10
사람들이 받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선물도 받고 싶고, 사랑도 받고 싶고, 복도 받고 싶을 것입니다. 한 교육 전문회사가 올해 초등학생들에게 어린이날 부모님들로부터 제일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연합신문). 칭찬/용돈/사랑표현/선물(스마트폰/게임기/강아지)/자유시간
순으로 대답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 싶은 것이 참 많을 것입니다. 어떤 것인지요? 성령충만, 기도 응답, 위로, 사랑, 복, 면류관 그리고
상 등이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또한 은혜를 원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그저 주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빛과 공기와 물을 믿는 자나 안 믿는 자 모두에게 공급해 주시는데 이것을 일반 은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과 관련된 것인데요. 예를 들면, 주님의 보혈을 통한 죄 용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는 자들을 새롭게
하는 것 등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을 특별은혜라 부릅니다.
오늘 읽은 고후 6:1절 후반절에도 ‘은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 은혜는 어떤 은혜일까요? 1절 앞 부분을 보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성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당연히 구원과 관련된 특별 은혜가
될 것입니다.
좀 더 특별은혜를 알기 위해 두 개의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롬 8:3절의 중간 부분에 (현)“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우리의 죄값을 그에게
담당시킨 것입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죄값을 그에게 담당시켰다’는 말씀 안에서 세 가지 은혜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 죄를 대신해서 예수가 죽음으로 나의 죄를 용서해 주는 ‘대속의 은혜’입니다. 둘째는, 대속의 은혜로 죄 용서함 받은 나를 ‘의인’이라 불러주는
칭의의 은혜입니다. 셋째는, 의롭게 된 나를 죽음 이후 영원한
사망을 면하게 해주는 은혜입니다. 너무나 큰 은혜 아닙니까?
그런데 이 큰 은혜 앞에 좀 억울하다고 주님께 호소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A와 B가
함께 죄를 범합니다. A는 현장에서 잡혀 감옥 가고 나중 예수 믿어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B는 안 잡혀서 감옥도 안 가고 나중에 보니 예수 믿고 용서함
받은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더 억울할까요? 당연히 A입니까?
그런데 A가 억울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고생을 다할지라도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 5:29절에 “네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 보다 더 낫다(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도 B가 죄 짓고 안 잡히고
편하고 호화롭게 살았기에, 예수를 믿는다 해도 억울함이 좀 남는지요?
사실 내게 억울함이 없어야 정말 내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그런 친구도
예수 믿고 나랑 같이 천국에 왔다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내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내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고 도망간 그 사람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엡4:32절에서는
우리를 향해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고 명령합니다.
비유를 하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새
차를 주인에게 넘기기 전에 검사를 마칩니다. 그 새 자동차의 키를 받고도, ‘내 헌 차와 같이 시동이 안 될 거야’ 라고 걱정만 하고 끌고 와서 거라지에 넣어만 둘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향해 “한번도 고장 안 나” 라고 보증해 주십니다.
그 보증이 바로 마 18:22에 ‘일곱
번을 일흔 번 용서하라’ 는 말씀입니다. 용서의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용서의 빼터리
수명이 절대로 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용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좀더 살피기 위해 롬 8:4절을 보려고 합니다.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현)라는 말씀 속에 은혜를 하나 더 발견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 믿기 전처럼 육신에 무너져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예수님 닮는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복음을 듣고 판사이신 하나님 앞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을 하는 순간 우리의 신분 변화가 생깁니다.
‘너는 죄 없어’라는 판결을 받아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법정
문을 나서는 순간 사탄은 리무진에 태우고 다시 범죄 현장으로 데려 가려 할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아는 하나님은 연약한 나를 돕기 위해 늘 성령을 동행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죄를 짓고자 할 때 양심을 찌릅니다. 롬 6:21절의 ‘네가
예수를 모를 때 무슨 열매를 얻었지? 이제는 네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니? 그때 너의 마지막이 사망이라는 판사님의 말 기억나니?’ 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이 은혜로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변화되어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형수들도
롬6:22절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라는 미래의 소망을 품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성도는 롬 6:14-15절의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라는 질문에 ‘그럴 수 없다’고 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롬 6:18의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종은 ‘slave’로 노예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의에 종 된 우리들에게 롬 6:19절에 의하면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는 명령까지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이런 특별한 은혜들이 성도에게 있기에 바울은 고후 6:1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합니다. ‘헛되다’라는 말은 공허하다, 텅
비웠다는 뜻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는 진실된 고백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죄를 이겨내는 능력은 없고 세상과 짝하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바로 고전 1:12절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교회 내에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로 나누어져 파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고전 5:1절처럼 근친상간과 같은 성적타락이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고전 6:1에는 성도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세상 법정에까지 가서
다투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면 이루어야 할 성화를 상실해 버렸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에 부딪힙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요?’ 입니다. 누군가 교회에 다니면 예수를 믿고 천천히라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씀을 나누다 보니 처음부터 예수를 믿는 것에 실패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질병이나 고난 가운데서 예수를 진짜 만난 분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그 이유가 이렇게 정리 됩니다. 구원의 확신 없이 그냥 교회에 다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는 소리
수 없이 듣다 보니 앵무새처럼 본인도 따라 했다고 합니다.
선교 전도 구제 봉사 그리고 세상에서도 기부하는데 교회에서도 하니 안 할 수 없었습니다. 본인도
모르게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세례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족이 믿고,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부모님이 알려주니 세례 받은 것으로 알고 다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는, 중,고등부에서
단체로 세례를 받거나 특히 군대 가서 세례교육도 없이 엉겁결에 받은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시작으로 이루어진 믿음 생활은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그런데 외형적으로는 교회를 다니다
보니 연수는 올라갑니다. 여러 부서에서 봉사도 해서 교회 운영은 잘 알게 됩니다. 게다가 초신자들은 자신을 보면서 믿음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의 교회생활을 잘 말해 주는 것이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먼저 말씀이 길 가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립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도록 악한 자가 와서(19절) 그 마음에 뿌려진 생명의 말씀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런데 억울해
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이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져라, 자기를 부인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용서하라, 낮은 곳에 앉아라, 섬겨라, 겉 옷 달라하면 속 옷까지도 벗어 주라’ 합니다. 누군가 이 부담스런
것을 가져가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탄이 싹 가져가 줍니다.
다음은, 흙이 얕은 돌 밭에 떨어집니다. 뿌리가
깊지 않아 해가 나오면 말라 버립니다. ‘아멘’하며 말씀을 기쁘게 받지만 환난이 오면 말씀이 없어 쉽게
넘어져 버립니다. 예수 믿으면 복 준다고 믿었는데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만 생기느냐고 원망만 합니다.
말씀이 또한 가시 떨기에 떨어집니다. 듣긴 하나 세상 명예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주님보다
세상이 우선적입니다. 이 분들은 자기 중심으로 신앙생활이 돌아갑니다.
내 것 먼저하고 그 뒤 주님 생각하다 보니 진정 주님을 알아갈 시간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옥토 밭에 떨어져 열매 맺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은혜 받는 사람입니다. 잎사귀가 무성한 것이 아니라 열매가 있습니다. 그 열매를 고후 6:3절은 예수를 전하는 일에 있어 남들에게 어떤 비방거리도 되지 않으려고 경건과 절제를 통한 덕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고후6: 4절을 보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 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서‘모든 일’과 ‘자천’이라는 두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잠을 자고
쉬는 것도 주님을 위한 휴식이 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천’의 반대말은 ‘추천’입니다. 자원하느냐 아니면 누군가에 떠밀려 주의 일을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나를 구원해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스스로 자원해서
드려지는 향기 나는 번제가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만 4-5절에서 언급되는 ‘오래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은혜를 주시는 이유도 역경이 올 때 이겨내기 위함입니다. 또한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내 속에 있는 악한 것을 몰아내기 위함입니다. 속에 악한 것이 있고서는 주님의 거룩한 신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속이는 것, 거짓과 타협하고 악까지도 손을 잡고 싶은 욕망을 주님은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은혜를 주셔서 이 모든 것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말씀이 내 속에, 내 가정에, 내
삶의 현장에 없으면, 그 자리에 세상의 가치관들이 자리잡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는 세상에서 제대로 살 수 없습니다.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까? 어떻게 말씀으로만 세상을 살 수 있어요? 그렇게 세상 살면 세상에서
명퇴 되거나 도태 되요. 회사에서 진급 못해요. 혹시 이렇게
말씀하고 싶은 분들이 계십니까? 늘 창조 때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혼돈되고
공허하고 깜깜함만이 있던 이 세상은 말씀으로 채워지고 다스려졌습니다.
말씀이 채워진 하나님의 사람은 9절처럼, 무명한
자가 같으나 유명한 자가 됩니다. 요셉을 보기바랍니다.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질 때 죽은 자 같았으나 살아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방 나라에 종으로 팔리고 범죄자로까지
전락합니다. 최악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0절처럼, 감옥에 들어갈 때는 정말 근심하는 자였지만, 항상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배우지도 못하고 종으로 잡혀와 모든 면에 가난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의 지혜는 많은 사람을 부요케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였지만, 하나님의 영을 가질 때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설교를 듣는 우리 청년들이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턴 자리가 사라지고 Job Market이 안 열리는 상황 속에서 먼저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먼저 은혜 받기를 정말 원합니다. 그리고 포기한 것 있다면 다시 포기하면 회복됩니다. 부모님들! 우리 자녀들 어떻게 키울 것인가 걱정 하십니까? 걱정보다 내 자녀들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먼저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6-7절을 보기 바랍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나라와 민족을 거짓과 불의로부터 빠져 나오게 할 것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못해요’ 가 아닌 오래 참음으로 승리하는 힘을 공급받을 것입니다. 이 땅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비한 마음과 거짓 없는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코넬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모든 분들은 진리의 말씀과 의의 무기를 두 손에 준비해 두시기 바랍니다. 직장과 사회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이 여러분을 부를 때 공의롭고 정의로운 나라를 이끌어 갈 지도자들이 우리에게서
나올 여러분들이라는 사실을 저는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이 생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은혜 받습니까? 쉬운 질문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기에 우리의
선함이나 좋은 행위가 전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다시 보기 바랍니다. 아버지 야곱 옆에 있을 때는 시기와 질투가 있었지만, 고난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가 그를 따랐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지금이 은혜 받을 시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너무나 심한 경제적, 정신적, 영적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는 달라고
기도하고 간구 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2절을 보면 하나님은 지금 은혜 받을 때라고 직접 말씀하기에 우리 모두는
‘지금’ 은혜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는 단어는 현재성을 강조합니다. 한편으로는 그 현재성 속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최종적이고 종말론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로 미루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나에게 가정에 교회에 우리
자녀들과 청년들에게 나라와 민족과 온 세상에 넘쳐나게 달라고 요청하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지금 구원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