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6): 낙심하지 않는 사람
창3:17-19,
22-24; 고후 4:8-10, 16-18
요즘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우울감을 뜻합니다. 다들 잘 견디고 있지만 힘든 분들도 상당합니다. 거리두기와 모든 영역에서 비대면 접촉이 많다 보니 고립감과 단절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더구나 가을과 그리고 내년 봄까지 바이러스의 2nd웨이브를 전문가들이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아이에서부터 어른, 잘 살고 못사는 나라를 떠나 모두들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하게 지내던 사람마저도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히 무한 경쟁이라는 환경에서 경쟁하던 학생들은 자신이 무기력해 지는 느낌이들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이러다 실패하는 것은 아닌가? 연구성과가 적으면 어쩌나? 경쟁에서 지는 것은 아닌가? 이런 압박감으로 불안과 초조가 생길
수 있습니다.
팬데믹으로 경제가 무너지면서 인턴이나 취업에도 빨간 불이 들어왔습니다. 여름 방학마다 인턴자리를 얻어 경험을 쌓으면 다음 해 졸업하고 좋은 직장들이 예상 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예측 가능보다 불확실성이 높아 가면서 염려가 생기고 낙심이 됩니다.
오늘 본문 고후 4:1, 8, 16절에 세 번이나 낙심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누구나 인생 길을 가다 보면 낙심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상황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낙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은16절에서 ‘겉사람은
낡아진다’ 라는 표현을 사용해 나이가 드는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우리 교회 특징은 늘 젊은이들이 새롭게 들어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나이가 들어 갑니다. 자연스럽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코로나 이후로는 영상으로
우리 청년들을 만나다 보니 요즘 들어 저도 나이가 좀 들었다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삶
앞에 바울은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가 궁금합니다.
먼저 ‘겉사람은 낡아진다’ 는 말 속에는 주름이
늘고 기력이 쇠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태도가 보입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정말 서럽고 우울증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나이든 모습을 남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주름 속에서 발견 되는 새로운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자신 속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속사람의 의미는 늙어도 젊은이들처럼 생각하고 시대를 따라 가려는 태도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서 내 속에서 만들어진 주님의 형상입니다. 점점 새로워진다는 것은 더 주님 닮아가는 모습이 나에게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내 속에서 나타나는 주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을 보는 것이 낙심하지 않는
첫 비결입니다. 나이 들면서 찾아오는 상실감 앞에 서러워 말고 내 속에서 매일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주님과의 관계를 바라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세상이 아닌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준비를 하기를
바랍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해 은퇴하신 분들이 커리어를 갖고 선교지로 나가고 있습니다. 얽매이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선교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가는 과테말라에도 은퇴 선교사님이 5
분 이상 계십니다. 전문직에 종사하던 분들이 공동체를 섬기는 모습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바로 은퇴하고 현장으로 오신 분들도 있긴 하지만, 그전부터 꾸준히 선교에
대한 참여가 이어지던 분들입니다. 팬데믹이 언제까지 우리를 발목을 잡겠습니까? 저는 곧 물러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미종족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보다 하나님이 먼저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선교계획에 동참하겠다는 이런 멋진 계획을 세우면서 너무 나의 겉사람에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게다가 내가 예수를 만나고 난 뒤부터 지속적으로 주님과 함께 만들어온 나의 속사람은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두 번째 우리를 낙담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살면서 만나는 고난입니다. 사실 고난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부동산
중개업자라고 말할 수 있는 종교는 엄청난 공고를 세상에 냈습니다. 고난과 환란이 없는 곳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을 사서 갈 수 있다는 광고입니다. 모두들 그곳에 집 하나 마련하려고 합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아예 그런 곳은 없다고 관심조차 없습니다. 성도는
말씀이 전하는 대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기에 내가 살 영원한 집을 하늘에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모두 무주택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 허접한 계약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계약서에
자신이 얼마를 지불한 금액이 적혀 있습니다. 수고하고 애쓰고 착한 일 한 것이 환산되어 작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위해 그 집을 마련한 분이 그냥 공짜로 준다는 광고만 믿고 계약을 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보며 우리가 사기 당할 위험이 훨씬 높아 보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합니다. 그 약속을 하신 분이 이 땅에 직접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갈 곳이 어떤 곳인지를 직접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보기를 원하기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을 통해 계시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땅에 낙원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동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유토피아, 무릉도원’등 입니다. 문학에서는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에 나오는 가공의
이상향인 ‘샹그릴라’ 정도가 되겠지요.
‘샹그릴라’는 히말라야의 산맥의 알려지지 않는 어느 곳입니다. 평화롭고 신비한
계곡에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그런 장소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은 윈난 성의 즁덴을 샹그릴라로
개명하고(2001년) 많은 관광객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장소 정도, 아니면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이상향 정도로
이해됩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 지상낙원을 신앙으로 실제 믿는 다면 곤란합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 지상 낙원이 교리가 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죽고 난 뒤 파라다이스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고난과 환란이
생기면 사람들은 있는 것 다 주어서라도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 할 것입니다. 무병 장수하고 전쟁도 없는
낙원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면 지금 우리가 고생하고 있는 코러나19 바이러스도 없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경은 분명 그곳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지은 에덴입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는
다시 에덴의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창3:17절을 보면, 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습니다. 이 땅에서 더 이상 에덴에서 인간이 누린 축복이 사라진 것입니다.
게다가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만 소산을 먹는다는 말 속에는 인간이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상실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창 3:18에 의하면
계속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덮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고 모든 것이 혼잡해진 곳을 과연 낙원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더 심각한 것은 창 3:22-23절 입니다. 이
땅에서의 무병장수를 누리는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도록 그곳에서 인간을 추방시켜 버립니다. 아니 그러면
찾아가면 되지요? “잃어버린 지평선”의 소설에서는 다시 그곳을
찾아 갔을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고 마치게 됩니다.
또 창3: 24절은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족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소를 못 찾게 하겠다는 의미 보다는 이 땅에서는 다시 에덴과 같은 낙원을 누릴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이 주제를 좀 길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으로 말세의 현상들이 계속 일어나면서
지치고 힘들어 하는 세상 사람들을 이상향적 공동체라는 것으로 유혹할 사람들이 이미 나와 있지만, 더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이 아닌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는 시대에 이미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이 땅에 고난이 생겼음을 말씀합니다. 창3:17에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저주를 받고 18절에 의하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나는 땅에서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땀을 흘리는 고난이 시작 되었다고 19절은 말씀합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창 3:22절의 ‘영생할까
하노라’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을 암시해 주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창 2:17에서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에서의 “정녕 죽으리라” 말은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호흡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 부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호흡이 멈출까요? 창4:8은 사람의 호흡이 처음 멈추는 것은 형이 동생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창 4:23절의 라멕의 노래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에서 전쟁을 말합니다(살인, 전쟁).
욥의 자녀들은 전부 어떻게 죽습니까? 칼에 죽고(욥1:15, 17)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죽고(욥1:16), 거친 들에서 바람이 불어 집이 무너져 죽습니다(욥1:19). 그리고 출애굽시 전염병으로(9:3, 9) 애굽 사람들이
죽습니다. 또한 다윗의 인구조사로 7만 명의 이스라엘이 전염병으로
죽습니다(삼하24:15). (칼, 불, 바람, 전염병 등
자연현상)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에 대한 정리가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1)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수많은 원인들 중의 하나입니다. 2) 죽음을 가져 오는 전쟁 기근 바이러스 질병 등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이 땅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3) 이런 것들 중에 특히 전쟁 같은 것은 인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도 있습니다.
4) 그러나 전염병과
같은 것은 자연스럽게 환경이 맞으면 발생하기도 합니다. 5) 그러므로 전염병을 심판으로만 보는 것은
좀 조심할 필요는 있습니다. 6) 그리고 전염병이 발생하면 의인이나 악인의 구분 없이 다 죽을 수 있습니다. 7) 한편, 전염병을 하나님이 직접 심판의 도구로도 사용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8) 특히 눅 21:11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전염병은 또한 마지막 때의 싸인
중의 하나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은 아무도 모르지만 마지막 ‘때’는 다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이 땅에 인간으로 오심부터 이미 시작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팬데믹을 보면서 원인이 무엇이냐
따지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원인에서 발생했든지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기도 해야만 회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코로나 19 팬데믹 현상은 마지막 때를 지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최종 심판 날이
더 가까이 오고 있음을 깨우쳐주는 것은 확실합니다. 게다가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경각심을 주는 것 또한 틀림없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지만 코로나에 대한 것들이 이렇게 정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는 우리 모두에게 고난입니다. 모두가 이런 힘든 고난 상황 속에 빠진다면 성도나 불신자
중 누가 더 마음이 상할까요? 저는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취급하십니까? 하나님 혹시 안 계시는 것 아닙니까? 고난 가운데 돕는 다는 것
다 뻥 아닙니까?
이런 때 지혜로운 방법은 우리 선배들의 믿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낙심할
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두기처럼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8절을 보면, 사방에서 사역들이 방해를 받고 삶 속에서 어려움이
생겨 숨도 쉬지 못할 처지라고 말합니다.
9절은 설상가상으로 핍박까지 당하며
돌에 맞아 거의 죽은 체 도시 바깥에 버림을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행14:19 루스드라). 복음을 잘 받아 들이는 곳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강과 바다를
건너는 위험은 초대교회의 전도자들을 늘 죽음 가까이 서 있게 만들었습니다.
엄청난 믿음을 가진 바울인데도 하나님은 그를 죽음 앞에까지 몰고 갔습니다. 10절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 이라는 표현은 정말 힘든
상황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좀 쉽게 말하면 하나님 잘 섬기며 살았는데 하는 일 마다 꼬이고
죽을 것 같은 일만 생기고 기도 응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남은 것은 낙심뿐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놀랍게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낙담하지 않는 것을 보면 바울은 정말 괴물 같습니다. 우리 믿음도 이런 모습이 좀 있어야
합니다. 특히 팬데믹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낙심하지 않는 믿음이 정말 필요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고난은 잠시 받는 것이며 크고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경한(가벼운 것)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도권에 대한 반발, 방문 한다는 약속을 안 지키고 마음대로 한다는 리더십에 대한 불만 등으로 상당히 괴롭고 힘든 때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선교 사역과 핍박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분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어떻게 그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도 낙심하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답부터
말하면 영원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는 것입니다.
즐거운 시간은 빨리 지나갑니다. 노는 것도 그렇고 여행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기다리는 그 시간은 너무나 길게만 느껴집니다. 지진을 겪은 분들도 동일합니다. 그분들 인터뷰를 들으면 지금껏 산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고 말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첫 진동은 대부분 1분 이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긴 공포와 고난의 시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영원과 같은 긴 시간을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시간에서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의 바울을 보면, 고난의 시간을
잠시라고 반대로 말합니다. 이 비결은 지금 현재를 영원과 연결시킬 때 그런 믿음의 고백이 가능합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개념이 내게 있으면 아무리 긴 시간처럼 느껴지는 힘든 고난과 고통, 환란과 핍박의 시간일지라도 잠깐이라는 고백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 하려면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많은
이유들 중의 하나입니다. 살면서 만나는 고난을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고 정말 길게만
느껴지는 그 시간을 하나님은 이용합니다. 교육의 도구로 쓰십니다. 우리에게 ‘영원’을 가르치는 시간으로 활용하십니다.
고난은 머리에서만 알던 영원이라는 실체를 정말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지금 이 세상의 시간’과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을 연결시켜 주는 접착제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영원과 우리가 연결이 되면 환난은 잠시 받는 것이며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너무 작은 것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인간의 시간 개념으로 보면 길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진짜 성도가 가져야 할 영원의 시간
개념으로 따져보면 잠시인 것입니다.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그런데
이말 듣다 보면 불교나 참선하는 분들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들의 깨달음은 영원이라는 실체가 없는
추상적 개념과 나와의 연결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는, 정말 살아계시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가운데는 그런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이미 죄로 죽었던 우리에게 엄청난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할 때, 생물학적 생명(bios 눅 21:4)만을 가졌던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데 이것을 ‘조에(Zoe 요1:4)’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는 영원을 이어가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잠 자고 있을 뿐입니다. 잠자는 것을 깨워야 합니다.
이것을 깨우는 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라는 흔들림을 통해 멈추어 있던 영원을
즐기는 시간장치가 작동되게 됩니다. 그 시계추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이 땅의 고난은 영원 속에서 잠시라는 믿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이 팬데믹 가운데 있는 우리 성도님 가운데도 생겨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