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5): 그리스도의 향기가 주는 위로  

고후 2:14-17

 


저는 알러지가 심해서 정말 오랫동안 여러 과일들을 먹지 못했습니다. 특히 사과는 냄새조차도 못 맡았습니다. 애플피킹을 가면 참 힘든 시간이었는데요. 10년 전인 것 같습니다. 과수원에서 사과 하나를 먹고 난 뒤 다시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요. 그 후부터 사과 향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냄새를 맡으려고 차 안에 두기도 하고, 집에서 나갈 때면 늘 사과를   손에 들고 나가먹던 적이 기억이 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꽃이든 과일이든 다들 좋아하는 향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사용하는 향수 종류도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도 향기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향기는   우리가 잘 아는 그런 종류의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사과 향이면 사과에서 나는 냄새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에게서 나는 냄새입니다. 그런데 본문 15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만이 그리스도요,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사과를 가지고 있으면 사과 향이 나듯 내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으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는 그런 뜻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향기 그 자체가 아니라 향기를 나타내는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14절 중반에 우리로 말미암아() 또는 우리를 통하여(), through us(NIV, NASB), by us(KJV) 로 각각 번역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향기를 내려고 해도 사과가 없으면 사과 냄새가 나지 않듯이, 그리스도가 내 속에 없다면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향기는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우리 성도님들은 그리스도를 속에 가지고 있는지요?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성도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고전 3: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성령이 언급되어 있지 그리스도란 단어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는 성경구절을 한 번 찾아 볼까 합니다. 3:17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거하는 조건은 오직 믿음뿐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예수가 나의 구원자이시며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 거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골 1:27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만 섬겼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 속에도 그리스도가 거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2천년 동안 유대인에게서부터 이방인인 우리에게까지 퍼져 나갔습니다. 지중해를 가로질러 대륙을 건너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는 땅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종교박해를 피해 퓨리탄들이 메이플라어호를 타고 미국에 온지 4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교회도 캠퍼스에 세워진지 40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1년도 안 된 분에서부터 몇 십 년이 되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품은 이 땅은 물론 그리스도가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성도임에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는 경우가 있을까요? 저의 집에 조그마한 화분이 있었습니다. 물을 오랫동안 안 주었는데도 죽지도 않아 신기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저 꽃 잘 안 죽네라고 말했더니 조화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조화는 당연히 냄새가 나지 않겠지요.

 

그런데 생화도 향기가 없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선덕여왕 목단, 글라디올러스). 먼저, 성도가 향기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자신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매우 감사한 일이지요. 그분들에게는 간단하게 그리스도의 향기는 복음이라고만 알려줘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는 것은 주위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말씀 드리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의 일에 동참하고, 새로 이사온 분이 누가 있나 살피다가 학교. 회사. 골프장. 아파트 쓰레기장. 아이들 유치원 어디에서나 만나면 인사하고 목장에 초대하고 마음의 문이 열리는 날에 복음을 들려 주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가 베풀어질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것을 놓고 목회자와 장로님들 목장지지와 목원들은 더 나아가 전 교인이 금식하며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많은 사람도 좋지만 영혼 구원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 내에 예수를 모르는 분들이 한 명이라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다들 코넬을 졸업하고 떠날 때 학위만 받아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한 손에는 졸업장과 다른 손에는 선교사의 사명장을 받아 가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 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성도에게서 풍겨나던 그리스도의 향기가 갑자기 중단되는 경우입니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예외는 없습니다. 충성스럽게 일하던 분들이나 성령 충만하던 분들도 사탄의 유혹으로 갑자기 쓰러지는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갈 5:16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를 수밖에 없는 연약함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5:17절은 성령과 육체가 싸우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줍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이 둘이 서로 싸운다고 말합니다.

 

무슨 이런 것이 내 속에 있어라고 하지만 분명 이런 영적 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늘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있는 예배의 삶이 지속 되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때 이미 우리는 육체의 소욕에 종이 되어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힘든 시간에 신앙생활에서 조심할 부분을 좀 나누고 다음 경우로 가고자 합니다. 온라인 예배가 거의 넉 달인 17주가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그리스도의 향기를 잘 유지 하고 있는지요? 지난 수요일부터 성경일독 2기생 16분이 읽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리스도와 늘 동행하는 삶이 필수입니다.

 

주를 찬양하는 예배가 드려지는 가정이 되야 합니다. 매일 주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먹어야 합니다. 가족과 이웃, 코로나 19 팬데믹의 종식을 위해, 미국땅의 선거와 공의와 정의를 위한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가 올려져야 합니다. 말씀과 찬양과 기도는 향기의 주체되는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점검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혹시 무너진 곳이 있으며 영적 전투 태세를 갖추고 무너진 진지를 다시 구축하기 바랍니다. 일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영적으로 각개전투가 필요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코넬에서 가을 학기 발표가 나고 준비로 바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캠퍼스에서 다시 풍겨나도록 해야만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각한 경우인데요. 구제와 봉사, 선한 일들을 많이 하는데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의를 위해 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이미 내가 받았기에 향기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 경우는 내 의를 주님 앞에서 과감히 깨드려 버리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2: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순간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내가 죽어야만 됩니다.

 

내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면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생활에 갈등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유함도 없고 활기도 없고 재미마저 없게 됩니다. 순종해야 하는 것은 알고 있는데 환경에 눌려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 알고, 말씀 보아야 하는 것 알고, 구제 봉사 전도 선교 해야 하는 것 알고 있지만 당장 바쁜 내 일이 먼저지요. 자녀가 더 우선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아니라 주님은 다, 다음 정도 순서를 정하고 신앙 생활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야 내 일에 방해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것 우선으로 하고 그 다음 여유분의 시간이 나야 겨우 주의 일 하게 됩니다. 주님이 주인 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만 합니다. 죽은 사람은 내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보일 뿐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체험하는 신앙이 있어야 하고 간증이 생길 때 그리스도인의 무 향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향기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본문을 다시 보시면 향기만이 아니라 냄새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14, 16절은 냄새라는 단어가 나오고, 15절은 향기라는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주님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표현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서 나는 것은 냄새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향기와 냄새를 구분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주를 품은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다르게 말하면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해 줍니다. 좋은 향수를 뿌리거나 몸에 바르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그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고 있는 예수쟁이라면 반드시 우리에게서 날 수 밖에 없는 냄새가 있다는 뜻입니다. 

 

먼저 14절은 그리스도를 품은 우리에게는 승리의 냄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합니다.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전쟁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에게 승리의 확신을 주지 못하면 얼마나 두렵고 참가하는 것조차 주저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를 승리하게 만든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공동/새번역을 보면 우리를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끼워 주시고: 공동)” 라고 번역합니다. 전쟁을 이긴 개선행렬은 가장 앞에 장군이 서고 다음은 전장에 함께 했던 병사들이 뒤를 이어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포로들이나 노획물이 뒤따라 오게 됩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보장은 유능한 지휘관과 군대의 힘에 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가 승리하셨기에 우리는 개선 행진에 끼일 수 있습니다. 전혀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이 이겼기에 승리를 우리에게 준다는 그런 뜻입니다. 주님의 승리를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먼저 인간으로 오셨지만 죄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4:1-10절은 아담을 쓰러지게 만든 사탄이 세 가지로 주님을 시험할 때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죄가 나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내 지혜 내 능력이 아닌 오직 말씀이 나의 무기가 되기만 하면 승리한다는 약속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다음은 마 6:25-33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등의 세상 염려에 대해서도 이기셨습니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다들 힘든 상황에서 학부 대학원생 박사과정 포닥 분들 어디로 갈지, 직장이 안 생긴다고 걱정하지 말기바랍니다. 염려함으로 우리의 걱정이 덜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주의 자녀들을 향해 너희들은 어떤 것들보다 귀한 나의 존재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승리할 것을 약속합니다. 나를 위해 예비하신 것을 기대하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치해 달라고 먼저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든 가운데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고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이 예비한 길을 가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내 속에 있는 성도라면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고난이 없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 가운데서 이길 수 있기에 승리입니다. 나를 이끌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주위 사람들의 잘 나가는 모습에 내 마음이 위축 당하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푸른 초장과 잔이 넘치는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말씀 드리지만 예수쟁이들은 중간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최종 평가를 주님 앞에서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중간에 실패가 있더라도 최후승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인내라는 소프트웨어가 이미 내 속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남들보다 더 오래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다들 넘어지고 포기하고 세상을 비난하고 코로나가 망쳤다고 원망하고, 경제 정책이 잘못 되었다 비판하고, 기업들이 채용을 안 한다고 소리치고 그리고는 자신은 정작 우울증에 빠져 버립니다.성도는 고난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아야 합니다.

 

온실에서 자란 것보다 야생에서 자란 꽃이나 약초가 더 찐한 향기가 납니다. 고난을 견딘 자만이 승리를 맛 볼 수 있습니다. 내 속의 염려와 걱정 불안 초조 원망 질투 시기 분노를 다스리라고 고난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런 것들을 가지고는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떠나시면 여러분이 인정하든 안 하든 세상의 리더의 자리에 설 것입니다. 리더가 불안해 하고 원망만 품는다면 누가 여러분을 지지하며 따르겠습니까? 고난의 시기에 세상은 성도를 바라봅니다. 불안감 열등감 원망 속에 있는 우리를 본다면 누가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겠습니까?

 

고난의 때에 우리 성도가 세상을 향해 승리 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16: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평강은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취하는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또는 요가나 호흡, 명상을 통해 얻어진다는 마음의 평정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자기가 정한 수준에 도달할 때 갖는 일종의 자기만족입니다. 게다가 평강은 사람을 찾아 가서 조언을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 14:26절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평강의 주체는 하나님께로 온 성령님이시며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만족시키는 지혜와 지식으로 역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14:27절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평강은 사람이 줄 수 없고 오직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주시는 담대함입니다.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자에게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마지막으로, 16절은 그리스도를 품은 우리에게 생명의 냄새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우리만이 누리는 승리로 마무리 되지 않고, 남을 살리는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받아 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이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사망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는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배타성을 가지고 성도는 남을 정죄해서도 안되고, 사람들을 얻기 위해 타협해서도 안됩니다. 세상과 화합하기 위해 예수를 팔아먹을 수는 없습니다. 25년 전 정도에 성령은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 , 정신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다른 종교와 너무 비슷하다는 말도 많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고 착한 일 하는 것이 종교의 목적임을 강조하며 종교간의 화합을 시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세상이 섬기는 신들과 기독교의 하나님은 원래 같은 것인데 이름이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 이렇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믿는 삼위일체의 신관을 가진 기독교가 어찌 다른 종교의 신과 같습니까?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어찌 피조물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같을 수 있습니까? 게다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자연이 아무리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해도 창조주 하나님과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17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혼잡하게 하려는 것이 세상이고 사탄의 전략입니다. 사람들로 헷갈리게 만들어 나중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이나 하듯 통계가 보여주는 것은 세상에서 종교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전한 향기만이 자신의 아름다운 향기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다른 것들에 의해 혼잡해지지 않을 때 세상에 대해 승리할 수 있고, 생명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잘못한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성경적 구원관이 흔들리거나 사람들에 의해 변질된다면 심각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고, 구원을 허락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다른 것 섞이지 않도록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16절은 그 일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17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들은 인내와 소망으로 반드시 승리를 이루어 나갑니다. 불안과 걱정과 염려와 원망 속에 사로 잡혀 있는 심령들을 자유하게 만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고난 가운데 누리며 살아가게 만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의 향기가 주는 위로입니다.

 

그리스도가 품은 향기는 또한 생명입니다. 죄로 죽은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다시는 우리를 죽음과 사망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누리는 생명을 허락해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 가운데 깨어날 때 다시는 눈물도 없고 아픔이 없는 위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안개와 같고(4:14)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함을( 40:8)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승리와 생명의 향기로 주의 백성들을 영원토록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이 위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