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4): 용서가 주는 위로 

고후 2:4-8

 


질문부터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살면서 언제 행복감을 느낄까요? 각자 답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하나 더 추가한다면 남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전까지는 마음이 아프고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감정들이 내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순간 무거운 뭔가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경험해 보신 분들은 이 느낌을 알 것입니다. 사실 용서만큼 정신건강에 좋은 것은 없습니다. 평생 용서 못하고 죽는 순간까지 자녀들 불러 놓고 반드시 가서 복수하라고 유언을 남기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해당된 이야기가 아니라 무협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인들에게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으로 가슴에 남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은 가족 친구 동료 더 나아가 한 나라와 민족까지 확대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용서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의 대상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경우에는 누가 떠오르는지요? 아직 길 들여지지 않아서 소파에 오줌 싼 강아지입니까? 누가 그 대상이든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건과 사람이 있는지요? 있다면 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용서를 통해 흘러 보낼 수 있는 결단과 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날씨가 더워져 냉방 제품을 많이들 사용합니다. 깨끗한 공기를 원해서 사용하기 전에 먼지를 다 털어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용서 없는 삶은 매년 묵은 먼지 그대로 두고 다시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까지만 설교를 듣고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참 좋겠습니다. 

 

쌓인 먼지를 청소하듯, 용서하지 못하고 품고 있는 것들 다 털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집에 대청소 하는 날이 가정에 있을 것입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한 번씩 나를 사로잡고 있는 과거로부터 벗어나 해방감을 누리는 행복한 시간을 마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글자뿐인 용서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다양합니다.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보라는 심리가 있겠지요. 아니면 회개도 안 하는데 어떻게 내가 그 사람을 용사해 줄 수 있어? 라는 고집입니다. 아니면 정말로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 생각조차 못하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지금 당장 누군가를 용서를 하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내게 상처를 준 친구를 이제 용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들은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너로 인해 오랜 세월 힘들었다였습니다.

 

한 사건을 놓고도 내가 남을 용서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일에 나도 남한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너를 용서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 마음에 두고 만나면 화해하는데 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세상과는 달리 성도님들은 남을 용서해야 하는 성경적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 복음이 내 가운데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가운데는 예수 믿은 지 아직 1년도 안된 성도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1년이든 몇 달이든 몇 일이든 심지어 몇 시간이든 용서하기에는 충분합니다.

 

4: 32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그리고 골 3:13에도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두 말씀은 구원 받은 성도에게 있어 용서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런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내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우리는 남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용서 받은 내 죄보다 용서 못할 /더 큰/ 남의 죄는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것을 탕감 받은 사람은 내게서 조금 빚진 자를 탕감해 주는 삶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할 때 도대체 무슨 죄를 용서 받았을까요?  내가 죽으면 용서 받는 죄를 위해 예수가 죽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냥 살다가 내가 죽으면 해결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나를 위해 죽은 이유는 내가 죽어도 용서 받지 못할 죄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사과하거나, 벌을 받아 감옥에 가고, 사형을 당하든,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하든, 아니면 나이 들어 죽어도 죄는 남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죽어도 용서 받지 못할 죄는 살인, 간음, 도적질, 미움, 다툼, 시기, 당 짓는 것, 속이는 것들과는 조금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일단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죄 값은 정녕 죽어야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정녕 죽는다는 의미는 잘 알듯이 그냥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죽음이며, 죽고 난 뒤 또 한번의 죽음인 사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는 편이상 원죄라고 부르는 가장 근원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편이상 자범죄라 부르는 내가 살면서 짓는 죄들은 용서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근원적인 것이 해결 되었는데,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부차적인 것도 용서함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종합하면 원죄, 자범죄 기타 등등 모든 죄의 용서함입니다. 내 입장에서 용서를 바라보면, 내가 살다가 우연이든 고의든 남에게 상처를 준 그 죄까지도 이미 용서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복잡한 질문이 나올 만 한데요.

 

모든 죄에 용서 받았다고했는데 그러면 왜 요일 1:9절에서는 살면서 짓는 죄들에 대한 회개가 필요 한다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답을 말한다면, 모든 죄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선포 되었지만, 우리가 그 실질적 용서를 누리는 순간은 요일1:9절에 근거하여 회개가 일어날 때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의 기준에서 용서를 보면, 그 사람의 죄까지도 이미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다는 의미도 되겠지요.  그러므로 내 입장에서 보든, 나에게 상처 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든,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이미 용서한 사실에 대해 내 입술로 직접 선포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를 통해 확인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체험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도전 해야만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내가 용서할 사람이 생각이 나면 오늘 당장 전화를 해서 용서가 일어나기를 도전 드립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하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우리 주위를 둘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말씀에 따라 용서하며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을 죽인 사람을 양 아들로 키운 분도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2010 Amish Grace라는 영화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내 자식을 죽인 사람까지 용서하는 분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임을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도 용서가 안 되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 분은 아직 자신을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머리에서 더 밑으로 끌어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는 이해하는데 아직 내 마음이 주님의 보혈로 덮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복잡하게 들립니까?

 

내가 복음을 받아들일 때, 내 속에서 지적 감정적 의지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단순히 복음을 아는 수준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로 10:10에서 선포합니다.

 

여기서 자세히 볼 것은, ‘마음으로 믿는다고 했지 머리로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우리로 하여금 내게 모욕을 주고, 화나게 만들고, 자존심을 밟은 사람을 입술로가 아닌 진정 내 마음이 그들을 용서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용서는 망각이 아닙니다. 단지 기억으로부터 지워 버리려는 나의 노력도 아닙니다. 

 

말로만 한 용서는 내가 용서했다고 한 그 사람을 나중에 만나는 모습을 보면 압니다. 너무 싸늘하고,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워합니다.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18:22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잘 작동되는지 여부입니다.

 

이 구절은 문자적인 횟수를 의미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떤 것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용서가 일어나야 된다는 뜻입니다. 또 다르게 말하면, 살아가면서 한번 만 용서하는 일이 생기면 다행이지만 또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용서가 계속 가능하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주님은 세리 창녀 강도 따지지 않고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은 되고, 저 사람은 안되. 이런 모습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그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용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한번 예를 들면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탕이 혼자서 안 녹으려고 물에서 몸부림 처도 녹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속에 들어오기 전의 설탕은 바로 라 보면 됩니다. 내가 가진 맛, 즉 자아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주 안에 거하게 됩니다. 한 조각의 각 설탕 같은 내가 단순한 물이 아닌 은혜의 강물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나는 흔적도 없이 녹아 버리고 강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 믿고 난 뒤 우리의 모습인 예수 닮는 삶이라 부릅니다. 주님은 용서가 불가능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있는 나도 그런 용서가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다고 하지만 용서가 안 된다면, 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용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요일 2:9-10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마18: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내 마음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 은혜는 결국 십자가에서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흘리신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감격을 잃는 순간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용서가 없는 건조한 믿음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떨어져도 말라 버립니다. 구원의 감격을 잊지 않는 것은, 땅이 씨를 품듯 늘 나를 구원하심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눈물이 되어 땅에 수분을 공급하여 용서의 싹이 자라게 합니다.

 

솔직히 나를 구원하신 주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십니까? 없다면 그만큼 구원에 대해 잊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고 부르며 축하합니다. 구원 받은 날을 기억하는 분도 있지만 못하더라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거듭남에 대한 감사는 늘 잊지 말기를 부탁 드립니다.

 

오늘은 본문을 조금 뒤에 다루는데 역시 용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잘 알듯이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단들의 가르침, 성적문란, 당파 등 굴찍한 것들이 믿음의 공동체를 갈라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교회에 편지를 보내 문제에 답하고 가르치며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과 받아 들이지 못했던 사람들로 나눠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마 18:15-17절에서 주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원칙에 따라 권징’ (착한 일은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한다)을 실시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모습을 본문 고후 2:6절인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라는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며 어떤 죄로 교회의 징계를 받았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 절 5절을 보면, 분명 어떤 사람이 있었고, 교회 전체를 근심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5절이 중요하기에 좀 쉽게 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성도 한 사람이 나만 근심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두를 근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듣는 너희들에게 부담을 좀 줄이기 위해서 굳이 말한다면 몇 사람 정도는 분명 근심거리가 되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 궁금한 것은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다양한 문제를 몇 주 전부터 하나씩 다루고 있습니다.

첫 주에 제가 말씀 드린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 주인공일 수도 있습니다. 또 지난 주에 바울이 교회를 방문한다고 하고 약속을 어긴 것으로 인해 신용 없는 사람이다, 또는 경솔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이라면 성도보다 오히려 사도에게 더 근심이 될 일이기에 5절 말씀에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들어온 이단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조금 부족한 이유는 5 절을 해석하면서 몇 사람 정도에게는 분명한 근심이었다고 말씀 드렸는데 이단이 몇 사람만 걱정할 일입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고전 5:1 에서 언급된 음행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단수) 아버지의 아내를(아마도 다른 아내를) 취하였다고 합니다. 고전5:2절을 보면 그 사실을 바울이 알게 되었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교회를 향해서 고전5:13절에서는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본문 고후 2:6절에 의하면 그 사람에 대해 징계를 내렸습니다. 대부분 교회성도들이 바울이 옳다고 생각하고 음행 한 사람을 최고의 권징인 출교를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고후 2:7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그 사람을 이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6절과 7절 사이에는 교회가 징계를 한 후 시간이 충분히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징계를 받은 그 사람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 났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그 근거는 7절에 보면, “그가 너무 많이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라는 말이 암시해 줍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울은 그 사람이 철저하게 회개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할 것을 편지로 전합니다. 게다가 그를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 까지 말합니다. 8절에 교회가 사랑을 그들(원문 단수)에게 나타낼 것을 또한 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아야 할 것은 징계는 용서를 전제로 해서 내려진 사랑의 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냥 내쫓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바울 사도는 다시 그를 생각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교회로 불러 들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용서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돌아오게 만들고 다시 지체로 일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용서가 만들어 내는 위로들입니다.

 

여기서 용서의 의미를 한 번 다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라고 할 수 있는 근친상간이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인륜을 어긴 범죄이며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일어나고 그에게 다시 사랑이 부어집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주 안에서의 모든 죄를 말합니다.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이 죄를 지고 십자가에 오를 때, 인간의 죄를 보면서, 이것은 지저분하니 빼고, 저것은 야비하니 빼고, 이것 역시 너무 잔인하니 제쳐 두고, 오직 이해되고 별로 사람들의 논쟁거리가 안 될 것만 지고 십자가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까지도 어깨에 메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듣는 분들은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주 안에서 다 용서 받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전부가 아니면 우리는 그 나머지를 위해 우리가 착한 일을 하든, 다른 신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 용서하셨기에 좋은 소식이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죄는 용서 받고 내 죄는 안 되면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도 어떤 사람이든지 주 안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거듭난 사람이 될 때 그들을 수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세상은 예수 믿고 죄 용서함 받았다는 것을 자기만족에 불과하다고 소리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삽니다.

 

자 그러면, 죄 용서함을 믿는다면, 내가 죄 용서함 받은 이유를 아시는 지요? “나는 강도 짓 안했구요. 살인 없어요. 윤리적으로 도적적으로 바른 짓만 하다가 예수 믿었기에 전 확실히 용서 받을 수 있는 사람 같아요. 아니 좀더 세게 말하면, (확실히) 용서 받은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이것은 엉터리(말의 모순 발견)입니다.

 

내가 강도가 아니고 살인자가 아니어서 용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에 용서 받은 것뿐입니다. 죄인이었던 내가 남들 잘못했다 지적할 수 있습니까? 그냥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 어느 누구 앞에서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그런 나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누구였습니까? 사탄에게 사로 잡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먼저 사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의 즐거움을 먼저 아시고 그 즐거움에 동참해 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용서함을 통해 받는 위로를 맛보라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용서함으로 받는 위로는 엄청납니다. 용서는 밑지는 장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부요케 되는 비결입니다. 엄청난 것들을 받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미움과 분노로 묶여 있던 나를 자유함 속으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평강을 누리게 합니다. 깨어진 인간 관계 속에서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게 합니다.

 

또한 용서가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임을 늘 확인시켜 줍니다. 14: 21을 보면,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하라(18:35, 11:25, 17:3) 주님의 말씀/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향해 주님은 너는 진정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칭찬합니다. 이 보다 더 큰 위로를 세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위로를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