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3): 세상을 향한 위로 

35:11-14; 고후1:12-17, 21-23

 


세상을 보면 참 아름다운 모습들이 있습니다. 친한 분이 아프다고 하면 안부도 묻고 음식도 만들어 병원까지 찾아가 위로도 합니다. 그냥 오랫동안 잘 아는 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잘 모르는 분들은 아예 모른체 하며 살아갈까요? 잘 모르는 경우는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번도 가 보지도 않은 지구 저편에서 지진이 나거나 쓰나미가 나면 돕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굶주린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돕습니다. 나라도 다르고 얼굴 색도 다르고, 친구도 친척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도 세상을 위로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왜 교회는 세상을 위로해야 합니까?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심지어 피부색이 달라도, 따지고 보면 원래 아담과 하와라는 한 조상에게서 나온 형제 자매들입니다. 게다가 믿지 않는 그들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받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3:16 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세상이란 말이 너무 멀리만 느껴진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 자매 부모 그리고 친구라고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아파하고 힘들어 하면 우리가 당연히 위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세상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또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누구든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세상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한 사람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35:11-12절을 보면, “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 다윗을 죽도록 괴롭히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을 개인에게/성도에게/ 교회에 적용해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성도를 괴롭힙니다. 아니면 세상이 교회에 어려움을 주고 심지어 핍박까지 합니다. 너무 심해서 육신적으로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상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망하고 곧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괴롭히더니 잘 됐다라고 반응을 보여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 대해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13-14절을 보면 다윗은 그들이 병들었을 때 굵은 베옷을 입고 아픔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진실된 마음으로 금식하며 그들이 낫기를 위해 기도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에도 다윗은 친구와 형제에게 행하는 것과 동일하게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자신의 어머니를 곡함 같이 애도를 표했다고 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람은 다윗처럼 하는 것이 세상을 향한 당연한 위로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분명 우리의 잘못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주 안에서 회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궁금한 것은, 세상은 교회를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한국 갤럽의 한국의 주요 종교들에 대한 호감도 조사를 보면, 2004(37/17/12) 10년 뒤2014년을(25/18/10) 비교해 보아도 불교, 천주교, 기독교 순입니다. 종교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는 이유는 우선 관심이 없고, 실망감, 여유 없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만 할까요? 먼저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거부감과 불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다가서기 전에 우리의 변화된 삶이 요구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인정은 우리로 하여금 철저하게 회개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아픔과 사회적 관심에 함께 하지 못했던 죄, 윤리와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을 내어 놓고 통회하며 기도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이런 것을 잘 모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야만 우리가 반성하고 있다는 것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과 함께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님들은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성도의 사회참여에 있어서 신앙관의 차이에 따라 우리 안에서도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을 취하든지 자신의 믿음의 모습이기에 서로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분들이 불의를 보고 교회 밖으로 나가 행동하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교회에 머물며 기도하는 분들을 향해 왜 우리와 함께 현장에 동참하지 않느냐고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서로 각자가 사고하고 판단하여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동하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기도도 안하고, 밖으로 나가지도 않으면서 입술로만 사회 정의니 공의를 외치는 분들은 행동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기도로 나아가든, 행동으로 움직이든 국가와 사회에 공의가 흘러가도록 하는 일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일 때, 세상은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기도로 그들의 상처에 대해 같은 마음을 품고 있음을 나타내고, 또 현장에서 함께 만날 때 다시 교회로 마음을 돌릴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위로입니다. 우리 주변에 위로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는 전혀 관심이 없어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도 있지만, 교회에 다니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에 대한 불신을 없애고 신뢰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지난 주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것으로 인한 힘든 관계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16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지키 못함으로 관계의 악화가 또 발생합니다.

 

먼저 고린도를 방문하고 난 뒤 마게도냐로 갔다 다시 고린도에 들러 헌금을 받아 예루살렘 교회로 갈려던 계획을 했다고 고전16: 3-7에도 상세하게 말해 줍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무슨 이유가 생겨 그들을 방문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약속을 일단 못 지키는 일이 생기자 그에 대한 불신은 깊어 갔습니다.

 

17절을 보면 신중하지 못하고 약속을 함부로 하고, 심지어 약속조차 지키지 않는 경솔한 사람이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울 입장으로서는 만약 자신이 그렇게 낙인 찍히면 앞으로 복음사역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의도적으로 약속을 어기지 않았고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지혜인 것 같습니다. ‘교회 형편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겠지라고 안일하게 대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능하다면 적극적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교회는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돕고 좋은 일을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정보가 잘 알려지게 하는 곳이 SNS입니다.

 

SNS는 교회를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과 서로 대화하는 통로입니다. “당신들과 함께 이런 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도 당신들의 관심에 함께 하려는 마음으로 구제와 봉사라는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혹시 함께 할 때 같이 하지요라는 초대장인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10가지 기도제목을 보면, 우리 죄를 회개하는 내용도 있지만, 생명을 잃고 슬픔가운데 있는 분들의 아픔을 서로 나누기를 원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난 당하는 분들을 위로하기를 원하는 마음, 그리고 힘든 현장에서 수고하는 분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격려하는 내용들입니다.

 

사람들이 코로나와 세상을 위해 매주 월요일 금식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예수쟁이들 쓸데 없는 짓 하고 있네라고 비아냥 거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감동 받을 것이라고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위해 이렇게 수고하고 있으니 알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아픔에 대한 교회가 나누는 작은 위로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일이 나면 교회는 이런 것을 하는 구나정도만이라도 알기만 해도 교회는 세상과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분이 설교 말씀을 찾아 듣겠습니까? 물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이 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히 SNS에 실린 교회 활동 중 자신이 관심 갖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땅에서 일어나는 인종차별에 대한 교회의 기도제목을 보면 자신들과 같은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향한 그분들의 태도는 사뭇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는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 영역들을 더 확장 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을 보면 권위로 상대방이 오해하는 것을 바로 지적하지 않고, 먼저 부득이한 사정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리고 이해를 구했습니다. 그 다음은 23절을 보면 약속을 철석같이 해 놓고 뒤집는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적극적으로 상대방이 오해하는 것을 바르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교회도 이런 접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이 오해하고 있는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교리에 관한 것들입니다. 물론 신학적 지식이 필요해서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도 각자 일하는 현장에서 얼마든지 세상이 오해하는 것들을 풀어가는 대화가 가능합니다.  

 

우리 교회가 진행하는 현장 선교사 양육훈련이 바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다음에 시작할 때 많은 분들이 조인해서 위로 받기를 원하는 세상과 소통하는 분들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교회가 제공하는 것은 성경적 세계관으로 여러분이 가진 전문지식을 바라볼 수 있도록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인문, 사회, 과학 분야에서 많은 지식을 가진 분들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글과 강연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불편한 생각들과 오해들을 풀어준다면 세상에 대한 위로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사역을 현장에서 여러분이 감당하려면 한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지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아야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읽고 그대로 살아가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한가지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믿는 우리들이 자신들보다는 더 거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잘못을 보면 실망합니다. 실망한다는 것은 뭔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가진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고개를 숙여야만 합니다. 결국 교회가 세상으로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중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거룩을 말하면서 전혀 거룩하지 못한 행동이 교회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세상이 오해하는 것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다들 윤리와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지만 외적으로도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롭게 된 예가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사에 위대한 유산을 남겼던 어거스틴이 그랬습니다. 새롭게 거듭나며 우리들에게 고백론이란 고전을 남겼습니다. 젊은 날의 방탕함과 잘못된 종교에 빠져 헤메던 시절 그리고 예수를 만나고 난 뒤 사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고백으로 흘러나옵니다.

 

설교를 듣는 청년들에게 방학 동안 추천하는 도서입니다. 부모님들은 사춘기의 자녀들에게 권할 책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만나기 전의 사춘기에서 청년이 되기까지의 삶의 모습을 너무나 생생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다는 것과 주 안에서 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책입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나누어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못한 확실한 이유를 아직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이 변명만 늘어 놓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갈 수 없었던 구체적 이유를 길게 쓰는 것보다 편지를 전달하는 디도에게 오히려 질문하게 하는 편을(다른 편지?) 선택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갈 수 없었던 이유는 행 19:21-41절을 보면, 가는 도중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 고소를 당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오늘 읽은 본문에는 언급이 없지만, 분명히 고린도에 갈 수 없었던 확실한 이유는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바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방면으로 설명해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참 난감합니다. 그러면 포기할 만도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바울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실망한다고 해서, ‘아무리 주님 닮으려고 해도 또 죄를 지으니 자진해서 문 닫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세상은 교회를 어떻게 볼까요? 뻔뻔한 줄 알았는데 멋져! 교회에 나가 볼까? 이렇게 사람들이 나올까요? 바로 이것을 사탄이 유도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사람이 그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머리는 누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머리가 아닙니다.

 

5:23과 골 1:18절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머리만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주님은 교회의 약한 모습을 알고도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을 것 알고도 주님의 피 값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주님 오실 때까지 그냥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문을 닫는다면 이 땅은 누가 구원을 선포하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교회는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예수의 생명이 들어있는 교회는 마지막까지 이 땅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도록 쓰임 받게 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인 구원을 누리도록 최후까지 교회는 남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이 갈 수 없었던 이유를 아무리 설명해도 의심하는 성도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카드를 준비합니다. 12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당신들을 실망시키는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약한 우리와 함께하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 선택을 합니다.

 

내가 자랑할 것은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힘입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내 육체의 지혜대로 하면 잘 하다가도 넘어지고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늘 일어선다는 것만을 나의 양심이 세상을 향해 증거합니다. ‘정말 이것만이 자랑 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3절에서는 완전히 알 것이 있는데 14절은 그 완전함은 지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성도들은 부족함이 채워지고, 세상은 오해한 것을 알게 되어 완전을 이룬다고 합니다. 게다가 교회는 세상에 복음을 전한 것이 자랑이고, 세상은 믿어 구원에 이르러 결국 서로의 자랑이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세상을 향해 성도가 약할 수 있음을 말하긴 했지만, 또한 그 약함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시간이 지나며 강해지고 굳건하게 변하는 성도를 21절에서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어가는 성화를 뜻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에 넘어질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 나를 죄에서 떠나게 하며,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십니다. 그러나 그 성화의 마지막 완성은 주님 오시는 날 최고의 기쁨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보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변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기에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괘변이 아니며 성도의 변명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 계획입니다. 세상을 향해 부끄러운 모습이 있긴 하지만, 믿는 자들과 함께 역사하시며 궁극적으로 예수 닮는 모습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성령님만을 나는 자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백이며 성도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기 속에 계시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은 뒤로 물러가고 하나님이 직접 나서야 세상을 진짜 위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 되신 하나님만이 죄로 꼬인 세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약할 수 있습니다. 실수로 세상에 사과할 수 밖에 없고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고 따르고, 내가 나타내기를 원하는 내 속의 하나님은 전혀 다릅니다. 그분만은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나는 그분만을 따르고 닮아가는 사람이기에 내 속에도 분명 그분의 거룩함과 성실함이 있습니다.’

 

나의 연약함이 아니라 내 속의 하나님을 보면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연약한 성도를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를 만나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교회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마지막 위로는 나를 변화시킨 하나님을 직접 당신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것뿐이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이런 위로가 세상에 넘쳐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