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2): 고난 가운데 위로 

고후 1:1-6, 8-9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우리 성도님들을 강건케 하시고 힘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에서부터 유스 청년부 기혼자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잘 견뎌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많이 듣는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면서 누구나 예외 없이 경험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첫째는, 감염에 대한 염려와 걱정입니다. 한 두 달이면 끝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염려와 걱정의 차원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지나친 걱정은 건강에 좋지 않지만, 우리 모두를 더 조심하고 예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익숙해진 용어가 Social distance란 말입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부터 우리 모두가 두 번째로 경험하는 것은 격리였습니다. 좀 생소합니다. 우리 모두 격리가 필요 없는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자발적 격리가 시작되다 나중에는 강제로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마지막으로경험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입니다. 일단 언제 백신과 치료 약이 나와 팬데믹 상황이 종료될지 불확실합니다. 닫혀 있던 가게 문들도 다시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직장도 출근을 시도하고, 대학 연구실도 제한적으로나마 열리고 있지만 모든 것이 아직은 불확실합니다.

 

당장 해외에 있는 신입생들이나 재학생들은 다음 학기가 결정 되어야만 비행기 티켓부터 준비할 텐데 막막하기만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살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제한 되며, 미래에 대한 예측이 불확실한 총체적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 시간을 한 마디로 역경 시련 환난 고난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살면서 나만 고난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어려움이 찾아올 대입니다. 그때 주위를 돌아보면 나만 제외하고 다들 편안해 보입니다. 슬프기도 하고 억울합니다. 이때 자연스럽게 왜 나만 고난 당하는가? 라는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다음은, 전쟁이나 전염병이 발생해서 모두가 다 어려운 시간을 보낼 때에도 자신만 고난 당한다는 느낌은 들 수 있습니다. 이 때는 다들 힘들지만 특별히 내게 더 고난이 오는 경우가 될 것입니다. 이 때도 역시 왜 나만 유독 더 힘든 일을 주냐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나만 고난 당한다고 생각하는 그 고통을 우리 모두가 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절의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라는 말은 1절을 참조하면 모든 성도를 지칭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 모두는 환란을 당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고난을 겪는 시간이나 종류에는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예외인 성도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만 고난 받는다는 생각에서 우선 벗어나야 합니다. 사실 만 고난 당하지 않습니다. 서로 잘 알지 못하고, 또 관심이 없어 남의 문제를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고난이 없다는 사람을 지금까지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 누구에게나 고난은 올 수 있다는 말은 나도 받으니 당신도 곧 당할 거야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같이 힘든 상황에 있을지라도 더 심하게 고통을 느끼는 성도를 위로 할 수 있어야 하고, 고난 당한 사람을 보면 성도는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4절을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그 위로를 가지고 모든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능히 위로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누군가를 먼저 위로합니다. 그리고 그 위로 받은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십니다.  

 

내가 남을 위로 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을 안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도 같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다른 사람보다 먼저 위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로 하시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를 가지고 모든 환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우리의 이웃을 위로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위로 받아야 할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다들 코로나로 한 집에 사는 가족들 외에는 거의 잘 안 만나는 그런 상황까지 겪었습니다. 가까운 동네에 산책을 나가면 마주치지 않으려는 분이 있습니다. 멀리서부터 다른 방향에서 걸어 오는 나의 이웃도 나의 밝은 미소의 위로를 필요로 합니다.

 

코로나 확진 검사를 받고 학교시설에서 몇 일 동안 자가격리를 했던 학생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마음 졸였겠습니까? 접촉을 한 분들 마음도 불편했을 것입니다. 격리가 우리 모두에게 외로움을 경험케 했습니다.  줌이나 영상으로 만나고 대화하지만 실제 만나는 정겨움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뛰어 다녀야 잠도 잘 자고 성장도 할 텐데,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만 거의생활합니다. 운동량이 엄청 부족한 상태입니다. 친구들은 또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데이트하는 청춘들은 얼마나 제한을 받고 있습니까? 연세 드시고 혼자 계시는 분들은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코로나 이후 헌혈이 많이 줄어들어 긴급상황 이메일을 저도 받곤 합니다. 우리는 인터넷이라도 있어 영상으로 만남도 하지만 열악한 환경에 있는 선교사님들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다들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나도 위로 받고 싶지만 특별히 이런 분들이 더 위로를 필요로 하는 분들입니다.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살펴 보기 바랍니다. Social distance 라는 말 보다는 physical distance 란 말을 더 사용했으면 합니다. 어느 분 영상을 보다 이 말이 더 현실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삶과 마음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 몸만 좀 거리를 두고 생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는 서로 더 만나고 싶어하고, 성도간의 친교나 가족이나 친구들간에 교제를 더 그리워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코로나 이전보다 영상이긴 하지만 더 자주 만나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분들은 주 안에서 교제도 여러 형태로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위로를 받을 수 잇는 것은 이 시대를 바라보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늘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을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주님 오실 텐데 그 시간을 기다리며 앞으로 올 환란이나 시련에 대비해서 미리 훈련 받는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또한 될 줄 믿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고난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을 하나 더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난 당한 분들 말을 들으면 간혹 어떻게 나에게 이런고난이 올 수 있는가?’ 라고 말씀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란 말 가운데는 원하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남한테 나쁜 소리 안 듣고 남들 도우며 바르게 살았는데 어느 날 엄청난 고난이 찾아 옵니다. 시작한 사업이 순조롭게 잘 되어 가다 갑자기 경제적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난이 왜 일어나느냐는 질문에 4절의 우리의 모든 환난이라는 말 중 특별히 모든이라는 단어가 답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환란이라는 말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 기대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사실 인생 살면서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억울한 일이 믿는 성도들에게도 일어 날 수 있다는 것 알고 살아야 합니다. 기적까지 일으키며 병든 사람들 고쳐 주신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에게는 전혀 힘든 일이 안 일어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인생이 겪는 모든 고난 가운데 들어 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말은 단지 십자가에서 당하는 육신의 아픔만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런 고통은 옆에 있던 강도들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시대 수 많은 십자가 사형수들도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형의 아픔의 차원을 뛰어넘는 고난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사야 53:4에서 우리의 질고라는 말이 그 의미를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의 질고라는 말은 인간이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전쟁으로 가족을 먼저 보낼 수도 있고, 기근으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을 수도 있고, 질병으로 아플 수도 있는 모든 인생살이의 아픔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온갖 종류의 고난과 고통이 나를 빠뜨리고 지나갈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5절의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는 온갖 고난을 다 품으신 주님의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도 넘친다고 말씀합니다. 듣기에 죽을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래서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은혜와 평강은 힘든 일이 없어 행운이고 마음이 편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은혜는 운이 좋은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오히려 불행이라고 말하는 가운데도 하나님의 위로가 넘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다시 보면, 고난이 넘쳐나면 그에 못지않은 그리스도의 위로도 풍성하기 때문에 성도는 모든 종류의 고난 가운데도 버티고 설 수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우리 가운데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 너무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 바라보며 힘 내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이제,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이 위로를 더해 주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 4절에 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더 힘들고 아파하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고난 당하면서도 남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정말 힘든 일을 당한 사람이 지금 막 고난 당한 사람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면 위로가 되곤 합니다. 제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경험한 일입니다.

 

중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 대부분 그대로 올라가지만, 더 많은 지역에서 다양한 삶을 가진 친구들을 만납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이 참 충격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중에는 양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작은 아버지 집에 사는 친구를 보면서 저는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위안을 얻을 때가 많습니다. 이 모습을 6절 중반 이하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내 말 솜씨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위로가 되도록 역사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힘든 시간이 올수록 주 안에서의 성도의 교제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성도간의 교제가 더 절실한 때 입니다. 뉴스를 보면팬데믹 상황이 길어지면서 스트레스와 불면증 우울증까지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힘든 분들이 있다면 6절 상반절의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는 말씀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힘들 때일수록 더욱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위로해 주시며 강하게 붙잡아 주는지 다시 고백하며 나아가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이기고 사망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새롭게 하며 자신감과 소망을 일으켜 주십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만들 줄 믿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렵고, 상황을 미리 생각하고 걱정하는 염려들을 사라지게 역사하시는 분이 내 속에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까지 내어 주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주님이 보낸 성령님이십니다. 내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3절 말씀처럼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가진 어떤 문제도 주 안에서 위로 받고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같은 마음의 고충이 있는 분은 대화하기에 편한 분과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기도제목을 일대일로 나누며 성도의 교제를 시작해 보기 바랍니다. 얼굴과 얼굴을 처음부터 보기 힘들면 간접적으로 카톡으로 소통하며 주 안에서 위로를 넘어 치유함 받기를 원합니다. 8절을 보면, 바울 자신도 당한 환난이 너무 심해서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겪은 심한 마음의 고충들이 많지만 본문 1절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는 말에서 하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쓰임 받았고, 많은 서신서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도의 마음을 늘 짓눌렀던 것은 그의 사도권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당시 사도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주님을 직접 보고 따랐던 것에 비하면 바울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늘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9절에서 보여주듯이,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가운데도 바울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그분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난의 유익입니다. 고난은 하나님만 바라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 의지해 보았자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철저히 알게 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외형상 우리에게는 힘겨운 시간입니다. 한편,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즐거운 시간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는 기분 나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맞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고난의 때에 모든 것 동원해서 시도해 보지만 안됩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구원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6절에서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라는 말씀과 같이, 고난의 최종적인 목적은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이 목적이라면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그러니 고난의 때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 보기에 하나님의 즐거운 시간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을 버릴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진짜라고 생각하고 목숨처럼 붙잡고 있던 가짜들이 하나님 옆에 세워지고 분별 받는 시간입니다. 고난은 참 힘든 시간이긴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어디에 서서 살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이 고통 없었더라면 세상만 따라가며 하나님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고난을 만났기에 다른 사람 무시하며 살았던 것 회개하게 되고, 남들이 내게 해 주는 위로의 말 한 마디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고난 받는 사람들까지도 챙기고 그들의 아픔까지도 품고 위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의 위로를 받은 그 사람이 단지 위로 받음으로 끝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고난을 넘어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흘러 넘치기를 간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아픔으로만 보지 말고 고난을 통해 부어지는 유익을 바라보며, 위로 받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