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1): 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후 1:3-4, 10-11

 


6월에 접어 들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이전으로 복귀가 조금씩 이루어 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제한 된 인원이지만 밖에 나가 얼굴을 대하며 친교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19 바이러스 백신이나 치유 약에 대한 소식이 없어 불안함과 긴장을 놓을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가 생명을 잃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늘 미국사회의 불안한 요소 중의 하나였던 인종 차별에 대한 불씨를 당겨 항의 시위가 전국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온통 우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상처투성이고 불안과 걱정 염려들로 가득 차 있는 현실입니다.

 

힘들다는 것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위에 사람들도 없어 보이고 괜히 혼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 우울한 감정에 빠져들 위험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힘들다는 생각에 빠지기 보다는, 이 힘든 상황에 내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지금 환경에서 자신을 다른 환경으로 옮겨가게 만드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혼자 있는 분은 전화나 영상이나, 야외에서 친한 친구와 안전하게 만나, 더 자주 이야기도 나누어 보기 바랍니다. 정말 오랜만에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은사들에게 손 편지를 써 보내어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 보기 바랍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불편하면, 혼자서 동네 산책만해도 훨씬 마음이 맑아집니다. 차가 있는 분들은, 가까운 산에 하이킹도 해 보시면 좋습니다. 바깥에 나가는 것 조차도 불편하면 집 안에서 햇볕이 있는 밖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창가에 다가가 잠시라도 햇볕을 쬐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집중력도 높아질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다른 치유 방법을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장기화 되는 physical distance 로 인해 생기는 우울증, 인턴이나 job market이 활발하지 못해 오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불안 염려 걱정, 나중에는 화까지 일어나는데, 이런 것들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2020년 성경일독 1기에 11분 정도가 1월에 시작해서 5월에 마쳤습니다. 한국에 가서도 읽으면서 매주 나눔 시간에 참가해 주신 분도 계십니다. 주일을 빼고 하루에 10장만 읽으면 4개월 만에 시대순으로 한번 읽어 갈 수 있습니다. 2020년 성경일독 2기를 오늘부터 10명 정도 모집해서 곧 시작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세상의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사건과 사람을 바라보게 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나를 붙들고 있는 복잡한 생각들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나를 짓누르는 우울한 마음을 몰아내어 신선하고 새로운 생각이 들어올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묵상). 그래서 생각이 복잡할수록 성경을 손에 들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도 굉장히 실질적으로 고난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0절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망과 같은 현재 상황에서 나를 구해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나를 구해주신 경험에 기초해서 다시 기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장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힙니다. 하나는 그런 경험이 내게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10절을 다시 보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에게 지금 그 경험을 만들어 보라 그러면 미래에 그것이 너의 과거의 경험이 될 것이라는 매우 도전적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다음 문제는, 바라보라고 해서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실 하나님을 기대했는데 바램 대로 일어나지 않고 끝나 버리는 경우입니다. 대부분 이런 경우 성도들은 자신에게 믿음이 없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볼 것은 내가 기대하는 것과 믿음은 같은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대하는 것은 믿음과 어감은 같게 들리지만 다릅니다. 부추를 다른 지역에서는 정구지라 부르거나, 바다에 나는 홍합을 담치 합자 등으로 부르는 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하나를 다르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다른 것이 가까이 있거나 연결되어 있어 같은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착각입니다.  

 

10절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을 기대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가 할 수 있고, 실제 하는 기대와 바램입니다. 그리고 난 뒤 바울은 그 기대와 바램 외에 필요한 것이 분명 있기에 11절에서 뭔가를 요청합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즉 기도를 요청합니다.

 

결국 바램과 믿음은 기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기대는 바라는 마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기도의 자리에 있습니다. 말로는 얼마든지 소망 있는 좋은 이야기 서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램과 기대는 듣기에는 좋아도 하나님의 응답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가 누가 있습니까?” 진짜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은 간절함이 담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반드시 기도로 나아가는 진정성이 있기에 믿음이 되어 역사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기도에 관해서 한 가지 더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언제 응답 받느냐는 것입니다. 6:10을 보면 순교자들의 부르짖는 기도가 있습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땅 아래 있는 사람이나 하늘에 가 있는 분들이나 다 궁금한 것 한 가지는 기도 응답의 때인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계 6:11절을 보면,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말씀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은 우리가 바라는 때보다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내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 안 할 때 전혀 기도가 도움이 안되고, 주님도 나를 위로조차 안 해 주신다고 원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기다림이 위로입니다. 기다림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기다림은 반드시 끝이 있고, 그 끝에 응답이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또한 그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 8: 3-4은 보여줍니다.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동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이 구절은 성도의 기도가 금 향로에 담기는 이미지를 보여 줍니다. 그릇에 차기까지 기도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릇에 차기까지라는 의미는 기도의 자리에 실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막연하게 시간만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실제로 해야 합니다. 

 

문제를 가진 분들이 우리 공동체 내에 있으면 기도의 자리로 나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본인 스스로 있는 자리에서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금 향로라는 의미는 기도의 자리에 나올 때 진정성과 간절함을 담은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며, 형식적이고 의무감에서 하는 기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사태를 직면하고 있는 현실에서 문제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바램과 기대를 다들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해야 할 것은 기도입니다. 매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물러 가도록 기도하는 것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능한 분들은 한끼라도 매주 월요일 금식에 동참해서 함께 기도가 올려지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미국 땅에 인종차별이라는 오래되고 깊은 상처를 싸매고 평화가 자리잡은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뉴스를 많이 보고 접하는 시간을 많지만 실제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듣고 보는 시간을 한번만이라도 기도의 시간으로 바꾸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하면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기도가 위로라는 사실을 알면 달라질 것입니다. 조금 생소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바램이 주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기에 이것보다 더 좋은 위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들려오는 아픔에 귀 기울이십시오. 듣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사람에 그치지 말기 바랍니다.

 

그것을 품고 기도의 사람이 되어 진정한 이 시대의 애통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세대의 아픔을 기도로 품고 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마 5:4절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뭔가를 할 때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해도 흘러 넘치는 위로에 대해 바울은 소개를 합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위로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가장 먼저 3절에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구원자인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내가 뭐길래? 내가 그렇게 중요한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그렇게 중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공주도/왕자도 아니고. 세상에서 나 아니면 안 되는 필요의 사람도 아닌데?  나 아니더라도 나보다 뛰어나고 착하고 귀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나는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다들 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 땅에서 나의 가치로 보면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 나를 위해 죽을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사랑하셨을까? 바로 그리스도라는 단어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전쟁에서 살려주고, 단지 어려운 경제 형편에서 도와 주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망으로부터 구원입니다. 세상에서 가진 지위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해 죽음 이후에 당할 영원한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구원자로 보내 주셨습니다.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사실 오래 전부터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인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초토화시킬 기세로 기성을부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의료장비 등을 준비해 두지 못한 개인이나 국가 모두 엄청난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지혜 아니겠습니까?

 

저는 누가 저를 보고 죄인이라고 말하기 저에 전에 참 죄 많이 지으면서 살았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배경에는 불교 문화에서 자란 영향이라 생각합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소풍을 사찰로 가곤 했습니다. 가는 사찰 입구에 천왕각이라는 문이 있는데 그 안에 사천왕이 있습니다.

 

엄청 무섭게 생긴 사천왕이 죄 지은 사람들을 발 아래 누르고 고통 받는 모습을 나무로 조각한 것입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이미 죄 지은 몸이 죽으면 저렇게 고통 받고 산다면 나는 다 틀렸다가 제가 절에서 받은 첫 느낌이었습니다. 자라면서는 삼계육도를 거쳐 부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로 해탈을 못하면 계속 윤회를 거듭하며 다음 내 생은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지 거의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사람으로 태어난 내가 동물보다 더 이하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 제일 자존심 상했습니다. 나중 복음을 듣고 구원을 알아 갈 때 행위가 아닌 은혜와 믿음으로 얻는다는 사실이 가장 좋았습니다.

 

착한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데 착한 일하다가 또 죄 지을 나를 아는 저는 구원은 오직 믿음이라는 복음이 엄청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윤회가 아닌 부활이 있다는 말이 정말 좋았습니다. 부활은 인간으로 살면서 죄로 인해 쓰러지고 넘어지며 고민했던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해방을 맛보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지어보고 산 사람은 이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 가운데 나는 죄 안 짓고 멋지게 살았다고 자랑하는 분이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 분도 그 수준만으로도 죄의 고통을 맛보기에는 충분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압니다. 하지만 인정 안하고 속일 뿐이지요.

 

부활은 죽고 다시 눈을 떴는데 죄가 없는 세상을 만나는 것입니다. 죄가 없기에 죄 짓고 싶은 마음도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는 변화된 모습을 이룬 나를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위로 아닙니까? 세상에서 얻은 명예, 누리는 부를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도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죄 짓고 살지 않습니까?  

 

좀 심하게 오히려 당신들이 누리는 것들로 인해 다른 사람은 비교의식과 열등의식으로 우울해지고 그런 것 얻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도 생겼다고 말하는 분들도 세상에는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후에, 내 것 내려 놓을 테니 내 것 가져 가서 살아보라고 양보하는 사람을 아직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느 정도 누리면 정년퇴직이 있고 독과점을 못하게 법으로 막고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 맛을 아는 사람들은 자식도 그것 누렸으면 해서 자신이 갔던 길을 가게 합니다. 경쟁에서 살아남도록 공부 시키고, 스펙 쌓기 위해 초등학교 때는 아시아를 돌아서 대학 때는 전세계 다 휩쓸도록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집중하느라 그 다음 것 준비 못하는 것이 걱정될 뿐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주신 어떤 것이든지 복으로 알고 누립니다. 작고 낮은 것이든, 심지어 하찮은 것일지라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행복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있어도 먹지 말라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있는 것 맛있게 먹고, 주신 것 누리는 삶이 있고, 걱정보다 평강이 있는 이 땅에서의 멋진 삶을 살다 다음 시간으로 들어갈 때 두려움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바로 예수를 나의 주로, 나의 구원자로 믿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 보다 더 큰 위로가 있습니까?  저는 남들이 힘들어 하는 일, 잠 못 자는 것, 배 고픈 것, 돈 없어 힘든 것 보다 나를 더 괴롭힌 것은 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곳을 찾아 헤맨 적도 있습니다. 어려운 군대도 지원해 가 보고, 높은 산에 들꽃이 만발한 곳에 사는 사람들을 동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났을 때 진정한 위로를 발견했습니다. 죄로 벗어나려고노력하는 과정에서 무능력과, 고행으로도 다시 살아나는 죄성의 잔임함, 종교가 들려주는 지식으로 해결하려 해도 논리에서부터 맞지 않는 한계성을 발견할 때, 밀려오는 좌절감은 좋은 대학 못 가서 느끼는 그런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과 절망과 한계 속에 방황하고 헤매다 죽어가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3절 중반 절은 자비의(오이크티르모스) 아버지라 부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죽음 등을 보고 슬퍼하는 감정뿐만 아니라 동정을 베푸는 행위까지 포함한 그런 의미입니다.

 

결국 우리의 고난과 아픔과 상처를 보고만 있지 않으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 대신 아버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 가운데서 구원한 우리들을 하나님은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접착제와 같은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부릅니다. 자녀가 될 때 아버지로 받는 것은 전부입니다. 마음 괴로워 아파할 때 함께 하십니다. 위험한 것이 앞에 있으면 무엇보다 자녀를 위험으로부터 지킵니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공급해 주려고 합니다. 질병으로 연약할 때도 아버지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을 베푸시는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만든 자녀였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나의 아버지였습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내 아버지를 다시 찾은 것입니다.

 

49:15에서 하나님은 여인이 어지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아버지가 없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아버지를 찾으면 얼마나 기쁠까요? 고아라고 생각한 사람이 아버지를 찾으면 그보다 더 큰 위로가 있습니까?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인류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던 사망이라는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영원한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까지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환난으로부터 건져주시고 평안을 허락하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을 바라고 기도하는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