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19): 이것만은 피해야 합니다 

역하 33:1, 3, 10-15; 21-24

 


우리 성도님들! 살면서 꼴찌는 면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신적이 있는지요? 기억이 잘 안 나시면 점심 내기 게임 할 때 엄청 열심히 했던 적은 있을 것입니다. 서로 일등도 나누면서 여유 있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살면서 마지막 등수도 할 수도 있고, 그것조차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피해야 하는 영적인 면에서의 꼴찌가 있습니다.  

 

그것을 오늘 역대기를 마무리 하면서 나누고자 합니다. 역대기를 다루면서 하도 이름들이 많아 기억 못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한 왕과 악한 왕의 기준은 본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신들을 섬기느냐,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권위에 도전하느냐,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방국가의 힘을 의지하느냐였습니다.

 

한 마디로 줄인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 되느냐 입니다. 표적에서 이탈된 것을 하마르티아죄라고 부른다는 것을 많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거룩을 상실하고 죄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늘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스라엘을 향해 돌아오라는 말을 전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왕들을 살피지만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누가 가장 악한 왕일까요? 대부분 므낫세라고 말합니다. 본문 2-10절에서 언급된 엄청난 죄를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왕들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그렇게 쭉 하나님 앞에서 죄만 짓다가 죽었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11-13절을 보면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나중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 죽기 때문에 가장 악한 왕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어색한 부분이 사실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역대하 33장을 쭉 읽어 내려가면 끝 자락에 그의 아들 아몬의 이야기가 불쑥 나타납니다.  

 

대부분 새 장이 시작되면서 왕을 소개 하는데 여기서는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너무 그의 일생이 짧아 얼핏 지나칠 수 있지만 꼭 살펴 보아야 합니다. 21절을 보면, 무려 8명이나 되는 유다 왕들이(아마샤 요담 히스기야 여호야김:25 아하스:20 아몬:22 여호야김:23 시드기야:21) 20대에 왕위를 오른 것처럼 그 역시 22세에 왕이 됩니다.

 

10대에 왕이 된 요아스(7) 요시야 여호야긴(8), 웃시야(16) 므낫세(12) 5명의왕에 비하면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고 다스릴 수 있는 충분한 나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치기간도 비록 2년에 불과하지만 석 달에 불과한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긴과 1년으로 마친 아하시야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사실 긴 시간을 다스린다고 해서 다 선한 왕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 중에 가장 길게 55년을 통치한 아버지 므낫세의 악행을 기억합니다. 그 다음으로, 52년을 통치한 웃시야도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리며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나중에 교만해져 제단에서 자신이 직접 분향하다 나병으로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아몬은 주위 사람들에게 휘둘릴 나이도 아닌 적절한 나이에 왕이 되었고, 자신의 주도권 하에 왕국을 다스려 나갈 충분한 자격을 갖춘 왕으로 보입니다. 비록 통치 기간은 짧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선한 왕으로 살 수 있는 선택이 앞에 있었습니다. 아직은 그에게서 특별한 악한 행위는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음 절인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 누구 누구의 모든 행위대로 아니면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는 표현에 우리는 익숙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문에 대해서는 좀 다른 표현으로 소개 됩니다.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인해 일단 아몬은 전혀 선한 왕의 부류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가 나쁘면(아하스) 아들은 선하고(히스기야), 또 아버지가 선하면(히스기야) 밑에 악한 왕이(므낫세) 나오는 그런 경우도 아닙니다. 아버지 므낫세의 나쁜 행위를 따라 2대에 걸쳐 아들까지 악한 왕이 나온 적은 처음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 므낫세는 포로로 잡혀갔다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인생 마지막에 선하게 변한 아버지 밑에서 나온 악한 아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22절 이 구절은 나중에 변한 그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지 못하고 악한 영향만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드디어 22절 하반부는 아몬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소개합니다.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다고 합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기 전 므낫세가 자신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버린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 므낫세는 15절을 보면 나중 새 사람이 된 후 이방 신들과 여호와의 전의 우상을 제거했다고 말해 줍니다. 그러면 히스기야-므낫세-아몬 삼대를 아몬을 기준으로 다시 보면, 할아버지 히스기야는 개혁을 통해 아세라를 버립니다. 아버지 므낫세는 할아버지가 버린 우상을 평생 섬기다 하나님 만나고 다시 버립니다.

 

그리고 아몬은 할아버지가 버리고 이어서 아버지가 결국은 버린 우상들을 다시 주워와서 섬기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가 버리고, 아버지도 평생 섬기다 결국 버렸다면 왜 이것을 섬겨야 하는가에 대해 한번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이기에 십계명의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적고 있습니다. 게다가 역대 왕들이 개혁을 할 때마다 우상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수 많은 선지자들이 왕들과 백성들에게 우상으로부터 돌아서라고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린 우상을 다시 주워 올 때는 그도 뭔가 생각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도적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우상이 그렇게 매력적인 것일까요? 21세기를 사는 오늘 날 우리들이 고대근동의 바알이나 아세라 신상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지금 말고 예배 마치고 검색해 보기 바랍니다. 정말 볼품 없습니다. 잘 아는 그리스 여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것들이 지금의 포르노그래피에 해당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단지 절하고 섬긴다는 그런 차원과는 조금 다른 접근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온갖 음란물을 접할 수 있던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만들어진 형상을 통해 사람들은 정신적 만족을 얻었고, 실제 신전을 찾아가 여사제들과 육체적 쾌락을 즐겼다면 버린 것도 다시 가져올 만한 엄청난 유혹이 있었던 것이지요.

 

말씀을 듣는 중에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상을 버리기가 힘들고 악은 정말 끈질기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버린 것일지라도 다시 주워올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약함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중독이라고 부릅니다. 술 도박 마약 게임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께로 멀어지게 만드는 많은 것들이 너무 강한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히는 죄와 악을 어떻게 끊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인격적으로 하나님/예수/성령을 만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아몬의 아버지 므낫세가 11-13절에서 잘 보여 줍니다.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그렇다고 고난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접하는 어떤 환경에서든, 우리 인격을 구성하는 지정의를 통해서든, 아니면 그것을 뛰어넘는 신비한 영적 체험이든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도 만나 주십니다. 우리 영혼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아몬과 같이 늘 목말라 합니다. 그래서 버린 것을 다시 주워 섬기는 이유입니다.

 

이런 그의 행동을 볼 때 정말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구약 시대는 하나님 뜻 물으면 즉각적으로 응답하고 죄를 지으면 즉각 벌던 그런 시대입니다. 특별히 선지자들이 왕 주위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자신들이 직접 바로 받으며 살았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아몬은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라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가지고도 의도적으로 대적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버린 것을 다시 주워 올 때에는 이유 없이 가져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한 자신의 판단에 따라 의지를 가지고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도 모시는 신을 스스로 결정하고 지극 정성을 보입니다. 그런데 우상 덩어리 자체가 무당에게 그런 의지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뒤에 악한 영이 있습니다.

 

사실 우상 자체는 쇠나 돌과 나무로 만든 것에 불과합니다. 우상은 보이지 않는 사탄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아 버리는 매개체일 뿐입니다. 힘이 센 동물들을 조각하고, 해와 달과 별들의 형상을 보면서 무한한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 나올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 생각의 배후에 분명한 힘이 있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사탄이 사용할 수 있는 매개체가 더 다양해지고 과학이라는이름으로 포장되고, 합리성이라는 교모함으로 인간의 사고 속으로 파고 들어 옵니다. 그 예가 많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고안품이기에 하나님은 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구원은 오랫동안 종교인들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이상에 불과하다.”

 

지성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런 아이디어들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동의하게 만드는 지적 우월주의가 캠퍼스에서 사탄의 미끼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며, 오직 신 만이 줄 수 있다는 생명조차도 인간 능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지적 오만함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의 창조, 홍수 이야기는 유대인들보다 더 훨씬 더 오래된 신화 수준의 이야기를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실제 있었다기보다 가공된 것이고 윤리와 도덕을 첨부한 교리화된 인간의 작품에 불과하다.” 너무 단순한 주장 아닙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일생을 받쳐보고 그런 소리하면 노력만은 인정해 줄 수 있겠지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그리고 심판까지도 일순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을 미혹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말세에 미혹하는 자가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마 24:3-4에서 주님은 직접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사탄을 잘 알아야 하고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버린 우상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분들이 주님을 만나 삶으로 보였던 우상제거의 결단들을 보면서도 다시 버린 것을 주워오는 아몬과 같은 어리석음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26:11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고 말씀해 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몬 왕을 살펴 보고 있습니다. 선한 왕들에 비하면 좋은 점수를 받지는 못하지만 많은 왕들 역시 우상을 섬겼다는 점에서는 특별히 마이너스 점수를 더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 므낫세는 엉망으로 살다 회개하는 왕이었지만, 아몬은 회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 한번 여쭙고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언제 어떤 회개가 요즘 나의마지막 회개였습니까? “회개가 많다는 것은 죄를 많이 지었다는 말인데 없다는 것은 좋은 것 아닌가요?” 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저도 정말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정말 회개할 것이 없을까요?

 

얼마나 자주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서십니까? 내 것만 추구하는 나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슴 치며 주님 앞에 나아가십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불상한 사람들이 안 보이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잘 되고 돈 많고 자녀 건강하고 너무 편해서 고난의 십자가 메기가 싫지는 않는지요?

 

예수 믿는다고 하지만 부끄럽게 사는 내 모습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마음 한번이나 갖기나 하는지요? 일에 집중하느라 성장하는 내 아이들 믿음도 챙기지 못하는 부모는 아닌지요?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관심이나 있는지요? 코로나를 위해 10가지 놓고 매일 기도하고 월요일마다 금식은 한기라도 다들 동참하실 줄 믿습니다.

 

온통 우리의 기도가 좋은 것 주시고, 자녀들 좋은 대학 가도록, 사업 잘 되게, 건강하게 해 주세요라고 만 외치는 우리 신앙생활은 회개의 대상이 아닐까요? 그리고 삶에서 회개 자체가 아예 없다면 아몬 왕이나 뭐가 차이가 있습니까? 아버지 므낫세는 아무리 엉망으로 하나님을 떠나 살았지만 회개가 있는 마침을 했습니다.

 

2년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이지만 그 시간은 아몬에게 회개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로므로 저는 개인적으로 유다 왕들을 살피면서 가장 악한 왕은 므낫세로 보이지만,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가 없었고 철저한 교만만이 있었고 하나님 무시하고 대적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23절은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스스로 겸손함 같이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손하지 아니하고 더욱 범죄하더니라고 표현합니다. 회개가 없었다는 명백한 증거는 더욱 범죄하더니라는 말이 반증해 줍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3절의 아몬이 아버지 므낫세처럼 스스로 겸손하지 못했다는 뜻은, 하나님은 아들 아몬에게도 스스로 겸손해질 수 있도록 아버지 므낫세에게 했던 것 같이 뭔가를 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짧은 재위 기간일지라도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 본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죄입니다. 

 

다른 실수도 안 하면 좋지만 이것만은 정말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몬은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조차도 자신의 의지로 확실히 발로 차 버린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로부터 예수 안 믿는게 아니구요. 죽기 바로 한 시간 전에 믿을께요.”라고 말하는 분을 만납니다.  

 

그렇게라도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아몬이 20대 초반에 왕위에 오르고 2년 뒤에 피끓는 나이에 죽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도 남들에 의해, 자신의 신복에 의해 살해 당할 줄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왕이기에 전쟁에 나가 죽을 수는 있지요. 그렇지만 24절에서처럼 궁중에서 암살 당할 줄이야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롬 5:20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말씀이 분명히 있기에 회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최고의 배려인 징계까지 허락했을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허락되는 회개의 기회를 미루거나 회피하는 이것만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이런 분이 내 가정에서 친척 가운데서 예배자 가운데 없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마 6:33절의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병든 자가 있으면 병 낫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영혼을 먼저 살핀 후 구원받기를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자녀가 잘 되기보다 먼저 그 영혼이 거듭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기 보다 한 사람도 예수 알지 못하고 이곳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복음 전하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나의 죄를 발견 한 후 아몬처럼 미루다 주님 데려갈 날 잊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 듣고 죄임을 알고도 말씀 무시하고 하나님 만나는 은혜를 거부하는 이것만은 우리 가운데 없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반복되는 죄들을 내게서 걷어내기 위해 매일 철저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말로 변하는 성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