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17): 반복되는 실수를 이기십시오 

역하 25:2, 11, 14-16; 26:4-5, 10, 15-19

 


인간이 어리석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번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요? 그것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덤벙대다 음식을 흘리고, 국을 쏟고, 책상에 부딪히고,못에 옷자락이 걸리고, 쓰레기 통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반복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사소한 실수조차도 큰 손해를 가져 올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손해보험회사가 산업재해 사례를 분석해서 얻은 통계라고 합니다(조선일보, 10/13/2011). 치명적인 사고는 대부분 300번 이상 징후와 29번의 작은 실수 후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 한 예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타이타닉호도 과속, 해상감독 위반과 같은 작은 실수와 20차례의 경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는 반복되는 실수가 없을까요? 자녀를 말씀으로 양육해야겠다고 매번 결심하지만 바로 야단칩니다.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 것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 말 무시하고 대화를 주도합니다. 용서와 사랑, 칭찬과 격려 보다는 잘못한 것 먼저 지적하며 상처 주는 습관이 나올 때 참 한심합니다.

 

목회에서도 늘 기도 가운데 머물기를 원하지만 일이 우선되는 반복이 있습니다. 반복되는 실수만 생각하면 너무 힘이 빠집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성경 속의 인물도 실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도 자신의 아내를 두 번이나 누이라고 말해 아내를 잃어버릴 위험을 반복했습니다.

 

역대기를 보면서도 하나 발견하는 것은 유다 왕들 역시 실수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유다의 10번째 왕인 웃시야를 보려고 합니다. 4절을 보면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조금 조심해서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26장 전체와 웃시야 전 인생을 살펴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기록입니까? 아닙니다. 다음 5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웃시야가 선지자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였다에서 힌트를 찾습니다.

 

결국 4절의 그가 아버지 아먀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말씀과 5절을 연결해서 보면 그가 변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모습대로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의 아버지도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섰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25:2절은 웃시야의 아버지 아마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아마샤 역시 초반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습이었지만 어느 날부터 엉뚱한 길을 가게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 전환점이 25:11에서의 에돔과의 전쟁이었습니다.

 

25:14절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에돔의 신들을 가져와 그것들 앞에서 경배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 둘 다 초반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떠나 엉망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같다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유다 왕들에게서 반복되는 첫 번째 실수입니다(#1).

 

코로나가 우리 삶을 강타한 후 지금까지 잘 해 왔습니다. 오늘까지 11주 동안 온라인으로 잘 준비된 예배를 드립니다. 매일 각자 새벽기도, 월요일마다 금식, 목장모임, 성경공부, 중보 기도회 등 거의 모든 것을 유지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2020년 올해만 보면 마지막 남은 후반기인 가을학기만 잘 마무리하면 됩니다.

 

요즘 Post Covid 19에 대해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도래하며 어느 직장이 살아남고 어떤 것들이 사라질 것인가에 대한 예상들입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어나고, 사람들과 불편한 만남보다 편리한 단절을 원하는 세대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Untact’ 라는 신조어가 대세입니다.

 

음식 주문에서 배달까지 앱으로 통합니다. 오프라인에서도 이미 AI의 발달로 무인 서비스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교회도 당연히 이런 세상의 트렌드를 반영할 것입니다. 온라인 예배다 잘 준비된 교회들이 위기상황 때가 되면 늘어나는 종교인들을 계속 흡수해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출석 성도보다 유투브의 구독수가 많은 교회가 교회들을 주도할 것이라고 까지 말합니다. 동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상황에 대한 대처도 중요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본질적인 삶입니다. 팬데믹 이후 우리 교회를 포함한 교회들의 현실을 한 번 보기 바랍니다.

 

성도의 영성을 위해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 교회들이 온라인으로 엄청난 모임과 예배를 제공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 생기면 자신의 일이 그 시간을 대체합니다. 이전과 무슨 차이점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예배는 마음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올 때는 예쁜 옷 입고 옵니다. 그러면 온라인 예배에서도 그렇게 드리는지요? 같다면 할 말이 없지만 다르다면 우리는 왜 달라야 하는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교회의 본질, 성도됨의 본질에 충실한 것이 2020년의 가을학기 후반기에 남은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보다 더 극한 상황이 앞으로 닥칠지라도 히10:25절 말씀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모이는 것(예배)에 힘써서 하나님을 찾아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다 보면 왜 잘 섬기던 사람이 변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집니다. 웃시야의 아버지 아마샤의 경우는 에돔과 전쟁에서 승리하고 에돔 신을 가져 와서 자기의 신으로 삼고 섬기는 것까지 앞에서 보았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왜냐하면 남의 나라 신을 섬기는 경우는 전쟁에서 패배했을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아먀샤는 반대로 자신들에게 패배한 나라 신을 섬기는 행위는 이해가 안됩니다. 아마 복 주는 신이 하나 더 늘었으니 더 좋을 것이라는 미신적 사고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종속국의 신을 자신의 신전에 놓고 관대함으로 통치한다는 일종의 정치적 테크닉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속에는 근본적으로 강한 자의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들 웃시야 역시 아버지의 전철을 따라 갑니다. 하나님을 떠나기 전에 6-15절을 보면 매우 큰 용사들이 많아(12) 나라가 강성해지고(8) 전쟁에서 승리를 거둡니다(6). 산업을 장려하여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되는 경제적 복을 (10) 누리는 엄청난 복을 누렸다는 사실을 먼저 소개해 줍니다.  

 

그 후 16절을 보면 이 강성함 때문에 마음이 교만이 생기고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범죄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백성에게도 인기가 있고 온 세상에서 잘 나가는 왕이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을 직접 하려 합니다. 이것은 구별함을 받은 제사장들만이 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고 범죄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아마샤와 아들 웃시야 두 사람을 살피면서 아버지는 전쟁에서의 크게 이김으로 교만이 찾아왔고, 아들은 너무 나라가 잘 되고 경제적 복을 누리는 가운데 교만으로 넘어지게 됩니다. 교만으로 넘어지는 역대기 유다 왕들의 반복되는 두 번째 실수를 안타까움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2).  

 

여기서 우리가 살펴야 할 것은 그의 강성함이 어디로부터 시작 되었는가? 입니다. 7절에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그리고 15절에서는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 짐이었더라고 두 곳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기이한 도움심이란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10절을 보면, 왕이 지혜를 내어 땅으로 흡수되는 빗물을 저장하려고 웅덩이를 많이 팔지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가 가능할까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와야 농사를 짓고, 풀은 자라 가축들은 번성할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신다면 우리 성도님들 있는 자리에서 한번 아멘으로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교훈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반복되는 실수들을 피해가야 할 우리들의 과제만이 남아있습니다. 먼저 나도 초반에는 잘하다 뒤에 잘 못 할 수 있고, 교만으로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반복적인 실수를 범하지 않는 출발입니다<1>.나는 그런 실수 안 해, 내가 바보야라고 웃시야는 아버지 보면서 결심 안 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안 합니까?

 

유다의 많은 왕들이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처럼 지혜가 없는 사람들입니까? 주위에 자신을 보좌하는 비서들까지 두면서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도 이상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라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떠신지요? 뭔가 엉뚱한 길을 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괜히 형제 자매가 밉고, 잘하는 것 보다 못하는 것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오고, 자신의 생각이 더 맞고, 내 생각대로 하면 교회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은 생각이 있다면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이 교만한 것을 스스로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몸에 열이 나는지는 체온계로 압니다.

 

기계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 마음의 교만을 측정하는 기구는 아직은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늘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하고, 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 속의 성령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2>.   

 

16절을 보면 왕이 성전에서 향단에 직접 분향하려는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이 돌출적인 행동은 율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범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왕이 몰랐을까요? 그러나 왕이 잘 모르고 할 수도 있고 또 알려주면 중단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제사장 아사랴가 따라 들어가 18절에서 그를 저지하게 됩니다.

 

18절에서 분향은 제사장들이 해야 하는 것이기에 율법에 어긋나는 범죄이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리지 못하므로 성소에서 나가라고 합니다. 19절은 이때 그의 반응입니다.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다가 제사장 아사랴에게 를 냅니다. 제사장이 왕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왕이 하나님께 도전한 사건입니다. 

 

하나님 말씀 보다 왕이라는 권위를 가진 자신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죄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확실한 교만함입니다. 제사장들은 그의 마음에 교만이 있음을 몰랐지만 16절을 보면 이미 하나님은 그런 행동을 하기 전에 그의 마음의 상태가 교만했다고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만해진 웃시야의 마음이 하나님 말씀에 찔림을 당해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화로 반응한 것입니다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회개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참 놀랍게도 이것 역시 그의 아버지 아먀샤와 너무나도 같은 실수입니다. 지금까지 역대기 속의 유다 왕들이 반복하고 있는 세 번째 실수입니다(#3). 

 

25:15절에 웃시야의 아버지 아마샤가 이방 신을 가져와 섬길 때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내서 왕을 질책합니다. 아버지 아마샤가 보인 반응은 25:16절을 보면 이름 모를 한 선지자를 향해 너를 나의 모사로 삼지 않았는데 그치라 맞으려 하느냐라고 먼저 위협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모욕합니다. 그의 결말은 어떠했을까요? 많은 것을 생략하고 결론만 말한다면 그 후 그는 북이스라엘과 전쟁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성들이 파괴되고 많은 재물을 빼앗기고 백성들은 볼모로 사마리아로 잡혀 갑니다. 그후 예루살렘에서 신하들의 반역으로 도망가다 잡혀서 죽게 됩니다(25:27).

 

시간이 흘러 그의 아들 웃시야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제사장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역시 화를 내었다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26;19). 왕도 사람이니 화를 낼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20절을 보면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치시므로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습니다. 21절에 의하면 평생 나병환자로 살았고 왕임에도 불구하고 별궁에 거하며 통치권을 아들에게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에도 23절에 의하면 왕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묘실 곁에 접한 땅에 장사되게 됩니다.

 

이미 앞에서 본 16장의 아사 왕 역시 말씀을 전하는 하나니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교만해졌을 때 발에 병이 나서 죽습니다. 21장의 여호람은 엘리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때 그 역시 창자에 병이 나서 죽은 것을 이미 웃시야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왕들의 비참한 모습을 단지 열거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 시대에 유다 왕들을 살피면서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많은 메시지가 정리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역시 실수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죽이지 아니하시고 다시 그분의 손에 의해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완성된 나 보다는 오히려 실수 가운데도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실수 실패를 보고 좌절했더라면 다윗부터, 아니 아담부터 역사 접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 약함을 알고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용서하시며 징계 가운데도 사랑으로 세워 가십니다. 이 하나님을 오늘 보셔야 합니다. 우리를 그분의 통치 가운데 두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 올 때 다시 복에 복을 더하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실수가 있어도 실패가 있어도 나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라는 것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복을 받기를 원하는 것 또한 잊어서도 안됩니다. 

 

미래의 불확실 때문에, 자녀들과 부부간에 생기는 힘든 일 때문에, 또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 등으로 좌절하고 우울한 감정 속에 빠진 분들이 있으신지요? 일어 나기를 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힘을 내기 바랍니다. 항상 함께 하는 성령님은 반복되는 우리의 좌절과 실망가운데도 다시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실수와 실패하는 내 아들 딸이 내 자녀이듯, 우리를 여전히 주의 자녀로 품어주십니다. 힘을 내어 기도하시고 주께로 달려 가면 됩니다. 안아 주시고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다시 빛을 비추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반복되는 실수를 라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매뉴얼임을 믿고 다시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