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16): 이런 유산을 가진 부모  

대하 28:1-6; 살전 5:22-23

 


부모님들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살면서 매일 자녀들은 살피지만, 솔직히 자주 생각 안 하는 분들이 바로 우리 부모님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알고도 원망도 안 하고 오히려 걱정만 하십니다. 병이 생겨 몸이 아파도 자녀들 걱정할 가 병원에 다녀 온 것조차 숨기시는 때가 많습니다. 

 

코로나가 미국에서 심해지자 자기 것 아껴서라도 자식들 위험하지 않도록 마스크를 보내 주시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서운해 하지 않고 사는 분들입니다. 내 자식을 낳아 모든 것 주는데도 불평을 들을 때 그제서야 부모님의 사랑이 느껴지니 참 신기합니다.

 

그 사랑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알고 깨달았더라면 그렇게 속 썩이지 않았을 텐데. 나중에라도 아프신 것 알고 전화라도 자주 했을 텐데. 그리고 돌아 가시 전에 한번 더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했을 텐데 라는 후회만 남습니다. 이제는 해 드리고 싶어도 곁에 안 계시니 더욱 안타깝기만 하네요.

 

가만히 지난 날 생각해보면, 유치원 때부터 엄마가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얼룩지고 구겨진 옷을 입고 있는 엄마보다 언제나 예쁜 옷을 입고 있는 선생님이 더 좋아 보입니다. 고집 피우고 때 쓰면 혼 내는 엄마보다 부드러운 말로 달래 주는 선생님이 내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던 때 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은 친구들이랑 집에 오면 늘 일하는 엄마가 싫었습니다. 가장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 때는 사춘기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연애인들 사진은 잔뜩 방에 있지만 엄마 얼굴 보며 이야기 한 적은 많이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대학 시절은 또 어떻습니까?

 

자신의 꿈 좇아 가느라 부모님은 여전히 안 보였습니다. 자식들 먹이고, 바쁘다고 어지럽힌 것 정리해주고 심지어 빨래까지 해 줍니다. 그것도 모자라 다름 질까지 해서 옷장에 걸어줍니다. 그러면 예쁘게 보이는 것 고르느라 시간 보내다 감사해요라는 말 한 마디 없이 달려 나갔던 시절입니다.

 

내 방의 쓰레기와 먼지는 자동으로 없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어디 나가 집에 들어 올 때까지 잠 안자는 이유는 혼내는 것 좋아하는 엄마라고 착각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내 아이들이 이곳 저곳 양말 벗어놓기 시작할 때 수고하셨던 엄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김홍식 저, 가족. 예화 참조).

 

이런 사소한 것에서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찾아갑니다. 간혹 일찍 철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찐한 사연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에 선생님 친구분의 이야기인데요. 부모님 몰래 담배를 피우는 친구가 다른 친구 집에 하루는 놀러 갔습니다. 시골이라 대부분 화장실이 야외에 있던 시절입니다.

 

아침에 습관에 따라 일 보면서 불을 붙여 맛있게 피워가는데 갑자기 불 났다고 달려 가는 친구 아버지. 나오지도 못하고 그냥 있었습니다. 그러다 날아든 것은 물 한 바가지뿐이었습니다. 그 후 친구분은 담배를 끊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의 집 자식도 내 자식처럼 여기고 그렇게 한 것이지요.

 

시내에서 만나기로 약속해 놓고 친구 전화오면 급한 일 생겼다고 펑크 내는 것 흔한 수법입니다. 그래도 모른 체하며 30분 뒤에 도착한다는 전화 두어 번 받으며 기다려 주는 부모님이십니다. 그냥 당신이 낳은 자식이기에, 사랑으로 그렇게 해준 것입니다. 이제 나이 들고 철들고 아이들 기르다 보니 그 마음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알고 보면 희생하고 참아 주시고 아낌없이 다 내어주시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런 부모님들처럼 우리도 이제 자식 낳고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모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부모님은 지금의 우리들로 키워주셨습니다. 좋은 대학 다니고 졸업해서 직장 다니며 남들 부럽지 않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제 부모님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부모로서 오늘 우리가 만드는 세상은 미래의 우리 자녀들이 걸어갈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부모로 지금 우리는 살고 있는지요? 커가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나 결혼 전인 청년들도 미리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역대기를 통해 유다 왕들을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왕이 소개될 때 늘 1절은 언제 왕위에 올랐고 몇 년 다스린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외를 하나 발견합니다. 시작하는 첫 절부터 바로 아하스 왕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얼마나 그가 악한 왕이었는가를 미리 정보를 주는 것이지요. 2절을 보면 전에 소개된 다른 악한 왕들과 별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가 바알 우상을 부어 만드는 것은 가장 적극적인 배교행위를 의미합니다. 게다가 3절을 보면 어떤 왕들도 하지 않은 자신의 아들을 불에 태우는 인신제사를 드립니다.  

 

20:1-5절은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합니다. 그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경고까지 합니다. 인신제사는 하나님 주신 생명에 대한 고귀함을 무시함으로 하나님의 절대권위를 도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에게 진노하여 백성 중에서 끊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우리 자녀를 몰렉에게 그냥 내어주고 있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좋은 대학, 남들 부러워하는 직장과 더 나은 물질적 삶에 가치를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일도 지키지 못하는 자녀들로 키워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자녀들을 불 가운데 던져 넣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립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방 신을 섬기기 위해 백성들이 주로 하던 습관입니다. 왕들은 이런 산당을 없애버려 더 이상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지만 아하스 자신이 직접 이방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캠퍼스에도 하나님 보다 더 섬기는 우상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상적 사고에 한마디도 못하고 침묵하며 물질이 주어지기에 오히려 따라 가는 지성인들의 신앙적 무감각입니다.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적 세계관이 차고 넘쳐도 그것을 걷어내지 않고 따라가기만 하는 믿는 성도들의 이중적 신앙관입니다. 

 

 

이방 신들을 섬기는 모습이 계속 이스라엘에서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나안에 들어온 부모들이 이방인들의 악한 모습을 철저히 뿌리 뽑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 된 우리가 철저히 나의 세대에서 악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최고의 악을 행하는 누군가가 우리들의 후대에서 나오게 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 잘 먹이고 입히고 좋은 학교 보내고, 많은 재산 물려주고, 좋은 추억 많이 남겨 주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내 세대에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죄의 뿌리를 철저히 뽑아내고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부모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가장 귀한 유산중의 하나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주에 한국 유명 기업의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기업으로 세상에서 유명세는 얻었지만 법과 윤리를 엄격히 준수하지 못한 것 시인하며 다음 경영권을 자녀에게 상속하지 않겠다는 발표였습니다. 기업도 바르게 경영을 하기 위한 개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는 우리는 죄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며 사십니까?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윤리, 도덕, 법적, 영적인 모든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옷 입기 때문에 은혜 가운데 죄를 단절시킵니다. 단번에 되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성화의 과정을 거치며 죄의 습관을 없애갑니다.

 

저는 예수를 믿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속 깊이 뿌리내려 있는 죄를 뽑아내고 있습니다. 이 성화는 우리의 호흡이 멈추는 날까지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구원 받은 성도의 가장 거룩한 의무입니다. 어느 날 저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속의 많은 죄들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결단을 했습니다. 착한 일 많이 하는 아버지보다 내 속에 있는 죄를 하나씩 뿌리째 뽑아내어야겠다. 그렇게 노력하는 아빠로 남기로 어느 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 많이 해도 내 속의 죄는 한 순간에 나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무리 좋은 추억들을 평생에 남겨도 부모가 죄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은 자녀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신 속에 자리잡고 있는 죄를 놓고 금식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고 성령님께 의지하는 모습은 멋진 유산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저는 매년 계획을 세울 때 남은 평생에 한 해 하나씩만 죄를 없애는 목표도 설정합니다. 얼마나 살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년에 하나만 죄를 완전히 없애 간다면 주님 앞에서 체면은 설 것입니다. 다 뽑지 못해 부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주님 닮으려고 노력은 하고 왔습니다라는 말 한 마디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부부간에도 그리고 교회에서도 성도간에 생각이 다르고 서로 믿는 신앙관이 달라 대화가 불편한 삶이 있습니까? ‘저 사람 바꾸려고 해도 정말 안되라고 생각하고 아예 포기한 관계가 혹시 있지는 않는지요? 주님 앞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할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미워하는 것은 죄 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습관부터 한번 없애기로 결심하면 바로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중에 나온 책들은 대화를 먼저 시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먼저 생각의 분위기를 전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화에 앞서 상대방과 지내면서 발견한 좋은 점 100가지를 생각하고 기록해 보기 바랍니다.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상대의 나쁜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난 뒤 좀 더 상대를 알아가려는 대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잘 몰라 그 사람을 비난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 남편과 내 아내라 해도 서로를 화나게 만드는 습관이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요즘처럼 24시간 같이 집에 있는 시간을 활용해 보기 바랍니다. 남편은 직장 마치고 집에 와서 피곤하니 좀 쉬고 난 뒤 정리하고 싶어서 소파 옆에 양말 벗어 놓은 습관이 아내를 화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아내가 화장실 쓰고 불 안 꺼는 것은 또 들어가서 화장하고 다른 것 할 것이 많아 그냥 커 두는 것이 절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단순한 것들이 쌓여 이제는 서로 대화하는 것조차 포기하고 있는 부부가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모습을 보고 자라야 할 우리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는 부부가 삐걱거리고, 교회에 가서는 성도간에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이 소통 되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면 어찌 좋은 유산이 되겠습니까?

 

서로 약한 부분을 보고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을 한번 멈추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위해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생각나고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와 동행하려는 우리의 이 모습을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신앙생활은 우리 자녀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살전 5:22-23악은 모양이라도 없애 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에게 악한생각과 삶의 모양들이 남아있습니까? 철저히 뿌리 뽑아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이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가 죄를 미워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도 그렇게 살려고 할 것입니다. 죄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죄를 없애려고 몸부림치는 이 모습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는 부모가 남겨야 할 선물입니다. 이 유산 만들어 자녀에게 물려주는 복된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