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15): 영적 자녀를 낳으십시오 

대하 34: 1-3,33; 왕하 23:25; 1:2; 1:1


 

늘 우리 자녀들에게 신경을 쓰지만 오월이 되면 더 관심을 가지는 달입니다.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모든 부모들은 고민하게 됩니다. 가정에 관한 책을 몇 권 요즘 읽었는데요, 그 중에 김홍식 목사라는 분이 지은 <새론 북스 출판사의 행복 울타리: 가족>이라는 책에서 본 예화(p.53. 152)를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엄마와 아이들이 오랜 만에 외출을 합니다. 전철에서 아이들이 신이 나서 떠들고 돌아 다닙니다. 엄마는 아무런 제지도 안 합니다. 손님들도 아이들 기 죽이지 않으려고 혼내지 않는가 보다 이해를 해 줍니다. 그런데 점점 심해지자,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까지 허락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엄마가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자신의 아이에게 사람 많은 곳에서 장난치고 놀면 안 되는 것 알지?” 그리고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 누구라고 했지라고 물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아이 대답 한 마디가 뛰는 아이들의 어머니로 하여금 뭔가 조치를 취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들려 오는 소리는 아빠였습니다. 모두를 당황시켜 버렸습니다. 너무 놀란 엄마는 언제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라고 말하자 엄마가 맨날 그랬잖아. ‘에이 못된 인간이라고!” “그건 그냥 하는 소리야.” “아닌데 엄마는 이상해, 매일 아빠 나쁘다고 하고선이라는 소리만 들려왔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아빠가 아들 기를 살려 주려고 학교 학부모 참관 수업에 엄마 대신 가게 됩니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다들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선생님이 좀 긴장을 풀기 위해 칠판에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한 사람씩 나와서 써 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각각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쓰고 내려 갑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흔히 쓰는 아빠도 아닌 아버지라고 적고 있었습니다. “누구 아이야?” “세상에 아빠가 얼마나 잘해 주었으면,” “여기, 저 아이 아빠가 있어요.” “아이 참 잘 키웠네요.” 그때 자리로 돌아오던 아이가 갑자기 몸을 돌렸습니다. “선생님 잠깐만요.” “?” “다른 걸로 바꾸어도 되요?” “그럼 되지!”

 

아이는 얼른 앞에 것을 지우고 똘돌이이라고 적었습니다. 학부모들은 조금은 실망 했지만 동생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다니, 기특해!” “우리 아이들은 맨날 서로 싸우기만 하는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때 궁금했던 선생님이 내려가는 아이에게 똘똘이가 누구니? 라고 물었습니다. “우리 집 강이지 이름인데요.”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너무 많은 걸 기대했나봐!. 요즘 애들이 아빠 생각이나 하겠어! 선생님도 참 힘드시겠어요. 저런 철부지들 데리고 가르치려면…” 모두들 엄마로 고쳐 쓸 것인가를 아이가 고민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날 학부모 참관 수업은 아이들에게 부모의 존재가 얼마나 가벼운지를 깊이 각인시킨 채 끝났다고 합니다.

 

물론 예화입니다. 하지만 자녀 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런 이야기 듣다 보면 세상에서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자녀교육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부모들은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키웠는데 기대한 만큼 되지 않기 때문이죠. 이것이 자녀를 키우는 모든 부모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부모들에게는 부담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자녀들을 세상에서도 훌륭하게 키워야 하지만, 어떻게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키울 것인가? 입니다. 이것 정말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저 역시 자녀를 둔 부모로서 늘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부부가 고민하며 서로 상의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답이 오늘 말씀에서 들려지면 탐 좋겠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요시야 왕을 한 주 더 보려고 합니다. 1절에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됩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2절에 의하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3절에는 왕이 된지 8년째 16살에 그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찾았다고 합니다.

 

비로소라는 말은 요즘 시대 말로 하면 하나님을 알기까지 사춘기 방황도 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찾는다’(seek)는 말은 21절의 묻다, 공부하다, 자문을 구하다(enquire, ask for, study, consult)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요기시야는 16살 이후부터는 하나님을 찾아 그분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님께 묻는 삶을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몇 년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시야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으면 비로서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을 우리 자녀들은 듣지 못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자녀들이 요시아와 같이 하나님을 찾는 삶이 시작 되도록 도와 주기 바랍니다. 3주 정도면 습관을 몸에 새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도전해 보기 바랍니다.

 

자녀를 위한 매일 말씀 묵상 한영 교재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꼭 그런 것 사용하지 않아도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묻고 응답을 기다리는 것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가 이런 영적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잃어버리면 또 찾도록 해서 진정한 예배자로 서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부모에게 준 거룩한 부담입니다. 청년이나 기혼자들 가운데 그러면 나는 늦었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는 분이 있다면, 오늘부터 비로소하나님을 찾는 것을 시작하면 시작 하면 됩니다.

 

주를 찾는 자를 성령은 돕습니다. 우리 주님은 먼 곳에서 우리가 부르면 도우려 차 타고 몇 시간 걸려서 오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성령으로 늘 계시면서 순간마다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 계속 물으시기 바랍니다. 도와 달라고 간청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답을 주십니다. 대부분 그 답은 생각으로 전달 됩니다. 하지만, 때로는 환경을 통해, 사람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반드시 답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의 생각이 답이 아닐 가능성이 때로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도 생각을 집어 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 사탄이 움직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 주신 답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두 가지 생각이 내 속에 있게 됩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은 반드시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생각을 가지고 더 기도하기 바랍니다. 다음은 두 가지 생각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최종적으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말씀은 항상 최종 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응답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받으면 마지막 확인작업을 안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꼭 최종 확인을 말씀이 아닌 사람에게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용한 사람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같은 말을 해 주는 그 사람만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사람에게 내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인줄 알고 나아가려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큰 실수인 것 같습니다. 항상 마지막은 하나님이 되셔야 하고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확신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두 가지 생각이 내 속에 있어 헷갈릴 때 기도와 함께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이 주지 않은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맞는 말씀과 반드시 부딪히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과 부딪히면 어렵고 손해가 있는듯해도 나에게 평강을 허락합니다.

 

먼저 우리 부모가 이런 경험이 있어야 자녀를 영적으로 가르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 머리가 좀 큰 아이들은 그때서야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키는 훨씬 크지만 아버지를 인정하게 됩니다.

 

맨날 아이들 성경 읽으라고 하는 것이 신앙교육이 아닙니다. 가정예배 시간에 부모가 먼저 고민을 말할 때, 자녀들도 지금 학교에서나 친구들 그리고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내어 놓을 것입니다. 가정 예배 가운데 들어주고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확신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도록 부모는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긴 하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 그리고 개인들에게 주어진 복된 시간임을 믿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다시 찾는 회복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요시야는 그런 부모를 가졌을까요? 역하 33:24-25절에 의하면 요시야가 왕이 되기 바로 직전인 8살에, 신하들은 너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아버지 아몬을 죽여 버립니다. 게다가 왕하 23:26절에 의하면 할아버지 므낫세는 유다의 악한 왕들 중에 최고의 악한 왕으로 간주 됩니다. 요시야의 가정 형편을 말한다면 정말 안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사람들의 눈치는 얼마나 보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 의해 치우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왕하 23:25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고 극찬을 합니다.

 

그냥 가만히 두어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반드시 누군가의 영향력 아래서 신앙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중요합니다. 신실한 무모가 있어야 하고, 목회자가 중요하고, 교사가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이끌 형제 자매가 중요한 것이지요. 요시야가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군가가 그의 곁에 있었는데 바로 부모와 같은 훌륭한 선지자들이 곁에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며 애타했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리고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스바냐 역시 습1:1절에 의하면 요시야와 동시대의 사람입니다. 요시야 뒤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4명이 왕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기 까지 이들 네 명을 다 합쳐도 겨우 22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유다의 마지막 개혁을 주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도록 요시야에게 영향을 주었던 위대한 선지자들입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한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부모님들은 육신의 우리 자녀들을 낳고 키우면 다 된 것 아닙니다. 다시 영적 자녀를 낳는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요즘 학교 수업 시간 빼고 자녀들과 거의 24시간 함께 지냅니다. 자녀교육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은 것부터 시작하기 바랍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자녀들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교회에 다닌다고 예수를 저절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을 가진 아이들은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더 많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자녀들도 복음을 듣고 본인 스스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믿는 거듭남이 없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엄마가 딸에게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는지 자신의 이야기부터 들려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아빠 엄마는 왜 교회에 나가는가? 그렇게 눈 오고 비 오고 힘들어도 교회에 나가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 어릴 때는 따라 나오지만 머리 커지면 끌려 나올 아이들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자녀들에게 신앙교육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 부모는 자녀에게, 형과 언니는 동생에게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복음을 들려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다들 바쁜 시간이라 소홀히 했다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