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14) 이렇게까지 섬겨야 합니다

대하 34: 1-7; 역하7:13-14; 왕상 13:1-2

 


코로나가 우리 신앙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입니다.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바로 온라인 예배입니다. 벌써 두 달이 거의 다 되어 가면서 불편했던 것들이 조금씩 익숙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집에서 다 함께 드리는 온라인 예배로 인해 가정이 예배 드리는 분위기가 되었다는 좋은 소식도 들립니다.

 

평소 말씀묵상을 못한 직장인들도 출퇴근시간을 말씀 묵상으로 활용한다고 합니다. 저녁이면 온 가족들이 모여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정예배도 회복 되었다는 소식도 접하고 있습니다. 비록 예상치 못한 일로 일상이 파괴되긴 했지만 소중한 것들을 다시 찾는 일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이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도록 영적 삶에도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힘든 시간이긴 하지만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더 말씀과 예배 중심의 신앙생활이 잘 자리잡기를 도전 드립니다. 사실 이렇게 바라는 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기도 제목들을 듣다 보면 염려가 되는 것들도 들려 옵니다.  

 

아무리 많은 예배가 제공 될지라도, 온라인 예배는 우리 모두가 예배 자체를 소홀히 할 수 있는 위험성에 노출 되어 있습니다. 특히 가족들이 다 주일이면 교회에 안 나가고 신앙생활 안 하는 가정인 경우가 그렇습니다. 혼자 따로 예배 드리는 것부터가 부담스럽고 괴롭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꼭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문제가 성도님들에게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 드리려고 자리에 앉지만 중요한 일이 주일에 생깁니다. 그러면 현실에서 더 중요하고 급하게 느껴지는 일에 밀려 그 일이 예배 시간을 대체해 버릴 수 있습니다. 언제라도 녹화된 것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점점 미루어 두겠지요.

 

그러다 예배는 드려야만 하기에 나중에라도 다시 자리에 앉습니다. 좀 늦긴 했지만 일주일 중에 언제라도 시간 내어 영상을 보면 그나마 감사한 일이지요. 예배는 안 빠뜨리고 드렸기 때문입니다. 안도감은 들지만 예배 중심의 신앙생활이 무너져 간다는 위험성 또한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불편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편한 시간에 언제든지 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미루는 분들은 한번 더 유혹을 받습니다. 시간에 쫓기다가도 시간 내어 예배 드리기 위해 자리에 앉지만 기도와 찬양은 스킵하고 말씀만 듣는 분들이 생기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소리를 듣다 보니 온라인 예배나 오프라인 예배가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프라인 예배를 드린다면 이런 일이 없을까요? 사실 주일 예배 빠뜨리고, 나태해지고, 형식화 되는 신앙생활은 비슷하게 일어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다 보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까지 철저히 신앙생활 해야 합니까? 좀 편하게 하면 하나님은 배가 아프신가요? 바빠 좀 미루긴 했지만 그래도 주님 잊지 않고 찾아 왔지 않습니까? 이게 어찌 변명이고 타협입니까? 최선을 다하는 모습 아닙니까? 믿음만 있으면 되지, 행위로 구원 받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철저하게 섬기는 것을 요구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답을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삶이라고 하는 생활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신앙생활은 동전의 앞뒤 면과 같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신앙은 믿는 것만을 요구하지만, 신앙생활은 그 믿는다는 것의 실체를 드러나게 요구합니다.

 

신앙생활은 구원에 이르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 받은 백성임을 증거하는 진정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이 중심에 있어야 하고, 예배가 우선으로 드려져야 하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섬기고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첫 대답입니다.  

 

한 예가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나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둘이 따로 떨어져 만나는 시간도 아깝고, 헤어져 있는 그 시간도 너무 힘들어,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 해서 한 몸이 되었고, 한 집에 평생 살 것이기에 이제 그냥 편한 대로 살자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따로 방 사용하고 아침도 다른 시간에 따로 먹고 출근합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이 두 사람을 서로 사랑의 관계로 만들었다면 사랑이 나타나는 삶을 이제 살아가는 것이 부부이고 가정생활입니다. 더 세밀하게 보살피고, 서로 이해하고,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주님 한 분만이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을 했다면 매일 그분 생각하는 묵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사랑해요라고 말했다면 진정 마음과 힘을 다해 주님을 최우선으로 섬기는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섬기는데 미루고, 나태하고, 형식화 되는 모습은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여기서도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결혼한 분들 신혼기 지나면 초창기에 엄청 했던 것들 다 하지 않고 살지 않느냐?’ 고 반문합니다. 그렇지 않으신 분도 계신 것 인정합니다. 그러나 신혼기 지나고 아이까지 낳고 사는 분들 말을 간혹 들으면 이제는 마음이 그렇게까지는 안가요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마음이 없으니 행동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 살다 보면 이해가 되고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잘해 주어야지라는 마음이 또 생깁니다. 그러면 행동도 다시 따라 옵니다.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렇게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섬기는 두 번째 이유는 결국 내 마음이 진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최우선으로 말씀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삶에서 힘든 일이 생기면 뭔가를 하나님께로 받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그렇게 하면 회복하겠다는(역하 7:13-14) 믿음 가운데 금식까지 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주님을 섬기는 행위는 믿음 때문입니다.

 

매일 말씀과, 가정 예배, 매주 금식 등 이렇게까지 열심을 다해야 하느냐? 기독교 신앙은 뭔가를 해서 신으로부터 얻어내는 종교가 아니지 않느냐? 그런 기복적인 종교성이 들어 있지 않는데 왜 굳이 그런 것까지 해야 하느냐?고 질문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대답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할 것이라는 우리 생각 때문이 아닙니다.

 

6: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고 신10:12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는 말씀 때문에 그렇게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오늘 소개되는 요시야 왕은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의 좋은 예입니다. 1절에 의하면 요시아는 아버지 아몬이 신하의 반역에 의해 죽자(대하33: 23-25) 8살 어린 나이에 왕이 됩니다. 3절에는 16살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을 찾았고, 20살에는 남유다 전역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산당과 우상들을 제거합니다.

 

4절에는 왕이 신하들을 시켜 바알 제단을 헐게 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왕이 직접 나서서 태양 상들을 찍고, 우상들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제사하던 사람들의 무덤에 뿌립니다. 아래 사람들 시키지 굳이 그렇게까지 왕이 직접 나서서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5절에는 더 심한 모습이 보입니다.

 

제사장들의 뼈를 파내어 제단에서 불살라 버립니다. 뼈는 그들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에게까지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라는 마음이 또 듭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일까요? 게다가 6절에는 개혁의 범위를 므낫세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까지 확장합니다. 이들은 북이스라엘 지파들입니다.

 

납달리는 북부, 므낫세 에브라임은 중부, 시므온은 남부 등 북이스라엘 온 지역입니다. 게다가 남과 북의 온 땅을 다녔음을 7절의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는 말씀이 증명합니다.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북이스라엘은 증조 할아버지 히스기야 때(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 이미 망했습니다.

 

이런 나라에 가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미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망한 사람들을 다시 돌아오도록 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사실 이 모습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예수 그렇게 믿으라고 했는데도 안 믿는 분들 볼 때마다 그분들 영혼이 불쌍하고 또 복음 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정상입니다.우리가 이렇게까지 섬기는 네 번째 이유는 하나님 잘 섬겨 남들에게도 영향력을 주는 성도가 되기 위함입니다.  

 

이미 5절을 보았는데, 요시야 왕이 죽은 제사장들의 뼈를 파내어 제단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왕상 13:1-2절을 보아야만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때 한 선지자다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는 왕이 나와 이 제단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들의 뼈를 그 위에서 불사를 것이라고 예언을 합니다.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예언은 몇 년 전 일이 아니라 300년 전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을 이렇게까지 하며 섬겨야 합니까?’ 라고 불평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까지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창한 것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신 모든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기에, 믿음을 가진 성도는 말씀대로 철저히 섬겨야 하는 마지막 이유입니다.

 

성도는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섬기기를 바라는 주님의 요구에 성실히 신앙생활로 응답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들을 빈틈없이 순종하며, 삶으로 살아내는 복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