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12): 악한 것을 심지 말아야 합니다
대하 18:1,5,7; 21:4,6; 22:1-7, 9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직 기성을 부리지만 봄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 힘들지만 곧 사라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기 바랍니다. 매년 봄이면 채소나 꽃을 조금 가꿉니다. 그런데
작년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집에 있다 보니 다시 길러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 묘종을 사서 키우는데 간혹 씨를 주시는 분이 있으면 씨를 뿌려 키울 때가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매운 한국 고추 씨를 주셔서 심었더니 역시나 엄청 매운 고추를 먹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씨는 항상 앞으로 우리에게 줄 열매를 품고 땅속에 심어집니다. 그러므로 늘 그 모양대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지으신
창조의 질서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통일왕국이 분열되어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까지 살펴 보고 있습니다. 18:1절에 보면 남유다의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자녀들을 결혼시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에서 온 아달랴 라는 씨 하나가 남유다에 심어집니다. 그
씨가 점점 자라나 첫 열매를 맺는 모습이 지난 주 보았던 역대하 21장이었습니다.
결국 열매는 씨가 원래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아달랴는 남편이기도 한 유약한
여호람을 좌지우지하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안정적인 정권을 유지해 가도록 친
동생 6명을 전부 제거합니다(21:4절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아달랴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21:6절은 보여줍니다.
그러면 그녀 속에 심겨진 씨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악의 씨였습니다. 악은 윤리와 도덕, 가치관을 넘어 인간 욕구에만 충실히 따라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타인에게 물질적 피해를 주는 것을 넘어, 생명조차도
하찮게 여기는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악의 첫 번째 실체입니다(#1).
또 다른 악의 열매를 오늘 본문 22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의하면 여호람이 병들어 죽자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됩니다. 그러나 2절을 보면 겨우 1년을 다스리다 죽습니다. 전쟁에 나가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닙니다. 3 절은 그 이유를
그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의 어머니가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에게 악을 행하라고 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 의미를 4절은 ‘아합의 집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아합 가문의 딸인 아달랴의 조언/충고를 받아 들였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남유다의 정치적 상황은 아버지 여호람이 일찍 죽고 국력은 점점 약해져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북왕조와 연합하는 것이었습니다(북쪽도 막고, 제 3의 적도 방어 할 수 있기 때문).
그래서 5절에 남과 북의 공동의 적이었던 아람을 쳐서 미리 눌러 놓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아하시야는 어머니 아달랴의 정치적인 수를 받아들입니다. 왕하 8:26절에 의하면 그가 왕이 될 때는 22살의 경험 없는 왕이었습니다(2절=42살). 그래서
그의 어머니 아달랴는 아합과 이세벨에게서 배운 정치적 노련함으로 아직 정치를
모르는 어린 아들을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안은 4절에
의하면 ‘아하시야가 망하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아들의 왕권을 노렸다면 그렇게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하시야는 적들이 쳐들어와 자식을 다 죽이고 겨우 살아남은 아들입니다(21:17).
게다가 남도 아닌 친 어머니가 어찌 자식을 망하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왜 그녀의 생각이 아들로 하여금 망하는 길이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합니다.
남과 북의 왕정 시대는 선지자 제도가 이미 자리 잡혀 있던 때입니다. 왕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기다리며 나아가던 시대입니다. 물론 당시 남유다에는 북이스라엘의 엘리야나 엘리사 만큼 유명한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마야(르호보암:12장), 아사랴, 하나니(아사: 15, 16장), 예후, 야하시엘(여호사밧:19, 20장)같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찾아가서라도 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선지자보다 아달랴의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듣고 싶어하는 말만 들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은 아합의 경우와 너무나 같습니다. 18:7에 아합은 늘
하나님의 말을 전하는 선지자의 말은 듣기 싫어하고, 자기에게 좋은 말만 하는 선지자들의 말만 들으려
했던 것을 18:5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다’는 말이 3,4절에서 세 번이나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늘 악한 생각은 하나님 뜻보다, 내게 이익이 되는 것에만 집중하게 유혹합니다(#2). 사탄이 늘 하는 짓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삶의 중심에 있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고후 11:14-15절에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사탄뿐만 아니라 사탄의 일꾼들도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아하시야는 안타깝게도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아달랴의 꾀를 따라
갑니다. 그리고 북의 요람과 함께 전쟁에
나갑니다(5절). 그런데 이 전투에서 북의 요람이 부상을 당합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아하시야는 부상 당해 병든 요람을 방문합니다. 이것이 아하시야에게 화근이 됩니다. 왜냐하면 아하시야가 그때 죽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악은 우리가 실패하고 죽기까지 종으로 삼고 끌고 가는 힘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3).
이쯤에서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니 안 끌려가면 되지?
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사탄에게 끌려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약점 때문입니다. 이미 남과 북이 연합하여 아람을 침공했으니 벌집을 건드린 것입니다. 아하시야는
불안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전쟁을 하자는 제안을 하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그때가 바로 북쪽에서 예후라는 사람이 구데타를 일으키는 시간과 맞부딪히게 됩니다.
예후로서는 남과 북의 왕을 한 자리에서 잡는 절호의 챈스를 가집니다. 아하시야 입장에서는 세상말로 정말 운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때만 피해도 처참하게 이국 땅에서 일국의 왕이 불명예스럽게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9절). 그런데 7절에
의하면 운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뤄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예후라는 인물이 오므리 왕조를 멸망시킬 것을 엘리야를 통해서 오래 전에 말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왕상19:16; 왕하 9:8).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악을 따라 갈 때는 전혀 하나님의 뜻을 전달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4). 앞의 왕들에게는 있었는데 그에게는 선지자의 음성조차 없습니다. 하나님과 소통이 안되고 불통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는 길로 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계속 악을 끊어 버리지 않는 것은 전화기 배터리가 점점 줄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충전을 안하고 사용하면 정말 위험한 순간에 위험 경보를 받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과 불통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내 속의 악한 씨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이끌지 못하고, 기도가 없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과 소통하여 악한 사탄의 세력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위기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가 악을 버리며 다시 주께로 돌아가는 선한 삶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