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11): 과도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대하 21:1-6, 8, 10, 16-20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 생활을 많이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유롭게 살던 삶이 제한되고 묶여 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가 아닌 집에서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됩니다. 모이는 예배는 흩어지는 예배로 만들었구요. 우리가 직접 참여하던 예배는 이제 보는 영상예배로 전환 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 뉴스를 보는데 미국 사람들의 사재기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없던 것이 갑자기 나타난 현상입니다. 사실 사재기는 과도한 욕심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조그마한 욕심이라도 과도하게 나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욕심이 보여주는 모습들을 보면서 결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1절을 보시면 여전히 여호사밧이 등장합니다. 2절에는 그가 7명의 아들을 두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든든했겠습니까? 그런데 그에게도 한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고 난 뒤 형제들이 서로 왕위 쟁탈전을 하지 않을 가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3절에 보면 재산상속을 확실히 해 둡니다.

 

6명에게 후한 재물과 견고한 성읍들을 한 사람씩 주게 됩니다. 그리고 장자 여호람에게는 왕위를 물려줍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볼 것은 여호람은 동생들이 받은 재물은 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만 4절을 보면 여호람은 워낙 든든하게 만든 그의 아버지의 왕국을물려받은 덕택에 빠른 시간 내에 세력을 얻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그는 왕권을 유지시킬 준비를 합니다. 가장 먼저 자신의 동생들을 제거합니다. 일단 동생들이 제거되면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정적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생들 주변에 그를 지지하는 방백들도 같이 제거한 것입니다. 당연히 동생들이 가진 재물은 여호람의 것이 될 것입니다.

 

욕심은 하나님이 선을 그어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넘어가게 만듭니다(#1). 그래서 6절을 보면 그의 행위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임을 당한 동생들은 죽을 만큼 형에 대해, 아니 자신들의 왕에 대해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었을까요? 13절에 보면 성경은  착한 동생이라 부릅니다.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한 것입니다. 결국 내 속의 욕심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1:15절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욕심이 죽음에(, , ) 이르기 전에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리지 못할 때 오는 결과를 5절은 말해 줍니다. 흥부와 놀부의 고전적인 교훈과 동일합니다. ‘욕심은 망한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합니다. 나의 과도한 욕심이 생기면 더 빨리 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2). 그는 32살에 왕이 되어8년을 다스립니다. 35살에 왕이 되어 25년을 다스린 아버지에(역하20:31) 비하면 너무 짧습니다.  

 

그의 죽음 역시 비참함을 18절은 보여줍니다. 왕들이 죽으면 애도의 향을 피우는데 그것조차 없었습니다(19). 게다가 왕이었음에도 왕실 묘지’()에 장사되지 못하는 치욕을 당합니다(20). 그 이유는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기때문이라고 20절은 말합니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자가 없었다라는(, ) 뜻입니다. 공동번역은 애도하는 사람 하나 없는 가운데 그는 가고 말았다라고 조금 시적으로 번역합니다. 어떤 번역이든 너무 처량하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의 욕심은 하나님 앞에서도 버림받지만 사람들에게 까지 피해를 주었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3).

 

왕이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과 명예와 부귀를 다 누렸습니다. 하지만 어찌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된 사람이 무엇이    부럽습니까? 그가 죽인 사람은 그의 동생도 되지만 그들은 그의 신하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동생에게 준 재물도 왕의 통치 아래 있음으로 사실상 왕의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크게 보면 다 왕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뭐가 탐이 납니까? 욕심이 생기니 남의 것까지 빼앗는 과도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북 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왕상 21장을 보면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이라는 자기 백성의 포도원이 탐이 나서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탈취하는 일이 동시대 북이스라엘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6절을 다시 보면 그가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늘 부추기고 돕는 자가 있음을 6절은 말합니다(#4). 바로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며 여호람에게 시집온 자신의 아내 아달랴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나를 욕심으로 이끌지라도 없는 사람처럼 여겨야 합니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 가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요즘처럼 힘든 시기가 오면 나는 안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사재니 자꾸 나도 사 두고 싶습니다. 유혹을 받습니다. ‘휴지가 없고 물이 없고 쎄니타이즈가 없는데 혹시 안 사두면 나중 어쩌나?’ 라는 마음이 나를 부축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변하게 만듭니다.

 

아닙니다. 체로키 인디언 교훈에 의하면 우리 속에 늑대 두 마리가 있다고 합니다. 이 두 마리가 늘 싸우다 한 쪽이 이긴다고 합니다. 이기는 쪽은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 욕심에 따라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희생할 때 예수 따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러 주었습니다. 이 힘든 시기에 초대교회 성도가 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욕심이라도 내게 있다면 이 기회에 좀 내려 놓기 바랍니다.

 

한 부자에게 주님이 질문합니다. 오늘밤 너를 데려가면 번 돈 다 뭐 할 것이느냐는 것입니다(12:20).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묻습니다. 내가 번 돈, 누리는 명예 뭐 할 것입니까? 여호람을 보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평생 이룬 막강한 힘이 몇 년 사이에 무너져 내립니다. 8, 10절을 보면 에돔과 가나안의 립나가 배반을 해서 여호람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아버지 때부터 조공을 내던 블레셋과 아라비아(17:11)가 침공까지 합니다(16). 17절을 보면 왕궁까지 들어와 재물들을 약탈하고 막내 아들만 남기고 왕자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왕조가 절대 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그리고 여호람의 아내들까지 잡아 갑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목숨까지 걸면서 얻은 것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욕심의 결과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삶에서 변한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 생활에만 변화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내 스스로 이 고난을 통해 주님이 진정 원하지 않는 어떤 형태의 욕심이 내 속에 있음을 발견하면, 과감히 내려 놓는 진정한 변화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