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8):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삶 

역하17:10-13; 18:1-4

 


모든 사람에게는 책임감이 있습니다. 특별히 왕에게는 엄청난 것입니다. 주어진 책임을 잘 완수하느냐에 따라 한 나라가 흥하고 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여호사밧을 봅니다. 35살에 왕위에 올라(역하20:31) 스스로 국방을 튼튼히 하고 성실히 하나님을 섬겨 나가는 왕이었습니다(역하17:1-4).

 

그런 그에게 엄청난 축복이 17장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변 여러 나라에 두려움을 주어 쳐들어 오지 못하게 합니다(10). 심지어 블레셋, 아라비아는 스스로 재물을 가져와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됩니다(11). 그는 더 열심을 내어 요새와 국고성을 건축하고(12) 더 용맹스런 군사들을 길러냅니다(13-18).

 

나무랄 것이 없는 왕입니다. 왕으로서 백성들을 지키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책임을 성실히 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여사밧을 18:1 상반절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다고 말합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위엄과 자신감이 넘쳐나는 표현입니다. 사람이 강해지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관대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북이스라엘과 껄끄러운 관계를 끊고 평화의 관계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서로가 나누어지긴 했지만 계속적인 긴장 관계에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전쟁을 해서 서로 약해지면 주변 나라들만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결혼동맹을 추진합니다(1).

 

국가간 왕족들의 결혼은 좋은 전략입니다. 전쟁을 없애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긴 평화를 구축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미래를 책임지는 것 부모에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녀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더 우선적이기 때문입니다.

 

자손들이 하나님 앞에서 복 받는 삶을 살지 못하면 그들을 위해 준 것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하였기에 이런 부귀와 영광을 자신이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책임 중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복을 받는가를 다음 세대에 보여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1).

 

여호사밧의 경우는 후대를 생각한다는 명분아래 자신의 욕심이 개입된 듯 합니다. 자식을 지켜주는 것 부모의 사랑이고 책임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위한 것들이 나중 하나님을 더 지속적으로 잘 섬길 수 있을 지를 심각히 고려하는 것 역시 부모의 책임입니다. 여호사밧은 이것을 놓칩니다. 동맹을 맺는 상대인 아합이 누구입니까?

 

왕상 16:30-33절은 아합은 그 이전 모든 왕보다 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을 위해 신전을 건축하고 아세라 상을 만들어 그 이전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19명의 북쪽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입니다. 게다가 이세벨이 어떤 여인입니까? 엘리야와 대항하며 선지자들을 죽였고 바알을 섬겨 북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얼마나 하나님 나라를 망가뜨리고 대항하는 사람이었으면 요한계시록에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대명사로 사용 됩니다.

 

이런 사람임을 알고도 동맹을 맺고 사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게다가 여호사밧의 며느리로 들어온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 누구입니까? 아달랴입니다. 남유다의 왕위를 자신이 쟁탈하려고 손자들을 다 죽이고 자신이 6년 동안 왕좌에 오릅니다(역하 22:10-12). 바알을 남유다에 공식적으로 퍼뜨렸던 사람입니다.

 

나중 아달랴를 몰아내고 겨우 살아남은 어린 요아스가 다윗 왕조를 이어갑니다. 여호사밧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은 항상 바라는 것이 아닌 다른 결과를 뒤에 낳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죄를 낫지 않는 경건한 삶을 살 책임이 있습니다(#2). 잘 될 때 더 잘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합니다. 1:13-15절을 보면 사람이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유혹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아사가 복 받는 모습을 모며 자신도 그 길을 행하며 많은 복을 하나님께로 받았습니다. 유다 전역에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보냅니다. 산당을 무너뜨리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깨뜨렸던 장본인 입니다.

 

그런 그가 남유다를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가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렵습니다. 이런 실수를 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도의 경건입니다. 경건은 우리의 생각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를 살피게 합니다. 경건한 삶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일을 철저히 점검하게 만듭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은 아닌가를 늘 묵상하게 합니다. 성도는 경건을 알기만 하고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깨어있는 신앙입니다. 사탄이 움직이고 있는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깨어있는 신앙으로 무장할 책임이 있습니다(#3). 

 

깨어 있는 신앙은 내 욕심을 숨기지 않습니다. 내어 놓고 하나님께 없애 달라고 기도 합니다. 그래야 경건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자식들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난 이년 뒤 북쪽의 아합 왕이 의도적으로 잔치를 베풀고 여호사밧에게 아람을 치자고 제안 합니다(18:2).

 

잔치 분위기에 취해 여호사밧은 대답을 선듯해 버립니다. 뭔가 미심쩍은 것을 눈치챈 그는 나중에서야 선지자에게 물어보자고 합니다(18:4). 경건을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 책임감 있게 사는 성도는 세상적인 향락과 주변의 상황에 빠져 사탄에게 모든 것을 계획하고 주도하도록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늘 생각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며 늘 깨어 기도하는 책임을 다할 때 우리 속에 깊숙이 숨겨진 욕심이 자라나 죄로 성장하지 못하게 되고, 주님의 뜻이 내 삶의 중심에 나타나게 됩니다. 사순절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