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7):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할 때 승리합니다  

역하 17:1-9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주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축복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다른 이면에는 주님 닮아가는 거룩한 과정이 요구됩니다. 이 과정을 성화라고 부르는데 영적 의미에서는 영적 전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군사된 성도는 영적 싸움을 잘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가 승리 하는지에 대해 역대기의 유다 왕들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분열 왕국 르호보암-아비야-아사에 이어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입니다. 역하 20:31절에 의하면 여호사밧은 상당한 나이인 35세에 왕위에 오릅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왕이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잘 알고 척척 진행을 합니다.

 

1절에 보면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스스로나라를 강하게 합니다. 2절에 적의 침입에 대비해 유다 주요 성읍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아버지가 북이스라엘 에브라임에서 뺏은 성읍에 영문(수비대)를 둡니다. 남으로부터 구스 그리고 북으로 이스라엘의 침입을 당해 본 경험을 가진 유다는 국방을 튼튼히 하는데 집중합니다.

 

이런 일들은 어떤 왕이든지 백성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3절을보면 1-2절까지 가만히 있던 하나님이 갑자기 그와 동행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이는) 스스로 알아서 나라를 튼튼히 해서가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후부터 늘 하나님 백성을 유혹했던 바알을 멀리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바알과(3) 아세라는(6) 가나안 땅의 비의 신이며 풍요의 신입니다. 농사가 잘 되어야 먹을 것이 있기에 가뭄으로 시달리는 유다 백성들은 늘 바알에 쏠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연약한 마음을 알기에 백성들이 다른 이방 신들에게 마음이 빼앗기는 어리석음을 철저히 처음부터 차단합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언인지 여호사밧이 보여주는 첫 번째는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우상을 두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잘 먹고 잘 살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 연약한 인간의 욕심을 틈타 파고 들어오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입니다(#1).

 

그래서 주님은 마6:25-26에 우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러면서 공중의 새를 보라하십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기른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는 이것들보다 귀하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마 6:33에서 한 가지를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고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도 주십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구원에 우선 집중하고, 하나님이 볼 때 죄가 되지 않는 것()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북쪽의 관행을 따라 하지 않습니다(4). 그러자 하나님은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요 14:21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나타내리라는 말은 동행하겠다는 뜻입니다.

 

또 요15:14절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친구로 번역된 philos friend 도 되지만 companion도 됩니다. 친구가 누구입니까? 내 가까이서 어렵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나와 함께 해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아갈 때 주님은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세상과는 구분되는 삶을 사는 책임이 따릅니다. 성도의 거룩한 의무입니다. 이게 참 힘듭니다. 이런 삶은 말씀이 늘 내 삶을 지배하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성경을 개인이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서기관들이 양피지나 파피루스 같은 종이에 필사를 해서 성전에 보관을 해 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말씀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들이 가르쳐 주지 않고, 본인이 듣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습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기도 어렵지만 기억하고 살기가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믿는 방식대로, 생각하는 대로 행하기가 쉬웠습니다.

 

예가 바로 6절에 보면 산당입니다. 산당 제사는 금지 되었습니다(33:52). 음행 복술 인신제사 등 주로 이방 신을 숭배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산당에 두었던 물건들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추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왕하 18:4절에 산당에서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이 발견됩니다.

 

사람을 치유한 하나님은 경배하지 않고 그들을 치유할 때 사용한 물건을 섬겼습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광야에서 원만하던 이스라엘을 불뱀이 나와 물어 죽였습니다. 그때 장대에 놋뱀을 달아 쳐다보는 사람들은 다 나았습니다(21:6-9). 그런데 사람들이 이 놋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가요?

 

여전히 살면서 발생하는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원하는 미신적 행위입니다.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불안한 마음을 틈다 역사하는 사탄의 꼬임입니다. 성경은 산당제사로 여호와게 범죄할 경우 이방의 포로가 될 것을 강하게 경고합니다(26:30-3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명령을 거역합니다.  

 

게다가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가나안 사람들이 지켜 오던 것들을 그대로 따라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안 여호사밧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어느 왕도 하지 못한 일입니다. 모든 백성에게 말씀이 전해지도록 관리할 방백들과 실제로 가르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그들에게 보냅니다.

 

백성들을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율법책을 가지고 가서 모든 유다 성읍들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게 합니다(9). 우리의 이기적이고 덜 희생적인 모습보다 더 희생적이고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삶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2). 우리 속에 자라잡고 있는 게으름과 나태함을 이길 때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모습들은 더욱 말세에 사탄을 이기는 무기라는 사실입니다. 이단들이 설치는 말세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만 나의 구주로 모시고 살겠다는 단호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 중심으로 편리하게만 믿으려는 신앙자세를 갈아 엎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