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2): 겸비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 

역하12:1-12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기를 원하고 실제로 경쟁을 이기고 성취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애쓰며 쌓아 올린 성공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실패하는 요인을 성도들에게 알려 줍니다.

 

지난 주에 보았던 르호보암은 하나님 말씀에 절대순종하며 나라를 견고히 세워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을 보니 유다가 점점 강성해지자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떠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결과를 3절은 전해줍니다. 애굽 왕 시삭이 요즘 말로 하면 기갑부대와 함께 주위 나라들의 연합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남유다는 참혹하게 밀리기 시작합니다. 4절을 보면 동남북으로 전에 견고하게 쌓았던 성들이 무너져 방어막이 뚫립니다. 예루살렘까지 밀려서 9절을 보면 성전 보물들과 솔로몬이 만들었던 금 방패도 빼앗기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정치적 수도이지만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성전 안으로 적이 들어오자 그들의 자존심은 짓밟히게 됩니다. 게다가 성전 보물이 탈취를 당했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신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힘이 없어 밀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수치를 당하면서 까지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왕과 백성들의 겸손입니다.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치기 원하셨습니다. 사실 겸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겸손하지 못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 예를 르호보암에게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라는 표현을 봅니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것은 무엇이라고 성경은 말합니까? 그의 나라를 강하게 해 주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나라가 강해질 때 그에게서 나타나는 행동은 오히려 율법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결국 겸손이 사라지고 자랑과 교만이 그의 심령 속에 자리 잡았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버린 것은 지키지 않는다는 뜻이고, 지키지 않음은 하나님께 죄가 됩니다. 결국 겸손을 잃을 때 죄를 범하는데 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을 보기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주신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불순종하여 범죄합니다. 우리는 불순종이 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불순종 하여 죄를 짓기 전에 사탄이 던진 유혹이 먼저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속삭임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마음,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잃어 버리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늘 죄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에덴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늘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왜 만들었어요?” 불평 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불필요한 것을 만들었겠습니까? 그것도 매일 보며 확실히 자신을 보도록 구석이 아닌 중앙에 두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늘 서 있어야 할 위치가 있습니다. 시편 1:1-2절은 그 자리를 가장 잘 가르쳐 줍니다. 먼저 악인들을 꾀를 따르지 않도록 악인들의 생각이 나오는 그 자리에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들이 걸어가는 그 길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들이 앉는 자리에서 벗어 나야만 합니다. 

 

역대기는 르호보암이 어떻게 자신의 위치를 상실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왕기 14:23-24절을 보면 산에나 나무 아래에 산당을 세우고 아세라를 섬기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백성들 가운데는 그들이 그 땅에서 몰아낸 가나안 백성들이 했던 남색 하는 가증한 일을 본받아 행하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일탈된 모습들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르호보암은 시삭의 침공을 받아 밀리기 시작합니다. 아직 회개가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예루살렘까지 적들이 이르자 왕과 방백들이 한 자리에 모입니다(5). 이때에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비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그들을 버렸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방백들과 왕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해집니다(6).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겸비해진다는(NIV: humble)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스스로 고개를 숙이며 여호와가 옳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이렇게 적들이 쳐들어 오게 하신 것도 당연합니다’() 라고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해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죄 지은 나를 어떻게 벌하시든 그것이 늘 옳습니다라는 이 고백이 우리 입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마음이 편해 지십니다.    

 

스스로 겸비해 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보살피기 시작합니다. 7, 12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완전히 멸하지는 아니하고 조금은 구원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는 쏟지 아니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완전히 적에게 깨뜨려지고 빼앗기는 손해를 보지 않게 하십니다.

 

이 은혜가 있기에 우리는 죽지 않고 망하지 않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교만하여 말씀을 떠난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여 나라까지 완전히 망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죄였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 겸비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진노를 받지 않게 만드는 지혜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늘 불순종하며 말씀에서 거슬릴 수 밖에 없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겸비해 지는 사람을 완전히 멸하지 않고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그 은혜를 허락하기 위해 12절을 보면 하나님은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라고 말씀하시며 칭찬 거리를 찾아내시려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전에 행했던 작은 선한 일도 기억하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쏟으시려는 노를 다 쏟아 내지 않고 멈추시려 합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보기 바랍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이 은혜를 경험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