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1): 평강이 있을지어다 

20:19-21; 14:20


 

2020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했습니다. 주보 앞장을 보시면 코넬한인교회 표어가 있습니다. ‘평안이 넘치는 해입니다. 한번 같이 하겠습니다. 평안이 넘치는 해.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과 개인에게 주의 놀라운 평안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옆에 분들과 평안이 넘치기 바랍니다라고 서로 새해 인사를 나누시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평안은 평강으로도 번역 됩니다. 전쟁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또한 마음의 내적 안정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두 가지 정도의 이유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없습니다.    

 

첫째, 주님의 부활하심을 확신할 수 없어 제자들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십자가사건 이후 주를 따르던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가(28:1) 빈 무덤을 보고 주가 살아났음을 제자들에게 알립니다(24:9). 제자 두 명은 무덤에 가서 확인까지 합니다(20:3, 8). 그런데 무덤이 비어만 있다고 부활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철학과 과학적 지식, 그리고 기타 종교들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게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진리가 내게서 고백되지 못할 때 결코 혼란으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평강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났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요20: 20절을 보면 이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확신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때서야 제자들이 죽음에서 삼일 만에 살아나신 주를 확실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죽음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직접 보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확신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부르면서 제자라고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동일한 모습으로 만나 주십니다. 그들은 직접 보아 확신을 가졌다면 우리는 말씀이 직접 증거 해주십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 복이 있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의 마음에서 평강을 빼앗은 것은 두려움입니다(20:19).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인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추종자들인 자신들을 어떻게 할지 사실 몹시 두려웠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삼일 만에 살아난 사실을 유대 종교지도자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또한 그들을 몹시 두렵게 만들었습니다. 

 

28:11-15절을 보면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이 부활 사실을 종교지도자들에게 알립니다. 그러자 그들은 병사들에게 돈을 주어 예수가 진짜 살아난 것이 아니라 도둑질해 갔다고 소문을 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은 이 사실들을 알리고 전파할 제자들을 없애버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부활이 더 이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거짓을 전하는 종교로 소문이 나고 힘을 잃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자신들도 주님처럼 죽을 수도 있다는 극도의 불안이 그들의 마음의 평강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죽어도 산다는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인간이 갖는 최고의 두려움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만이 갖는 마음의 평화를 평안이라 부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진정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어떤 문제로 인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근심이 있다면 오히려 나는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가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류 최고의 문제를 십자가를 통해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삶의 사소한 것에 두려워하고 근심한다면 말이 안됩니다.

 

분명 진짜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하였거나 사탄에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탄은 늘 구원 받았다고 확신하는 성도 조차도 때로는 삶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염려를 더 크게 보여 우리를 흔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두려움과 염려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입니다.

 

제자들처럼 주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예수가 내 가운데 오시면 나는 주 안에 있게 됩니다. 그러면 주위에 전쟁이 나고 아수라장이 되는 환경과는 상관이 없이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 속에 들어 오신다는 말을 하다 보면 복잡한 질문이 생깁니다.

 

이미 성도는 예수를 영접할 때 주님이 내 속에 거하는데 또 그분을 내 속에 모셔 드려야 합니까? 일단 답부터 말한다면 아닙니다. 주님은 구원 받은 주의 자녀들을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떠나 가셨다가 우리 속에 다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늘 내 속에 계시는데, 내가 주안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것뿐입니다.

 

14:20을 보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환경이 우리를 짓누르면 두려움과 걱정이라는 생각이 내속에서 그 관계를 잊어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모인 장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주가 하신 말씀을 기억하려 했다는 것 전혀 없었습니다. 두려운 생각을 몰아내는 것은 말씀을 읽고 듣고 마음에 채우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은 주님이 내 속에 계시고 내가 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평강을 찾는 비밀입니다.  

 

평강을 원하시면 주님이 내 가운데 있다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움은 내 속에 주님이 없을 때 찾아오는 불청객입니다. 내가 중심 될 때 결과는 두려움과 근심 가운데 떨게 됩니다. 다시 중심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내게 다시 놀라운 평화가 다시 찾아오는 방법은 매 순간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결국 우리는 확실히 예수를 알지 못하면 영혼은 늘 혼돈스러울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야 하고, 그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되어 내 마음과 삶 한 가운데 계실 때 영혼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생각 조차도 다스려 평강을 주시는 주인이 되십니다. 평강이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