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따르는 자(12): 징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삼하 11:4-5, 14-15, 12: 13-15, 18

 


오늘 다루는 인물은 12번째 성경인물로 유명한 다윗의 아내가 된 밧세바입니다. 그녀에게 일어난 에피소드로 시작할까 합니다. 갑자기 궁으로부터(11:4) 왕의 전령이 찾아 옵니다. 남편을 전쟁에 보낸 여인이라 뭔가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전령을 따라 궁으로 갔다 엄청난 일이 자신에게 벌어집니다.

 

왕의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11:5).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그녀의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데려와 집으로 가게 했지만 안 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전쟁에서 그를 죽게 만드는 계략으로 전사하게 만듭니다. 아이가 태어나지만(12:15) 일주 일 동안 아프다 그만 죽습니다(12:18).

 

사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11:27절에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그리고 나중 다윗을 찾아온 나단 선지자는 아이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습니다(12:14). 너무 기구한 삶을 산 여인입니다.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밧세바는 어떤 하나님을 만났을까요?

 

인간이 짓는 어떤 죄이든지 숨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밧세바는 다윗이 행한 죄악들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람의 계획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밧세바는 사람이 행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숨길 수 있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드러나지도 않을 죄를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죄는 스스로 숨는 속성이 있지만 하나님 때문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셨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기록된 행위의 책이 있기에(20:12) 부인도 못합니다.

 

그래서 벧전1:17은 이렇게 말합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숨겨둔 죄가 드러날 때12:13절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입니다.

 

죄를 인정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나단을 통해 전달됩니다.여호와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하였으니 당신이 죽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을 들은 밧세바는 너무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이 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기까지면 모든 것이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선지자의 입술은 닫히지 않습니다.

 

12:14을 보면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 태어날 아이가 죽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했는데 왜 아이가 죽어야 합니까? 용서는 벌이 없어야 진정한 용서 아닙니까? 아이는 태어났지만 일주일 만에 나단의 예언대로 됩니다(12:15, 18). 밧세바는 너무 당황스럽고 혼돈스럽지만 뭔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지만 징계도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용서 받았는데 징계가 왜 필요합니까? 죄 짓고 회개하면 용서만 있고 그 죄에 대한 징계가/벌이 없다면 사람들은 죄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더 죄를 지을 것입니다. 회개 중독 현상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도 겁나지 않겠지요.

 

기독교는 죄를 반복해서 짓게하고 회개 잘하는 인간을 만드는 종교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마 18:8-9에서 만일 우리 손이나 발이 범죄하면() 찍어 버려서라도(죄에 대한 징계)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12: 9-10역시 징계의 유익에 대해 말해줍니다.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성도가 죄 지은 후 더 거룩한 삶으로 더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징계입니다. 징계가 따른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못마땅해하며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징계의 범위를 정하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징계를 안 받으면 좋겠지만 주기로 결정되면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징계의 시간에 우리가 어떤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는지 다윗이 보여줍니다. 아이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은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징계의 시간에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어진 징계를 거두어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과 밧세바가 무너지지 않고 그 시간을 이겨 나가기 위함입니다.

 

한 가지 더 하나님의 자녀가 징계받는 이유를 삼하12:14에서 발견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 죄를 비방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지은 죄는 사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모독할 빌미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받는 징계 때문에 사탄조차도 하나님을 비난하지 못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이지만, 징계는 하나님의 공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사실 다윗의 죄 값은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용서 되었고 징계가 왔다면 징계는 죄값보다 훨씬 작은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은혜 아닙니까? 더 큰 죄값을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죽이지 않으시고 징계로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징계의 범위는 내가 원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결정하고 가장 적절한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징계일지라도 내게 유익하고 옳다는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

 

3:11-12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기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징계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밧세바와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망가지는 삶이 아니라 더욱 거룩한 삶을 살아갔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아픔과 눈물의 시간이 지나고 솔로몬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게 됩니다. 징계는 내 삶에 복이 오는 것을 막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오게 하는 통로임을 믿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