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따르는 자(6):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1:18, 22; 2:1-6

 


훌륭한 부모들이 많습니다. 성경에서는 모세의 부모가 그에 해당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떤 위험에도 자식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은 더 힘든 상황을 맞이합니다. 태어나는 히브리 남자 아이들에 대한 정책이 더 나빠지기 때문입니다.

 

애굽 왕은 히브리 산파들이 남자 아이들을 살리는 것을 알고(1:18) 이제는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나일강에 던지라는 새 명령을 하달 합니다(1:22). 실제 아이들이 죽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이런 명령을 내림으로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갖도록 분위기를 조장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누가 태어난 자식을 강에 던지려 하겠습니까? 동물도 새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데 자식을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강제로 빼앗겨 던져지는 것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애굽이 노린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도록 만들기 위한 악한 정책인 것입니다.

 

사탄은 늘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저지하려는 밑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뿐 아니라 교회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주님의 피값으로 세운 교회를 어렵게하고, 하나님 나라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탄의 계략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양의 옷을 입고 우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고 마7: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고후11:13-14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사탄도 자기를 밝은 천사로 우리를 속인다고 말해줍니다.

 

사탄이 비록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거역할 수 없습니다. 처음 인간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1:28) 명령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악한 애굽 왕이 만들어 내는 두려운 환경들을 무시하고 하나님 백성들 사이에서 사랑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2:1절을 보기 바랍니다.

 

레위 지파의 한 남자자 한 여자에게 장가를 듭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뜻이 애굽의 얄팍한 인간적인 계획을 이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모의 이름이 출6:20절에는 언급되지만 1장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것도 수 많은 사람들이 짝을 만나 자연스럽게 생명을 잉태하는 일들이 일어 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남녀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그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이 모인 믿음의 공동체가 만들어 내는 이해와 배려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 애굽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발견됩니다.  

 

아기 우는 소리를 들어 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상당히 고주파입니다. 콘크리트도, 방음 벽도 없는데 모세 부모는 아이를 낳아 석달을 키웠다고 합니다. 과연 공동체의 도움 없이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새벽이나 밤 늦은 시간에 아이가 울면 사람들은 어느 집에 아이가 태어난 것을 금방 알 것입니다.


다음은 그 아이가 남자인지 여아인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공동체의 보호와 사랑 가운데서 안전하게 석 달 동안 자라게 됩니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젊은 부부는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그들의 두려움을 감싸 안아주며 생명이 살아야 이스라엘이 산다는 위로를 그들에게 더해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도 형제 자매들이 가진 문제와 걱정거리를 먼저 이해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위로해 줄 때 그들 속에서 잠재하고 커 가는 두려움을 이겨 나가게 도울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분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아픔, 걱정, 염려 두려움을 가진 분들을 품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품어 낸다는 것은 그들의 아픔과 연약함을 들추어 내고 지적하기 보다 오히려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인내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언제까지 참습니까? 비록 그가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할지라도 나를 낮추어 그와 같은 눈 높이가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하셨습니다. 2:6-7절에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를 본 받아 진정 나를 낮출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낮출 때 타인에게서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모세 부모는 아이가 태어나자 잘 생긴”(예쁜:)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자신의 아이를 보고 예쁘지 않고 잘 생기기 않다고 말할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서 잘 생긴의 단어는 창1:4절에 나오는 좋았다는 원어(토브)와 동일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뜻이 말씀으로 선포되고 이 땅에서 이루어진 선한 결과를 보고 하나님이 평가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선하신 뜻(10) 가운데 태어났지 잘 생긴 외적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이를 통해 이룰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보며 아름다운 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사람은 어느 누구를 볼 때도 그 사람에게 허락하신 선하고 좋은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타인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부터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아이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복 덩어리로 보입니다. 게다가 늘 불안과 두려움 속에 있던 문제를 주께 맡겨 드리고 본인들도 자유로워 집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문제를 주님께 맡겨 드리기 위해 어린 아이지만 갈대 사이에 두게 됩니다. 맡김은 포기와 무관심이 아니고, 기도의 시작이며(3:7), 하나님을 움직이는 도전입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아이를 죽일 수도 있는 공주에게 발견되지만 드라마는 역전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발견하면 내가 해결자가 되지 말고, 선한 계획을 가지고 모든 것을 이룰 주님께 내어 드릴 때 두려움은 해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며 누구에게나 내면 속에 생기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을 정리할까 합니다.

 

#1우리를 둘러싼 두려움은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사랑을 공급 받을 때 날아갑니다. #2또한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우리들에게 있음을 알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찾아 모든 것을 맡기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위로와 사랑을 공급해 주기 위해서는 아픔을 잘 알고 이해하고 기다려 주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수준에서 남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수준까지 낯아지기 바랍니다. 이렇게 주를 따르기로 결심하는 모든 분들은  아멘으로 응답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