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따르는 자(5): 악을 이깁니다  

1:6-20

 


예배에 오신 신입생들을 환영하고 코넬 입학을 다시 한번 축하를 드립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새 학기가 되기 바라고, 방학을 마치고 온 재학생들도 더욱 주님과 동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오기 전부터 우리는 구약의 여성들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살펴오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배경을 간단히 말하면 애굽에 내려간 야곱 자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요셉이 죽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나타나고 이스라엘에게는 매우 불리한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를 따를 때 생기는 환경의 변화는 늘 좋은 것만이 아니라 어려움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10절에 애굽의 새 왕은 이스라엘이 점점 수적으로 번성해 가자 미래의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조치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감독을 세워 성 쌓는 일에 강제노역을 시킵니다(11). 다음에는 농사일까지 추가 시킵니다(14). 하지만 모든 것이 실패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12절의 그러나라는 접속어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자는 눈 앞에 나타난 현상만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 장로, 제직, 목장지지, 임원들은 현실에서 역사하는 주를 찾아 힘들어 하는 이웃들에게 메시지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따르는 자는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나타나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찾은 하나님의 모습이 바로 12절의 학대를 받을 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가니라는 말씀입니다.

 

12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은 정작 생략합니다. 이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을 돕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이 힘들게 할지라도 우리 편에 서서 보이지 않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백의 메시지로 만들어 이웃에게 들려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데 참 아이러니한 것이 발견됩니다. 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람들도 그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점점 강성해지자 애굽 왕은 태어나는 이스라엘 남자 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과 함께 히브리 산파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악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할 것이 있습니다. 주를 따르는 자들인 우리도 세상에서 악한 일이 실행되는 곳에서 제외 되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도 그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자는 그 상황에서 악을 이기고 주의 편에 서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산파에게 정말 힘든 것은 출생 현장에서 남자 아이가 나오면 바로 자신들의 손으로 죽여야 했습니다(16). 거역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산파는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살립니다(17). 이들은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들 역시 악이 벌어지는 현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에 저항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들 역시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너무 두려웠을 것입니다. 남자 아이를 여자 아이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왕에게 거짓을 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 여인들은 애굽 왕에게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히브리 여인들이 너무 건강하여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아이들을 낳아 버린다는 것입니다(19). 이들의 대답은 그들 자신들이 가진 지혜인지 모릅니다.

 

산파라고 하면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왔습니다. 많은 힘든 일을 경험 해 본 여인들일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생명에 대한 애착과 임기응변의 노련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왕의 질문에 대한 지혜로운 대답을 하는데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이 두 여인은 생명에 대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사람은 단지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이나, 인간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 외에도 더 가진 것이 있습니다. 17절과 21절의 하나님 말씀이 분명히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주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10:28)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요? 20절은 분명히 그것이 은혜였다고 말씀합니다.

 

은혜를 받고 사는 이스라엘을 본 애굽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발견합니다. 그것으로 제국을 호령하는 애굽 왕보다 세상 위에 있는 하나님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짓누르는 사람의 힘(억압)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더 체험합니다.

 

히브리 산모들이 건강함을 안 산파들이 의도적으로 늦게 도착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가진 산파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담대해 질 수 없습니다. 은혜가 없었더라면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왕의 질문 앞에서 그들의 지혜로운 대답도 입 안에서만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따르는 자는 세상에서 은혜로 강해지고 담대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담대함을 주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질서가 있는데 그것을 공의와 정의라고 합니다(사랑). 악으로 인해 막혀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세상에 이것들이 흘러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주를 따르는 자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막힌 곳을 뚫어내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삽니다. 비록 악 속에 함께 살아갈지라도 사람 편에 서지 않고 진리가 아닌 악과 싸워 넉넉히 이깁니다. 오늘 이런 결단들이 있는 분들은 소리 내어 아멘으로 주께 응답하시기 바랍니다.